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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드러난 타락과 숨겨진 타락 ♣
작성자조영숙 쪽지 캡슐 작성일2004-03-13 조회수1,582 추천수6 반대(0) 신고

 

 ♣드러난 타락과 숨겨진 타락 ♣

 

사람에게도 철새와 같이 낮이 짧아지는 가을이나 낮이 길어지는 봄이 되면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방황심리가 발동한다.그 같은 방황에 1년 내내,아니

평생 시달리는 이가 있다.

 

방황은 현재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리고 싶은 충동에서 비롯된다.  작은아들

은 그 충동을 못 이기고 현재의 삶의 자리인 아버지와 형을 떠나  명확하지

않지만 가슴을 들뜨게 하는 꿈을 찾아 떠난다.

 

사람은 방황을 통하여 삶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기도 한다.

사실 큰아들과 같이 방황하지 않는 이는 평생 회개의 필요성에 대하여 깊이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잘 정비된 공동체나 조직의 질서에 순응하며 하루

하루를 별 탈 없이 살아가는 이에게 방황은 사치스러운 것이고 자신을 통제

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작은 아들은 인간의 본능에 숨겨져 있는 자유를 억제하지 못하여 방

황의 길을 떠난다.   그리고 그 방황을 끝내고 본래의 자리로 귀환함으로써

전보다 더 큰 삶을 발견하게 된다.

 

반면 큰아들은 현재에 순응하고 흐름을 잘 타서 대과 없는 삶을 진행시킨다.

하지만 큰아들의 마음 깊은 곳에 숨어 있는 경쟁심과 분노는 부서지지 않는

자아로 평생을 다진 사람의 전형이다.

 

이 같은 두 아들의 드러난 타락과 숨겨진 타락과 달리 아버지는 두 눈이 짓

무르도록 아들들이 당신 곁으로 돌아와 참된 자신을 발견하기를 바란다.

 

방황하는 이나 억제할 줄 아는 이나 하느님 품에 안기기까지 끊임없이 회개

해야 할 사람들이기는 마찬가지다. 그것이 하느님의 자비로운 뜻이다.

 

《 2004년 ’야곱의 우물’에 나오는 매일성서묵상 3월 13일자 내용으로

’솔뫼 피정의 집’ 관장 윤인규 신부님의 글입니다.》

 

†【안나의 묵상나누기】†

 

오늘은 바오로딸에서 출간된 송봉모 신부님의 『대자대비하신 하느님』冊

에서 마음에 닿는 글들을 요약하였습니다.

 

루가복음 15장을 묵상하기 전에 한 가지 유념해야 할 점이 있다.

우리가 아무리 ’탕자의 비유’를 잘 알고 잇다 하더라도 처음 듣는

것처럼 온 정신을 집중해서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날 탕자의 아버지에 대해 훌륭한 설교를 했던 채프먼(J. W. Chapman)

이라는 목회가 미국 국립공원 중 하나인 그랜드캐니언에 갔을 때 일이다.

관광객을 실은 버스가 그랜드캐니언에 도착하자 사람들은 창밖으로 보이

는 장관에 압도되어 감탄을 연발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주위에 펼쳐지는 풍경엔 눈도 주지 않은 채 책만 읽고 있었다.

차가 전망대에 도착해 모두들 차에서 내리자 계속 책만 보고 있던 그 사람

이 일어나면서 자기 친구에게 말하였다. "난 여기 벌써 열네 번이나 왔어.

처음 왔을 때는 나도 너처럼 경치에 압도되어 눈물을 줄줄 흘렸었지.

하지만 지금은 별로야."

 

’돌아온 탕자’ 이야기를 듣는 우리의 반응도 열네 번째 그랜드캐니언에 와

보았다는 사람과 같을지도 모른다. "또 돌아온 탕자 이야기군! 이 이야기는

회심에 대한 강론을 들을 때마다 듣게 되는 이야기잖아. 지난번 사순절때도

들었어. 이젠 하도 들어서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야." 처음 이 복음을 들을

때는 하느님의 놀라운 사랑에 감동했었지만 자주 듣게 되면서 덤덤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 복음 안에 넘쳐흐르는 하느님 자비의 세계. 사랑의 세계는 몇 번

을 들어도 절대 간과될 수 없는 감동의 세계여야 한다. 하느님의 참모습을

보여주는 이 복음 앞에서 우리의 마음은 언제나 감동으로 떨어야 할 것이다.

