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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산책(사순3주간 화요일)
작성자박상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4-03-16 조회수1,500 추천수9 반대(0) 신고

◎ 2004년 3월 16일 (화) - 사순 제3주간 화요일

 

[오늘의 복음]  마태 18,21-35

<너희가 네 형제들을 서로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21) 그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와서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하고 묻자 22)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23) 하늘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왕이 자기 종들과 셈을 밝히려 하였다. 24) 셈을 시작하자 일만 달란트나 되는 돈을 빚진 사람이 왕 앞에 끌려왔다. 25) 그에게 빚을 갚을 길이 없었으므로 왕은 ‘네 몸과 네 처자와 너에게 있는 것을 다 팔아서 빚을 갚아라’하였다. 26) 이 말을 듣고 종이 엎드려 왕에게 절하며 ‘조금만 참아주십시오. 곧 다 갚아드리겠습니다’ 하고 애걸하였다. 27) 왕은 그를 가엾게 여겨 빚을 탕감해 주고 놓아 보냈다. 28) 그런데 그 종은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밖에 안 되는 빚을 진 동료를 만나자 달려들어 멱살을 잡으며 ‘내 빚을 갚아라’ 하고 호통을 쳤다. 29) 그 동료는 엎드려 ‘꼭 갚을 터이니 조금만 참아주게’ 하고 애원하였다. 30) 그러나 그는 들어주기는커녕 오히려 그 동료를 끌고 가서 빚진 돈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어두었다. 31) 다른 종들이 이 광경을 보고 매우 분개하여 왕에게 가서 이 일을 낱낱이 일러바쳤다. 32) 그러자 왕은 그 종을 불러들여 ‘이 몹쓸 종아, 네가 애걸하기에 나는 그 많은 빚을 탕감해 주지 않았느냐? 33) 그렇다면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할 것이 아니냐?’ 하며 34) 몹시 노하여 그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그를 형리에게 넘겼다. 35) 너희가 진심으로 형제들을 서로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실 것이다.”◆

 

[복음산책]  용서는 권리가 아니라 의무이다.

 

  마태오는 산상설교(5-7장), 파견설교(10장), 비유설교(13장)에 이어 공동체설교(18장)를 엮었다. 예수께서는 공동체설교를 통하여 제자들 간의 공동체는 물론이고 앞으로 세워질 교회공동체 안에 지켜져야 할 규범들을 제시하신다.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위대합니까?”(1절)라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엮어진 공동체규범에는 ‘어린이와 같이 되라,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라, 남을 죄짓게 하지 말라,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말라, 형제가 잘못하면 타일러주어라’는 등 온통 ‘서로간의 자비로운 사랑의 법칙’으로 가득 차 있다.

 

  오늘 복음은 용서에 관한 규범으로서 공동체설교의 마지막 가르침이다. 결론은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22절)는 것이다. 이 말씀을 7곱하기 70해서 490번 용서하라는 뜻으로 알아들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 규범의 진정한 의미는 ’용서의 무한정’이다. 예수께서는 ’무자비한 종의 비유’(23-34절)를 통하여 믿는 이들 사이에 ’무한정 용서의 규범’이 얼마나 합리적인가를 밝혀주신다. 비유를 살펴보자. 마태오 특유의 과장된 표현이기는 하지만 비유 속에 언급된 채무금액을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주인공 역을 맡은 종이 왕에게 빚진 금액은 일만 달란트였다.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은 1데나리온(마태 20,2)인데, 1달란트는 6,000데나리온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1달란트는 노동자 한 사람이 안식일만 빼고 20년을 꼬박 일해야 벌 수 있는 금액이다. 따라서 1만 달란트의 빚이란 어마어마한 액수의 돈이다. 왕은 종의 이 엄청난 빚을 탕감해 주었다. 반면 다른 종이 이 종에게 진 빚은 100 데나리온이었다. 이 금액도 적은 돈이 아니다. 그러나 왕이 탕감해준 1만 달란트(6천만 데나리온)에 비하면 조족지혈(鳥足之血)도 안 된다.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 1만 달란트를 탕감 받았으니 그 종이 다른 종의 100 데나리온을 탕감하는 일이 권리에 속하겠는가? 아니면 당연한 의무에 속하겠는가? 바로 여기에 오늘 비유의 합리성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탕감 받은 일과 탕감하는 일을 별개의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우리 이웃에 더러 그런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유에서 빚진 돈을 ’죄’로, 탕감을 ’용서’로 바꾸어 생각한다면 분위기는 달라진다. 용서함은 용서받기 위해 전제되어야 하는 행위이다. 그래서 우리가 진심으로 형제들을 서로 용서하지 않으면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도 비유 속에 등장하는 왕이 빚진 종에게 행한 것처럼 우리에게 하실 것’(35절)이므로 먼저 용서를 베풀라는 것이다. 따라서 용서받기 위해 용서해야 하는 것은 용서가 권리이기보다 용서받기 위한 조건, 또는 의무라는 점이 강조된다.

 

  용서가 의무라는 점은 베드로와 예수님의 대화에서도 알 수 있다. 베드로는 스스로 아주 마음이 넓은 사람인양 과시하면서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하고 묻는다. 베드로의 말속에는 이미 용서가 남에게 해 줄 수 있는 권리로 자리 잡고 있다. 예수님의 대답을 보자.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여라"는 예수님의 대답 속에는 용서의 무한정과 함께 용서가 해 줄 수 있는 권리가 아니라 ’해야만 하는 의무’라는 강력한 뜻이 내포되어 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용서가 의무로서, 잘못을 저지른 형제를 언제 어느 때나 그 잘못의 크고 작음을 막론하고 용서해야 한다는 결론이다. 이제 용서는 권리가 아니라 의무이다. 그러나 쉬운 일은 아니다. 우리들 일상체험은 무조건적이고 무한정의 용서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 때로는 거의 불가능함을 그대로 보여 준다. 용서를 권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용서를 놓고 가지각색의 태도를 취한다. 어떤 사람은 "자기 사전에 용서는 없다"고 말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이번에는 용서하지만 다음에는 국물도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 마태오는 다른 복음서에서 볼 수 없는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들어 무조건적인 용서의 합리성을 밝혀주고 있는 것이다. 용서는 적어도 용서받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조건이다.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용서는 결코 권리가 아니라 의무인 것이다.◆[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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