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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수 수난, 그 여정의 인물들1(아베르트 슈스터)
작성자김현정 쪽지 캡슐 작성일2004-03-20 조회수1,176 추천수3 반대(0) 신고

충직한 여인, 막달라 마리아-알베르트 슈스터

 

예수 수난 길목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두 그룹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있다. 가야파,빌라도, 유다는 비극적 인물들로 예수에게 십자가를 지게한 첫번째 부류이고, 베다니아의 마리아와, 베드로, 막달라 마리아는 두번째 부류의 인물들로서, 십자가에 구원이 달려 있고, 우리는 예수의 죽음을 통하여 용서받고 생명을 얻게 된다고 일러준다.

 

막달라 마리아는 어떤 여인인가? 그녀는 주님의 고통의 길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가? 이에 대한 루가 복음서의 말씀을 읽어보자.

 

(루가 8,1-3)

 

실제로 당시에 여자들은 유다인 공동체 구성원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예수가 여자들을 제자단에 포함시켰다는 것은 이런 사회적 금기 사항을 부수는 일이었고 따라서 남자들로 구성된 제자들을 놀라게 하는 일이었다. 나아가 예수께서는 야곱의 우물가에서 유다인에게 홀대받던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나누시는 파격적인 일을 감행하기도 한다. 오래된 지병에서 치유된 여인들, 그리고 그 밖의 많은 여인들이 예수의 제자단에 속하게 된다.

막달라의 마리아에게 무성한 소문들이 있지만, 루가는 단지 예수께서 그녀에게서 일곱 마귀를 쫓아 내셨다고만 전할 뿐이다. 생각건대 중증의 정신병, 곧 정신 분열에서 치유된 것으로 보여진다.

 

마리아는 즉시 제자단에 속하게 되었고, 봉사의 인무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자신의 소유물을 팔아 예수와 제자들을 돌보았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기능, 곧 예수의 사명과 파견 때문에 예수 곁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예수를 끝까지 따랐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예수 수난의 여정에 나오는 몇몇 여인들을 골고타에서 일어난 예수 죽음의 직접적 증인들로 여긴다. 마르코는 이렇게 묘사한다.

 

(마르코 15,40-41)

 

베드로가 예수를 부인한 것도 그가 겁이 많고 비겁했기 때문이라기 보다 엄습하는 공포 때문이었다. 그러나 몇몇 여인들만이 이런 공포를 견디어 내고 멀찍이 떨어져서 예수를 따라간다. 그 여인들 중에서 막달라 마리아가 맨 앞에 서 있다.

 

그녀는 정신적 죽음을 겪으면서도 끝까지 십자가 곁을 떠나지 않았고 무덤에 묻히는 마지막 순간까지 예수의 곁에 머물렀다. 이 사실을 마르코는 이렇게 묘사한다.

 

(마르코 15,46-47)

 

예수의 시신은 무덤에 있었고, 그의 영혼은 아버지 손에 있었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창조설화에서 이런 구절을 읽을 수 있다.’하느님께서는 엿샛날까지 하시던 일을 다 마치시고, 이렛날에는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다.’(창세 2,2) 구원 역사의 중요한 분기점이 안식일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루가 23,55-56)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인격을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그녀는 사랑했기 때문에 예수가 누구신지 알았고, 스승의 비극적 종말에 크게 놀라지 않았다. 죽음을 넘어선 사랑은 마침내 스승의 무덤을 다시 찾게 한다. 그리고 천사를 만나게 된다. 이 사건에 대해 루가는 이렇게 보도한다.

 

(루가 24,1-11)

 

그녀들이 부활의 첫 증인이 되었다. 여인들은 부활 신앙을 가졌으며 그 면에는 제자들보다 훨씬 우월하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은 예수와 수난의 길을 함께 걸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어찌하여 살아계신 분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찾고 있느냐?’