 

작은아들은 자유를 찾아 떠났지만 정작 자유를 찾은 것은 아니다.그가 찾은

것이라곤 냄새나는 돼지우리 안에 놓인 자신이었다. 자유를 찾아 아버지를

떠나는 작은아들의 모습은 다음과 같이 묘사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절벽에서 뛰어내려 새처럼 자유롭게 날겠다고 우겨댄다.그러고

는 정말로 절벽에서 몸을 내던진다. 잠시 동안 그는 새처럼 허공을 난다.

그러나 그의 몸은 곧 땅바닥을 향해 내려꽂힌다. 그의 몸은 박살이 난다.

 

 

 

"떠날 자유를 주는 아버지만이 돌아올 자유도 준다."는 말은 죄인인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말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떠날 자유를 주시었기에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지만 같은 아버지께서 돌아올 자유도 주시었기에 용기를

내어 회심할 수 있는 것이다.

 

아버지는 아들이 집을 떠나 타지로 나간다는 것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이미 알고 있다.하지만 아버지는 아들이 실패를 체험하도록 허락해 준다.

아버지는 안다.

 

인생 체험은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배우는 것임을. 인간은 실수를 통해서

배우게 되고, 또 그 실수 덕에 올바른 결정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아버지는 안다.

 

아들이 아버지를 떠나게 되면 타락할 것이고, 그로써 부정적 체험과 고통

스런 출혈이 있을 것임을. 하지만 그러한 체험을 통해서 아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절실이 필요로 하게 되고 다시 돌아올 것임을.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말했듯이

"하느님은 인간이 악을 경험하지 않는 것보다 악을 경험하여 악에서 선을

얻는 것이 더 좋다고 보는 분이시다."

 

아버지는 아들이 타락한다고 해도 완전히 타락한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무조건적인 사랑이 어떤 타락의 자리에서도 아들을

지켜줄 것이다.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성장한 아들이기에 젊은

날 자기 멋대로 방탕하게 산다 해도 결국은 바른길로 돌아올 것이다.

 

 

 

하지만 먼 고장이 꼭 지형적 장소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인간이 세속

적인 것에 집착하면서 하느님을 떠나 있을 수 있는 모든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헨리 나웬은 아버지 집을 떠나 먼 고장으로 떠나는 행위를 다음

과 같이 해석한다.

 

’그것이야말로 영적인 사실에 대한 부정이다. 여기서 영적인 사실이란 내

존재의 모든 면에 있어서 내 자신이 하느님께 속한다는 것, 또 하느님께서

영원한 포옹 속에서 나를 안전하게 끌어안고 계시다는 것.그리고 나는 사실

하느님의 손으로 지음받은 존재이며 그분의 손아래 감추어진 존재라는 점이다.

 

 

아버지를 떠난 자가 갖게 되는 마지막 추락은 인간성의 상실이다.

작은아들은 돼지먹이라도 먹으려 하지만 그나마 주는 이도 없다.

돼지먹이마저 없으면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데도 누구 하나 상관하지 않는다.

 

이 비유는 생명의 뿌리인 하느님 아버지를 떠날 때 겪게 될 비참함이 어떨지

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그렇다!작은아들은 아버지를 떠나 모든 것을 잃었다.

돈도, 친구도, 자신의 신원도, 나아가 인간이란 정체성도. 하지만 잃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

 

아무리 잃고 싶어도 잃을 수 없는 것.그것은 아버지의 사랑이다. 아버지는

아들이 집을 나간 그 순간부터 집 밖에 나와서 아들을 기다린다. 아버지의

이 사랑만은 작은아들이 아무리 잃고 싶어도 잃을 수가 없다.   그에게 이

사랑은 마지막 희망이다.

 

 

 

’제정신이 들다.’란 회심을 가리키는 중요한 표현이다. 죽었던 정신이

되살아난 것이다. 그리스 문장을 직역하면 ’자기 자신에게 돌아오다.’

이다.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온다는 것은 곧 제정신을 찾는다는 것이다.

