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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산책(사순1주간 토요일)
작성자박상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4-03-06 조회수1,361 추천수10 반대(0) 신고

◎ 2004년 3월 6일 (토) - 사순 제1주간 토요일

 

[오늘의 복음]  마태 5,43-48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43) "’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여라’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44)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45) 그래야만 너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 46)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47) 또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를 한다면 남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48)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복음산책]  하느님의 거룩함을 닮게 하는 원수에 대한 사랑과 기도

 

  오늘 복음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사는 방법으로 제시된 마지막 여섯 번째 대당명제를 가르친다. 6개의 대당명제를 다시 한번 되새겨 보자면, ① 살인하지 말라 - 성내지도 말라(21-26절), ② 간음하지 말라 - 음란한 생각조차 품지 말라(27-30절), ③ 이혼장을 써 주어라 - 아내를 소박(疏薄)하지 말라(31-32절), ④ 거짓 맹세를 하지 말라 - 아예 맹세를 하지 말라(33-37절), 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 앙갚음(보복)을 하지 말라(38-42절), ⑥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 - 원수까지도 사랑하라(43-48절)는 것이다. 이들 대당명제는 예수님 특유의 ’너희는 들었다’는 기본명제(基本命題)와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라는 반명제(反命題)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반명제로 훈시된 가르침을 따라 행하는 것이 곧 ’더 옳게’ 사는 방법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나마 ’옳게’ 산다고 하는 율사들과 바리사이들보다 ’더 옳게’ 사는 것이 어디 그리 쉬운 일이겠는가? ’더 옳게’ 살기를 실천하기는 분명히 어렵다. 그러나 적어도 그렇게 사는 방법과 이론은 배웠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그보다 더 엄청난 요구가 제시된다. 예수께서 우리더러 하느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48절) 너무 지나친 요구가 아닌가? 걸음마도 채 배우기 전에 달리기를 하라는 것인가? 그렇다고 주저 않지는 말자. 어제 복음과 연결하여 오늘 복음에서 그 답을 찾아보자. 어제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첫 번째 대당명제를 통하여 행위의 결과보다 행위를 촉발하는 마음속의 의도와 원인이 더 중요함을 깨우쳐 주셨다. ’살인하지 못한다. 살인죄를 범한 사람은 재판을 받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반드시 자기 목숨으로 그 죗값을 치러야 한다’(출애 20,13; 21,12-17)는 구약의 율법을 지키는 것은 ’옳게’ 사는 것이다. 그러나 ’더 옳게’ 사는 방법은 살인은 물론이며, 형제에게 폭언도 욕도 성도 내지 않는 것이고, 나아가 마음속으로 원한도 품지 않는 것이며, 원한이 있다면 즉각 화해를 청하는 것이었다. 어떤가? 이만큼 하는 것도 어렵다는 생각이 들겠지만 좀 소극적이지 않는가? 하지 말라는 것을 하지 않는 것은 분명 소극적인 행동이다. 따라서 ’더 옳게’ 사는 방법이 결국은 소극적인 행동이 될 수 있다는 결론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라는 요구는 소극적인 행동을 넘어선 적극적인 행동에 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여섯 번째 대당명제를 살펴보자. 기본명제는 ’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여라’는 것이고, 반명제는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는 것이다. 그런데 기본명제에서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전반부는 구약의 율법조문이지만(레위 19,18), ’원수를 미워하라’는 후반부는 구약에서 찾아볼 수 없는 계명이다. 구약성서에서도 원수에 대한 사랑을 높이 평가한 부분이 있기는 하다. 그것은 다윗이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을 되려 살려주는 대목에서 사울이 "원수를 만나서 고스란히 돌려보낼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그런데도 네가 오늘 나에게 이런 일을 해 주었으니 야훼께서 너에게 상을 주시기를 바란다"(1사무 24,20)라고 말한 곳이다. ’원수를 미워하라’는 명제에 대하여 성서학자들은 마태오가 반명제를 만들기 위해서 사해(死海) 근처에 모여 살았던 꿈란 공동체의 규범 중에서 "빛의 아들들을 사랑하고, 어둠의 아들들을 미워할지니, 그들은 자신의 죄과(罪過)대로 하느님의 보복을 받을 것이다"는 대목을 빌어와 가필(加筆)한 것으로 추정한다. 출처야 어찌 되었던 예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라’(44절)는 반명제를 선포하신다. 형제에게 성을 내지 않고 마음속으로 원한을 품지 않는 행위는 분명 소극적인 행동이고, 화해를 청하는 일은 다소 적극적이기 하나 서로의 잘못을 시인하고 타협하는 일종의 중립적인 행동이다. 그러나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자를 위해 기도하는 일은 어떠한가? 이는 정히 적극적인 행동인 것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악한 사람의 악행을 보고 그 자리에서 벌(罰)하시고, 착한 사람의 선행을 보고 그 자리에서 상(償)을 내리신다면, 이는 율사들과 바리사이들이 추구하는 ’옳게’ 사는 것에 장단을 맞추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악인(惡人)이나 선인(善人)을 보시고도 당장 아무 것도 하지 않으시고 가만히 계신다면, 이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요구하시는 ’더 옳게’ 사는 기준에 부합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면(45절), 이는 하느님의 적극적인 행위로서 그분의 ’아가페 사랑’에 일치하는 행위이다. 이 행위는 하느님의 완전성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완전(完全)하다는 것은 ’온전할 뿐만 아니라 전체적이다’는 것이며, ’나누어지지 않았다’는 뜻으로서 ’거룩함’을 말한다. 하느님께서 완전하시니 너희도 완전하게 되라는 예수님의 요구는 곧 "내가 거룩하니 너희들도 거룩하게 되어라"(레위 11,44-45; 1베드 1,13-21 참조)는 하느님의 자기 백성에 대한 요구인 것이다. 실로 엄청난 요구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거룩함을 닮아야 하는 것이 우리 신앙인의 궁극적인 목적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원수까지 사랑하는 일은 간단한 표현이나 동정 안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원수에 대한 사랑과 기도를 통하여 완전함과 거룩함에로 나아가는 길은 머리통에 가시가 박히고 두 손과 두 발이 못으로 뚫리는 엄청난 고통을 피해 갈 수 없는 길이다.◆[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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