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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수 수난, 그 여정의 인물들1-(노르베르트 마기노트)
작성자김현정 쪽지 캡슐 작성일2004-03-19 조회수1,301 추천수7 반대(0) 신고

열두 제자의 하나,유다-노르베르트 마기노트

 

운명적인 만남이란 것이 있다. 우리 역시 주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특히 유다 이스가리옷이 예수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또 우리는 그에게서 무엇을 배울 수 있고 또 배워야만 하는가?

 

성서에서 다루는 것은 유다의 생애나 실제 사건의 역사적인 기록이 아니라 신학적인 의미이다. 때문에 유다의 말과 행동, 그의 최후에 관하여 부분적으로 서로 다르게 묘사한다. 바로 이런 배경을 놓고 우리는 유다에 관하여 묵상하고자 한다.

 

우리 묵상의 한가운데에는 예수님이 계신다. 보통 단번에, 결정적으로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에는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나름대로 그 사건에 역할을 담당한 수많은 사람들이 나타난다.

 

여기서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왜 우리는 하필이면 나자렛 예수의 수난을 취급하는가?

피와 눈물로 뒤범벅이 된 그 사건을? 이런 물음은 아마도 우리를 결코 침묵하게 하지 못하는 ’도대체 이분이 누구인데’(마태8,27)라는 질문의 답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분은 하느님이 원하는 바를 하셨고, 하는님의 나라를 선포하셨다. 그분의 관심사는 하느님과 인간뿐이었다.그분은 인간들이 하는님과 함께 살기를 원하셨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신뢰하며, 그 신뢰가 날로 깊어지기를 바라셨다.

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인격에 매혹되어 그분을 따랐다.

 

유다도 다른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자기 나름으로 예수를 생각하며 따랐다.

 

그는 또한 자신의 개인적 바람을 포기할 수 없었다. 유다는 스승이 말하는 왕국이 사람들이 짐작하는 지상낙원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랬기에 예수는 제자들의 육체적 건강이나 현세적 안녕을 돌보기 보다는 내적으로 상처 입고, 마비된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좌우하는 것이 무엇인지 체험해야만 했다.

그것은 바로 하는님의 부르심에 깨어 있는 것, 그래서 하느느님과 인간을 올곧게 사랑하면서 사는 것이다. 그는 이제 자신의 모든 것 이 목적에 맞춰 새롭게 방향을 설정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오늘날 철저하게 선동적인 방식으로,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다가오신다면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할까?

 

예수님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사랑뿐이었다. 그분에 의하면 인간은 사랑으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고, 하느님 앞에서 중요한 것은 진정한 사랑안에서 비롯되는 헌신이다.

계명과 율법은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계명과 율법은 삶에서 무엇이 중요하고, 자신의 삶과 이웃의 삶을 올곧게 하기 위하여 무엇을 행해야 할지를 보여주는 보조수단일 뿐이다.

 

’주님, 주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요한 6,68)

유다가 이 순간에 예수를 진심으로 받아들였을까?

 

우리는 이미 가지고 있는 관념을 바꾸는 것을 어려워한다. 기존 관념을 바꾸기 위해선 고통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유감스럽게도 진리의 대가, 결국에는 성숙한 삶의 대가에 드물지 않게 치르곤 한다.

 

사람들은 예고된 구원자를 갈망하면서 자연스럽게 나름대로 메시아 상을 만들었다.

 

우리는 제자들도 예수의 신원에 대해 논쟁을 하면서 갈등을 겪었을 것임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그분과 함께 계속 길을 걸어간다. 그러나 유다 이스가리옷은 그 길을 가지 않는다.

 

즉 유다는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온전히 깨닫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예수와 함께하면서도 메시아에 대한 자신으 선입관과 기대를 버리지 않는다. 그 때문에 그의 마음 깊은 곳에는 ’더이상 이렇게 행동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점점 자라게 된 것이다.

 

유다는 다른 사도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에 참석하면서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유다는 만찬 석상에 앉아 스승으로 부터 일치의 빵을 건네 받는다.

복음사가는 ’그때에 사탄이 그에게 들어갔다.’(요한13,27)라고 한다.

그리고 밖으로 나간다. 복음사가는 이 장면을 상징적 표현을 사용하여 ’때는 밤이었다.’(요한 13,30)라고 한다.

 

십자가에서 하는님을 이해하기는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당신 아버지께 마지막까지 성실하시다. 그분은 하느님의 손에 자신을 온전히 바치신다. ’그러나 제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루가 22,42)

 

유다는 이렇게 십자가의 고통을 준비하셨던 예수에게 그를 체포하기 위한 군인을 이끌고 온다. 유다는 예수를 얼싸안고 입을 맞춘다. 상상할 수 없는 행동이다. 존경과 친교, 하나 됨과 사랑의 표시가 그 반대의 의미로 악용된다. 이에 대해 예수께서는 ’벗이여, 어서 할 일이나 하시오.’(마태 26,50)라 응답하신다. 예수는 배반하는 유다를 벗이라 부르신다.

 

유다는 스승의 이런 태도에 압도되고 사로잡혔어야 했다. 사실 그는 끝까지 변치 않는 스승의 사랑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는 행동을 되돌리려 했으나 그의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그는 비참하게 죽고 그가 받은 은화 30냥으로 사람들은 땅을 사 그를 묻어 주었다.

 

유다는 자신의 미래를 전혀 바라보지 않았다.유다는, 용서하시고 생명으로 이끄시는 하느님께 희망을 두지 않았다.

 

하느님께서는 절망하여 자살한 유다의 삶으로 무엇을 하셨는가? 이에 대해 우리는 아는 것이 없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진실로 뉘우치고 하느님의 자비에 신뢰한다면 용서받지 못할 죄란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배반하는 그 순간에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벗’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명심해야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 죽음의 길을 오직 사랑으로 걸으면서 모든 이를 구원하신다. 때문에 그분을 통하여 우리는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

 

베드로도 예수님을 배반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의 눈 빛에 압도 당해 그의 죄를 뉘우칩니다. 한명은 인류의 영원한 구원사업으로, 또 다른 배반자는 절망의 종말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베드로는 하고 그가 안한 것은 무얼까요? 그것은 바로 회개입니다. 절실한 회개만이 주님의 뜻임을 다시 한번 고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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