아들이 아버지를 떠나서 살아가는 동안은 제정신으로 사는 것도, 자기

자신이 되어 사는 것도 아니다.

 

여기에 중요한 가르침이 하나 있다. 안긴아 하느님을 떠난다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을 떠난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자기 자신을 떠나서 살아

가는 사람은 하느님을 떠나서 사는 사람이다. 토머스 머턴은 자신과의

만남이 곧 하느님과의 만남이라고 했다.

 

그 까닭을 그는 다음과 같은 예화를 들어 설명한다.

"만일에 집 안에서 잃어버린 바늘을 집 밖에서 찾는다면 그처럼 어처구

니없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인간이 하느님의 은총을 마음 안에서 잃어버

리고 밖에서 찾는다면 무익한 일이다.참 자신을 만난다는 것은 곧 하느

님을 다시 찾는 일이다."

 

 

 

자기 자신으로 돌아와야 아버지께로 돌아갈 수 있다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가 말씀드려야지."). 아버지께 돌아간다는 것은 회심이다.  작은아들

이 제정신이 들면서 기억했던 두 가지 사실은 회심의 기본 움직임을

구성한다.

 

회심은

첫째, 자신의 처지를 깊이 인식하고 ("나는 여기서 굶어 죽게 되었구나."),

둘째,자신의 본래 자리를 기억함으로써 시작된다("<아버지 집은>빵이

남아도는데").

 

그리고 다른 한 가지는 아버지의 마음을 기억하는 것이다.작은아들은

제정신이 들면서 아버지가 얼마나 자비로운 분인가를 기억해 낸다.

품꾼들조차 빵이 남아돌도록 먹이시는 아버지께서 자기를 받아줄 것임

을 확신하고 마침내 돌아갈 것을 결심하는 것이다.

떠나갈 자유를 주신 아버지께서는 돌아올 자유도 주시기에.

 

존 포웰 신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태양은 빛과 온기를 갖고 있으면서 사람에게 밝음과 따스함을 주지만

인간은 언제든지 태양을 피하여 어둠과 추위 속에 머물 수 있다.

인간이 추위와 어둠을 맛본다면 그것은 태양 탓이 아니라 태양을 피한

인간 탓이다.

 

태양은 언제나 변함없이 인간을 비추고 있으니 태양 탓이 아니다.

인간이 태양을 피해 어둠 속으로 들어갈 수 있듯이 하느님 생명을 피하여

어둠과 외로움 속으로 들어 갈 수 있다. 그러나 하느님 생명과 사랑은

태양처럼 변함없이 퍼져 나오면서 인간이 다시 돌아오기만 하면 그 따스함

과 밝음을 선사해 준다.

 

 

 

"그는 일어나 자기 아버지에게로 돌아갔습니다." 이 문장은 탕자의 생애

에서극적인 전환점을 보여주는 문장이다. 제정신이 든 것이 심적인 전환점

이라면,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간 것은 동적인 전환점이다. 생각만 해서는

안 된다. 생각한 것을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만챡 탕자가 돼지우리 속에서 울고만 있었다면 무슨 변화가 잇었겠는가?

마찬가지다. 누군가 지난날의 잘못에 대해 후회를 하면서도 계속 같은

식으로 산다면 그 후회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한 죄인이 자기 죄를 뉘우치고 슬퍼하는 것은 아름답지만 그 죄인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그 뉘우침은 감상에

지나지 않는다. 뉘우침이 행동으로 나올 때 비로소 새로운 삶이 시작

되는 것이다.

 

 

아버지는 아직 멀리 있을 때 이미 아들을 알아보지만 아들은 그렇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자비의 눈은 회심의 눈보다 훨씬 더 빨리

움직이는 것이니까.

 

회심은 아들을 잃어버린 아버지로부터 시작된다. 하느님께서 먼저

기다리고 계셨기에 우리의 회심이 가능한 것이다. 하느님의 용서가

이미 주어졌기에 죄인이 감히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회심은 기다리는 아버지로부터 시작되었지만 정작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아버지는 그저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릴

뿐이다. 아들이 제정신이 들어 아버지께 돌아오지 않는 한 아버지는

어찌할 수가 없다.

