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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산책(사순3주간 월요일)
작성자박상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4-03-15 조회수1,440 추천수11 반대(0) 신고

◎ 2004년 3월 15일 (월) - 사순 제3주간 월요일

 

[오늘의 복음]  루가 4,24-30

<예수님은 엘리야나 엘리사같이 유다인만을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다.>

 

  24)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실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25) 잘 들어라. 엘리야 시대에 삼 년 반 동안이나 하늘이 닫혀 비가 내리지 않고 온 나라에 심한 기근이 들었을 때 이스라엘에는 과부가 많았지만 26) 하느님께서는 엘리야를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보내시지 않고 다만 시돈 지방 사렙다 마을에 사는 어떤 과부에게만 보내주셨다. 27) 또 예언자 엘리사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많은 나병환자가 살고 있었지만 그들은 단 한 사람도 고쳐주시지 않고 시리아 사람인 나아만만을 깨끗하게 고쳐주셨다." 28) 회당에 모였던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는 모두 화가 나서 29) 들고일어나 예수를 동네 밖으로 끌어냈다. 그 동네는 산 위에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를 산 벼랑까지 끌고 가서 밀어 떨어뜨리려 하였다. 30)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한가운데를 지나서 자기의 갈 길을 가셨다.◆

 

[복음산책]  공생활의 시작 - 수난과 죽음의 전주곡

 

  루가복음에 의하면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신 예수께서는 40일간 광야 대피정을 마친 후 갈릴래아 지역에서 첫 활동을 하셨다. 그런 다음 태어난 곳은 아니지만 고향과도 같은 나자렛으로 가셨다. 오늘 복음은 이곳 나자렛 회당에서의 활동(4,16-30) 그 후반부를 들려준다. 이곳 나자렛 회당에서의 설교가 사실상 루가복음이 의도하는 예수님의 첫 활동이라 할 수 있다. 마침 안식일이었던 터라 회당예배에 참석하신 예수님은 이사야 예언서에 기록된 메시아예언(이사 61,1-2)을 봉독하시고,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21절)라는 엄청난 비밀을 폭로하셨다. 이는 곧 예수께서 자기 사명을 계시하신 것이다. 고향사람들은 우선 예수의 가르침에 매료되어 칭찬과 탄복의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곧바로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23절)하면서, 그저 그렇다는 냉랭한 태도를 취하였다.

 

  그럴 수도 있는 것이 유다인들은 매일 "쉐마, 이스라엘"(신명 6,4-5)을 기도하고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율법과 예언서를 봉독하고 이에 대한 설교를 들었다. 따라서 예수를 그저 요셉의 아들로 생각하는 그들에게 예수의 입에서 나오는 비밀폭로(계시)는 잠시 놀라움의 대상은 되겠으나, 결코 새로운 것일 수는 없었다. 게다가 예수께서 기원전 900년경 엘리야가 이방인 과부를 돌보고(1열왕 17,7-16), 그의 제자 엘리사가 이방인 나아만의 나병을 고쳐준 일(2열왕 5,1-14)을 들먹거려 배척의 빌미를 제공하신다.(25-27절) 이 말을 듣고 화가 치밀어 오른 나자렛의 지인(知人)들이 예수를 동네 밖으로 끌어내 벼랑으로 떠밀어 죽이려 들자, 예수님은 그들의 한가운데를 지나 ’자신의 갈 길’을 가셨다. 오늘은 그냥 피해가지만 ’또 다른 벼랑’이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다. 그 때까지는 아무도 예수님의 길을 앞당기거나 막을 수 없다.

 

  오늘 복음은 사순 제3주간 월요일뿐 아니라, 앞서간 16-23절을 합쳐서 연중 제22주간 월요일에 봉독된다. 같은 복음이라 할지라도 시기에 따라 그 뉘앙스가 다르다. 예수님의 공생활을 두루 묵상하는 연중시기의 분위기와 수난과 죽음을 목전에 둔 사순시기의 분위기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연중시기의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공생활개시와 사명의 선포 차원으로 이해될 수 있고,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24절)는 말씀도 그저 전통적인 속담의 인용으로 들릴 뿐, 막 개시된 공생활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사순시기의 오늘 복음은 상당 부분, 공생활 시작부터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암시하는 차원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구약의 예언자들도 죽임을 당할 때면 늘 동네 밖으로 끌려나갔다. 그것은 ’율법을 어긴 죄인들을 동네나 진지 밖으로 끌어내 돌로 쳐죽여라’는 율법규정(민수 15,35; 신명 17,5))에 의한 것이다. 예수께서 세례자 요한처럼 회개의 설교를 선포하였다면, 예수 또한 요한과 비슷한 예언자로 취급받았을 것이다. 예수로 말미암아 메시아예언(이사 61,1-2)과 ’하느님 은총의 해’의 선포가 성취된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인정한다면, 예수는 자동적으로 하느님을 모독한 자로 처벌받을 것이다. 예수께서 예고된 메시아라면 유다백성을 위한 메시아여야 하는데, 이방인 과부와 나아만을 들먹거리는 태도는 마땅히 유다인들의 분노를 싸고 그들의 배척을 초래하는 행위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예수께 달리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예수께는 어떤 타협도 없으며, 아버지의 뜻을 이 땅에 세우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없다. 이렇게 예수님 공생활의 시작을 알리는 오늘 복음이 사순시기의 테두리 안에서는 수난과 죽음의 전주곡이 되고 마는 것이다.◆[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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