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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산책(사순1주간 금요일)
작성자박상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4-03-05 조회수1,491 추천수16 반대(0) 신고

◎ 2004년 3월 5일 (금) - 사순 제1주간 금요일

 

[오늘의 복음]  마태 5,20-26

<먼저 형제를 찾아가 화해하여라.>

 

  20) "잘 들어라. 너희가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살지 못한다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21) ’살인하지 마라. 살인하는 자는 누구든지 재판을 받아야 한다’ 하고 옛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22)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사람은 누구나 재판을 받아야 하며 자기 형제를 가리켜 바보라고 욕하는 사람은 중앙 법정에 넘겨질 것이다. 또 자기 형제더러 미친놈이라고 하는 사람은 불붙는 지옥에 던져질 것이다. 23) 그러므로 제단에 예물을 드리려 할 때에 너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형제가 생각나거든 24) 그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그를 찾아가 화해하고 나서 돌아와 예물을 드려라. 25) 누가 너를 고소하여 그와 함께 법정으로 갈 때에는 도중에서 얼른 화해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고소하는 사람이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형리에게 내주어 감옥에 가둘 것이다. 26) 분명히 말해 둔다. 네가 마지막 한 푼까지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풀려 나오지 못할 것이다."◆

 

[복음산책]  더 옳게 사는 법을 따라...

 

  8가지 참된 행복의 길을 훈시하는 것으로 시작된 산상설교는 예수님의 도래로 세워지는 하느님나라의 백성이 될 자격조건과 지침을 제시한다. 이스라엘이 알고 있는 하느님 백성의 자격조건은 모세의 율법(모세오경)과 예언서의 말씀을 글자 그대로 따르고 지키는 일이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에 주신 율법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하느님께서 손수 돌판에 새겨준(출애 31,18) ’십계명’이고, 다른 하나는 십계명에 딸리고 관련된 수많은 규정들과 법령들이다. 후자(後者)에는 하느님께서 직접 모세를 통하여 주신 것도 있고, 조상들에 의해 덧붙여 만들어진 규정과 전통들도 있다. 여기에 예언서의 말씀도 같은 비중으로 중요한 것으로 유다인들은 생각한다. 예수님 시대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이를 잘 따르고 지켰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살아야 하느님나라를 차지하고 그 나라의 백성이 될 자격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율사들과 바리사이들의 옳음과 의로움을 인정하신 것만은 틀림없다. 그러나 요구되는 것은 그들보다 더 옳게 사는 것이다. 여기서 분명히 구별되어야 할 것은 율사와 바리사의 ’옳음’과 제자들에게 요구되는 ’더 옳음’이다. ’더 옳음’이 원급(原級) ’옳음’의 비교급(比較級)으로만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이는 원급과 비교급의 관계와 차원을 완전히 넘어서는 것이다. 즉,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더 옳음’의 깊은 뜻은 다른 데 있다는 말이다. 율사들과 바리사이들이 옳게 사는 것은 사실이나 그들의 옳음은 그들만의 생각에 기준을 둔 것으로서, 결국 율법의 자구(字句)에만 매인 것이다. 예수님에 의해 새로이 요구되는 ’더 옳음’은 하느님의 뜻에 기준을 둔 것이며, 율법의 정신을 파고드는 것이다.

 

  구약의 율법에도 하느님 계명의 근본정신은 분명히 있다.(신명 5,32-6,25) 그러나 그 근본정신이 율사들과 바리사이들의 ’옳다는 행실’에는 빠져 있음을 예수께서 보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구약의 율법과 예언서의 말씀을 없애러 오신 것이 아니라 근본정신을 다시 심어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5,17)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행실이 우선 소금과 빛의 실제적이고 상징적인 기능을 모두 수행하는 것이 되기를 요구하신다.(5,13-16) 그런 다음 ’더 옳게’ 사는 방법을 6개의 대당명제(5,21-48)를 통하여 조직적으로 제시하신다. 대당명제는 구약의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새로운 해석으로 피력된다. 예수님의 새로운 해석은 율법주의적 사고방식을 깨뜨리고 율법의 근본정신을 밝히는 것이다. 이는 곧 법의 형식논리를 넘어 법의 정신을 추구하는 것이다. 6개의 대당명제는 ① 살인하지 말라 - 성내지도 말라(21-26절), ② 간음하지 말라 - 음란한 생각조차 품지 말라(27-30절), ③ 이혼장을 써 주어라 - 아내를 소박(疏薄)하지 말라(31-32절), ④ 거짓 맹세를 하지 말라 - 아예 맹세를 하지 말라(33-37절), 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 앙갚음(보복)을 하지 말라(38-42절), ⑥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 - 원수까지도 사랑하라(43-48절)는 것이다.

 

  오늘 복음은 6개의 대당명제 중 첫 번째의 대당명제에 해당한다. "살인하지 못한다."(출애 20,13) 살인죄를 범한 사람은 재판을 받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반드시 자기 목숨으로 그 죄 값을 치러야 한다.(출애 20,12-17) 이것이 구약의 율법이다. 따라서 옳게 사는 방법은 이 율법을 잘 지키면 된다. 그러나 더 옳게 사는 것이 요구된다. 어떻게 사는 것이 더 옳게 사는 것인가? 더 옳게 사는 것은 율법을 다 지켰다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오늘 복음이 바로 그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그 기준은 예수님의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라는 역설적인 도식 속에 숨겨져 있다. 율법에는 ’살인’이 ’재판’(사형)에 해당되지만, 예수께는 형제에게 ’성’을 내는 것만으로도 살인과 같은 ’재판’(사형)을 받아야 한다. 더 나아가 ’바보’라는 욕은 ’중앙법정’에 넘겨지며, ’미친놈’이라는 폭언은 ’불붙는 지옥불’에 던져진다는 것이다. 형제에게 ’성’을 내는 것만으로도 이미 사형의 죄 값을 치러야 하는 마당에 ’바보’나 ’미친놈’이라는 폭언에 대하여 더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어도 십계명은 여전히 유효하다. 허나 ’더 옳게’ 사는 방법으로 요구되는 것은 계명을 지키는 것에만 머물지 않는다.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제5계명에 대한 예수님의 새로운 해석에 결코 귀를 막아서는 안 된다. 예수님은 사람이 사람을 죽일 때 아무 이유 없이 죽이지 않음을 알고 계신다. 그렇다고 모든 성냄과 폭언이 살인을 몰고 오는 것은 아니다. 살다보면 형제에게 화도 내고 욕도 하고 폭언을 일삼을 수도 있다. 그러나 화가 욕이 되고 욕이 폭언되며, 폭언의 단계에 도달한 사람은 보통 자기제어능력을 상실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성’을 내기 전의 단계인 마음속의 원한까지도 사전에 풀기를 바라신다. 형제에게 원한을 품은 마음으로 제단에 바쳐지는 예물을 하느님께서는 바라지 않으신다. 예물은 마음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행위의 결과보다 그 행위를 촉발하는 마음속의 의도와 원인이 더 중요함을 깨달아야 한다. 사순시기는 이렇게 자신의 마음을 잘 다스리는 때이다.◆[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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