당시의 여인들과 제자들에게 한 천사의 이 질문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유효하다. 마리아와 몇몇 여인들은 돌아가신 예수께 마지막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표시하기 위해 몰약과 향유를 발라드리려는 헛된 시도를 하였다.

우리는 막달라 여자 마리아 안에서 우리 자신을 본다.

첫영성체 때 찍은 빛 바랜 몇 장의 사진만 잠시 과거의 추억에 잠기게 하며 이미 잃어버린 어릴 적 신앙을 그리워할 뿐이다.

 

베드로와 예수를 가장 사랑했던 제자가 빈 무덤을 확인할 때 막달라 마리아는 다시 등장한다.

 

(요한20.11-17)

 

마리아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하소연하다. 이 모습은 오늘 날의 그리스도인을 대변한다. 즉 하는님이 계시지 않는 듯한 상황을 대변하는 것이다.

마리아가 등을 돌렸으나 막달라 마리아와 동산지기 사이에는 극복할 수 없는 낯설음이 가로놓여 있다. 즉 인간의 세계와 하느님의 세계 사이에는 두꺼운 벽이 놓여 있는 것이다.

부활 사건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요한은 몇 마디 말로써 이 만남의 극적인 정점을 표현한다. 예수는 하느님과 인간의 균열을 극복하는 분이다. 이런 극복은 예수께서 막달라 마리아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실현된다.

’마리아야!’ 여인은 자신의 이름을 그렇게 부르실수 있는 분이 오직 한 분밖에 없음을 알고 있었다.

 

우리는 그 다음에 취한 마리아의 태도, 즉 예수를 잡으려는 행동을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는 마뜩지 않게 여기신다.

’나를 붙잡지 말라.’ 건드리고 붙잡는 행동은 어떤 실재를 확인하기 위한 태도이다. 그러나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그런 식의 붙잡음을 허용하지 않으시고, 인간이 마음대로 당신을 다루는 태도를 물리치신다.

 

그런 다음 갈릴래아 여인들이 한 일은 예수의 부활 소식을 만방에 퍼뜨리는 일이었다.

여인들은 제자들과 함께 공동체를 형성하였고, 바오로가 갈라디아인들에게 쓴 서신처럼, 모든 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고, 남자와 여자가 아무런 차별 없이 하나가 된 공동체의 삶을 영위했다.(갈라디아서 3,28 참조)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공동체 안에서 여성의 지위는 크게 흔들렸다.

현세에도 교화 안에서의 여성의 직분에 대한 논쟁은 거부되며 주저 되어지고 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여성들의 기회는 오직 교회의 직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확신 한다.

 

’여사도’막달라 여인은 자기 스승께 성실했다. 인간관계는 성실에 근거한다. 서로 신뢰할 때만 진정한 대화가 가능하다. 윤리적 완전함은 무엇보다도 특히 자기 자신에게, 그가 추구하는 이상에 성실할 때 이루어진다. 그러나 자기 성실만을 강조 할때에는 사회적 혼란이 야기될 수 있다.

 

참된 성실의 근거는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의 성실함은 영원하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인간을 사랑하고 구원하는 데에 끝까지 성실하시다. 인간의 성실은 하느님을 반사한다. 예수의 인격 안에서 하느님의 성실과 인간의 성실이 동일시 되었다. 예수는 ’진실하시고 참되신 증인’(묵시 3,14)으로 불린다.

 

교회는 성실한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신앙인들은 영성체 전에 이렇게 기도한다. ’예수 그리스도여, 저희 죄를 헤아리지 마시고 교회의 믿음을 보시어...’ 막달라 마리아는 그 믿음을 우리에게 보여주었고 우리와 고통의 길을 함께한다. 그녀는 십자가의 길이 갈바리아에서 끝나지 않고 부활날의 빛에서 끝난다는 것을 우리에게 부단히 일깨워준다.

 

주님께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그분께서 저희를 사랑하는 이유가 직업, 성별, 외모,학벌,재력,교양등이 아니겠지요. 예수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바라볼때 우리는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 가는 것일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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