 

이것은 중요한 가르침이다. 죄인인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고 하느님께

돌아가지 않는 한 하느님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 그저 기다릴 뿐이다.

 

묵시록에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에게 들어가 그와 함께 만찬을

나누고 그도 나와 함께 만찬을 나눌 것이다."[묵시록3:20] 라는

말씀이 있다.

 

그렇담면 문을 두드리는 자는 누구이며, 문을 여는 자는 누구인가?

주님께서 울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고, 우리가 주님께 문을 열어

드린다. 문은 안에서 열게 되어 있다. 우리가 안에서 문을 열어

주님을 영접하지 않는 한 주님은 우리 마음 안으로 들어오실

수 없다.

 

기다리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이 없으신 하느님 아버지,

문을 두들기는 것 이외는 다른 선택이 없으신 구세주 예수께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어서 돌아 가는 것이다. 어서 문을 여는 것이다.

 

- 중 략 -

 

아주 자그마한 책 속에 우리의 마음을 흠뻑 적셔줄 내용이 많습니다.

몽땅 옮겨 놓고 싶은

 

안나가요*^^*

 

※오늘의 말씀: 루가복음 15장 1절~32절 말씀 입니다.※

 

그때에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 들었다.

이것을 본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저 사람은 죄인들을 환영

하고 그들과 함께 음식까지 나누고 있구나!" 하며 못마땅해하였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셨다."어떤 사람이 두아들을

두었는데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제 몫으로 돌아올 재산을 달라고 청하

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재산을 갈라 두 아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며칠 뒤

에 작은아들은 자기 재산을 다 거두어 가지고 먼 고장으로 떠나갔다.

 

거기서 재산을 마구 뿌리며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다가 돈이 떨어

졌는데 마침 그 고장에 심한 흉년까지 들어서 그는 알거지가 되고 말았다.

하는 수 없이 그는 그 고장에 사는 어떤 사람의 집에 가서 더부살이를

하게 되었는데 주인은 그를 농장으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그는 하도 배가 고파서 돼지가 먹는 쥐엄나무 열매로라도 배를 채워보려고

했으나 그에게 먹을 것을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아버지 집에는 양식이 많아서 그 많은 일꾼들이

먹고도 남는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게 되었구나! 어서 아버지께 돌아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 저는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자격이 없으니 저를 품꾼으로라도 써주십시오 하고 사정해

보리라.’ 마침내 그는 거기를 떠나 자기아버지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멀리서 본 아버지는 측은한 생각이 들어 달려가

아들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아들은 ’아버지 저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 저는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자격이

없습니다’하고 말하였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하인들을 불러 ’어서 제일 좋은 옷을 꺼내어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신을 신겨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내다 잡아라.

먹고 즐기자! 죽었던 내 아들이 다시 살아왔다.잃었던 아들을 다시 찾았다’

하고 말했다. 그래서 성대한 잔치가 벌어졋다.

 

밭에 나가 있던 큰아들이 돌아오다가 집 가까이에서 음악소리와 춤추며

떠드는 소리를 듣고 하인 하나를 불러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하인이

’아우님이 돌아왔습니다.그분이 무사히 돌아오셨다고 주인께서 살진 송아지

를 잡게 하셨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큰아들은 화가 나서 집에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서

달랬으나 그는 아버지에게 ’아버지, 저는 이렇게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위해서 종이나 다름없이 일을 하며 아버지의 명령을 어긴 일이 한번도 없

었습니다. 그런데도 저에게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 주시지

않으시더니 창녀들한테 빠져서 아버지의 재산을 다 날려버린 동생이 돌아오

니까 그 아이를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까지 잡아주시다니요!’하고 투덜거렸다.

 

이 말을 듣고 아버지는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모두 네 것이

아니냐? 그런데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왔으니 잃었던 사람을 되찾은

셈이다. 그러니 이 기쁜 날을 어떻게 즐기지 않겠느냐?’하고 말하였다.:):)

 

 

[잠언 13장 1절]

"슬기로운 아들은 훈계를 달게 받지만

 거만한 자는 꾸지람을 듣지 않는다."

 

http://cafe.daum.net/peacefulway  길벗산책 방에

오시면 음악과 함께 묵상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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