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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수 수난,그 여정의 인물들1(파울 베르너 셸레)
작성자김현정 쪽지 캡슐 작성일2004-03-15 조회수1,231 추천수5 반대(0) 신고

  사랑의 여인, 베다니아의 마리아-파울베르너 셸레

 

예수 수난을 보도하고 있는 마르코 복음은 처음부터 무대가 급격히 바뀌어 금방금방 서로 다른 상황들을 만나게 된다. 예수를 죽일 궁리를 하고 있는대사제와 율법 학자들과 예수를 팔아 넘기려는 유다 이스가리옷이 등장한다.

 

 이러한 숨가뿐 두장면 사이에 한 폭의 수채화처럼 평화로운 이야기가 소개된다. 그 순간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근처 베다니아에서 제자와 함께 식사를 하시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에 뜻밖에도 한 여인이 나타나 예수께 미우 특별한 사랑을 표현한다.

 

 우리는 예수의 십비 한 가운데로, 동시에 우리 삶의 핵심으로 이끌려 간다. 그리고 예수 수난의 길을 예시하고 동행했던 한 여인을 만나게 된다. 예수도 그 여인을, 세상 그 어디에나 복음이 선포되는 곳마다 그녀가 한 일을 기억하게 될 것이라고 높이 평가한다.    

 

향유를 바르는 마리아의 이야기를 복음사가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마르코 14, 3-9)

 

이여자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어떤가?

우리 역시 분개한 몇몇 사람들이 말한 내용에 어느 정도 찬성하는 입장이 아닌가?

사실 그렇게 값지고 귀한 향유를 쏟아 붓듯이 사용하는 것은 낭비가 아닌가?

그렇게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자선 행위를 해야하는 과월절 주간에, 일반 노동자의 일 년 수입이 훨씬 넘는 큰 돈인 ’삼백 데나리온’을 한 순간에 쏟았다.

우리 역시 여인의 행동에 분개하여 낭비임을 지적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그런 아우성과 비판하는 이의 제기를 우리를 위하여 서도 경계 해야한다. 우리는 예수께서 하신 방식대로 사람들을 도와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복음사가의 말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 우선 생각해야 할 점은 예수 시대 사람들이 사용했던 두가지 개념, 즉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때 사용되었던 두 개념의 의미를 파악하는 일이다. 오늘 날에는 ’자선’과 ’사랑의 실천’이 같은 뜻으로 사용되었지만 당시에는 달랐다.

 

’자선’은 첫째, 기부금을 내는 것이고, 둘째, 살아 있는 사람에게만 한정되며, 셋째, 특히 가난한 사람에게 베푸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랑의 실천’은 이러한 한계를 넘어섰다. ’사랑의 실천’은 물질적인 선물을  포함한 인격적인 투신을 요구하며, 사회적인 약자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이에게 베풀어진다. 즉 가난한 사람과 부자, 병자와 건강한 사람, 살아 있는 이와 죽은 이에게도 베풀어진다. 즉 가난한 사람과 부자, 병자와 건강한 사람, 살아 있는 이와 죽은 이에게도 베풀어진다.

 

 예수는 여인에 대해서 분명히 말씀하신다.

 

’이 여자는 나에게 갸륵한 일을 했다.’(마르코 14,6)

 

즉 ’사랑의 실천’을 했다는 말이다. 이러한 실천은 예수님 말씀대로 최후의 심판을 가름하는 중요한 척도이다. 도움을 필요한 자에게만 자선을 베풀것이 아니라 주님께도 행한 거이기 때문이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마태 25,40)

 

 사랑의 실천에거 관건이 되는 것은 바로 생명과 죽음이기 때문에 베다니아 여인의 행동을 좀더 숙고할 필요가 있다.

 

먼저 이여인의 행동에 분개하는 비판자들의 태도를 주목하자. 비판자들은 여인이 쓸데없이 낭비하고 있다는 구체적인 증거로 향유의 값을 얘기한다.

’이것을 팔면 삼백 데나리온도 더 받을 것이고,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을 터인데.’(마르코 14,5)

이 말은 즉시 배고픈 군중앞에서 한 필립보의 변명을 상기 시킨다.

’이사람들에게 빵을 조금씩 먹이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를 사온다 해도 모자라겠습니다.’

(요한 6,7)

 

그는 불가능한 현실을 이야기 하면서 가정법을 사용한다.  그러면서 그는 아무거도 행하지 않는다. 한 아이가 보리빵 다섯개와 작은 물고기 두마리를 가져왔을 때에야 비로소 군중은 배부르게 먹었다. 각자가 가진 것을 내어 놓을 때 모든 이가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여자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한것이다.’라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신다.(마르코 14,8)

 

 가난한 사람들을 구실 삼아 자기 주장을 편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 중의 가장 가난한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 곤경을 외면하기까지 한다.

 

’머리 둘 곳 조차없이’(마태 8,20) 가난한 사람의 아들은 세상을 위해 이제 마지막으로 자신의 생명을 바치려고 한다.

 

 제자들과 달리 베다니아 여인은 지금 예수께 무엇이 필요한 것이지 알아차린다. 비판자들이 논쟁하고 선동하는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인은 전적으로 헌신한다.

 

 소위 ’그 여인의 낭비’는 예수께서 인류를 위해 스스로 당신 몸을 바치시는 ’낭비’를 예고한다. 예수께서는 그 도움을 당연히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신다.

 

’이 여자는 내 장례를 위하여 미리 내 몸에 향유를 부은 것이니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한 것이다.’(마르코 14,8)

 

 향유를 바름의 의미는 사랑의 낭비이다. 즉 예수가 모든 이를 구원하기 위하여 과분하게 당신 자신을 바친 사랑의 낭비이다.

 

여인의 도유는, 성령으로 도유되신 분이라는 사실을 인간적인 방법으로 표현하고 있는 셈이다. 값진 나르드 향유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어느것과도 비할데 없는 값진 선물을 상징한다. 우리가 그 값진 선물로 무엇을 행할 수 있는가를 숙고한다면, 여기에서 사용된 ’낭비’라는 낱말의 또 다른 깊은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은 예수께서 우리에게 선사하신 선물이다. 베다니아의 여인이 예수의 영 안에서 행동한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하기를 원하신다.

 

 지난번 (대사제 가야파)에서 하루 동안 ’헤로데’가 예수님을 처형했다고 문맥이 흘러 가고 있었습니다. 한 자매님을 통해서 실수를 알아차리고, 다시 수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잠시나마 왜곡시키게 되었던 점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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