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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산책(사순 제4주일)
작성자박상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4-03-21 조회수1,272 추천수5 반대(0) 신고

◎ 2004년 3월 21일 (일) - 사순 제4주일 (다해)

 

[오늘의 복음]  루가 15,1-3.11-32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 왔다.>

 

  1)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들었다. 2) 이것을 본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저 사람은 죄인들을 환영하고 그들과 함께 음식까지 나누고 있구나!" 하며 못마땅해하였다. 3)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셨다. 11)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을 두었는데 12) 작은아들이 아버지에게 제 몫으로 돌아올 재산을 달라고 청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재산을 갈라 두 아들에게 나누어주었다. 13) 며칠 뒤에 작은아들은 자기 재산을 다 거두어 가지고 먼 고장으로 떠나갔다. 거기서 재산을 마구 뿌리며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14) 그러다가 돈이 떨어졌는데 마침 그 고장에 심한 흉년까지 들어서 그는 알거지가 되고 말았다. 15) 하는 수 없이 그는 그 고장에 사는 어떤 사람의 집에 가서 더부살이를 하게 되었는데 주인은 그를 농장으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16) 그는 하도 배가 고파서 돼지가 먹는 쥐엄나무 열매로라도 배를 채워보려고 했으나 그에게 먹을 것을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17)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아버지 집에는 양식이 많아서 그 많은 일꾼들이 먹고도 남는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게 되었구나! 18) 어서 아버지께 돌아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19) 이제 저는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자격이 없으니 저를 품꾼으로라도 써주십시오 하고 사정해 보리라.’ 20) 마침내 그는 거기를 떠나 자기 아버지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멀리서 본 아버지는 측은한 생각이 들어 달려가 아들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21) 그러자 아들은 ’아버지, 저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 저는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자격이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2) 그렇지만 아버지는 하인들을 불러 ’어서 제일 좋은 옷을 꺼내어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신을 신겨주어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내다 잡아라. 먹고 즐기자! 24) 죽었던 내 아들이 다시 살아왔다. 잃었던 아들을 다시 찾았다’ 하고 말했다. 그래서 성대한 잔치가 벌어졌다. 25) 밭에 나가 있던 큰아들이 돌아오다가 집 가까이에서 음악 소리와 춤추며 떠드는 소리를 듣고 26) 하인 하나를 불러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다. 27) 하인이 ’아우님이 돌아왔습니다. 그분이 무사히 돌아오셨다고 주인께서 살진 송아지를 잡게 하셨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8) 큰아들은 화가 나서 집에 들어가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서 달랬으나 29) 그는 아버지에게 ’아버지, 저는 이렇게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위해서 종이나 다름없이 일을 하며 아버지의 명령을 어긴 일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저에게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 주지 않으시더니 30) 창녀들한테 빠져서 아버지의 재산을 다 날려버린 동생이 돌아오니까 그 아이를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까지 잡아 주시다니요!’ 하고 투덜거렸다. 31) 이 말을 듣고 아버지는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모두 네 것이 아니냐? 32) 그런데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왔으니 잃었던 사람을 되찾은 셈이다. 그러니 이 기쁜 날을 어떻게 즐기지 않겠느냐?’ 하고 말하였다."◆

 

[복음산책]  "래따레" - 즐거워하라, 새로운 예루살렘아!

 

  육신의 재계로 시작된 은총과 회개의 사순시기가 이제 그 반을 넘었다. 시작이 반이라면, 반을 넘어섰으니 이제 거의 마지막에 다다른 셈이다. 그래서 교회는 전통적으로 오늘 사순 제4주일을 ’래따레’(laetare; 즐거워하라) 주일이라 부르며, 가능하다면 사제는 장밋빛 제의를 입고 미사를 드린다. 즐거워해야 할 주체는 바로 예루살렘이다.(이사 66,10) 그러나 이 예루살렘은 예전의 시온(Zion: 예루살렘에 있는 언덕 이름, 예루살렘을 달리 일컫는 말로서 상징적으로는 이스라엘 전체를 의미함)이 아니다. 이 예루살렘은 메시아의 고난과 죽음에 의해 탄생될 새로운 시온이며, 새로운 시온이 즐거워해야 할 이유가 바로 제3이사야(56-66장)의 주제인 것이다. 그래서 래따레 주일은 극기와 보속(기도, 단식, 선행)으로 지내온 사순시기의 반환점에서 자칫 지쳐버릴지도 모르는 우리의 영혼과 육신을 메시아의 부활로 선사될 새 즐거움으로 재충전시키는 전례주기 흐름상의 큰 의미를 가진다.

 

  오늘 봉독되는 복음은 세 편의 비유가 실려있는 루가복음 15장의 세 번째 비유말씀이다. 세 편의 비유는 ’잃었던 양의 비유’, ’잃었던 은전의 비유’, 그리고 ’잃었던 아들의 비유’이다. 잃었던 양의 비유는 마태오복음(18,12-14)에도 있으나 나머지 두 비유는 루가복음 고유의 특수사료에 속한다. 예수께서 세 편의 비유를 연이어 들을 들려주신 이유는 15장의 도입부분에 밝혀져 있듯이, 세리와 죄인들이 모두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들었고, 이것을 본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환영하고 그들과 함께 음식까지 나누고 있구나!" 하며 못마땅해하였기 때문이다.(1-2절) 세 편의 비유는 모두 잃었던 양, 은전, 아들을 다시 찾은 목자, 여인, 아버지의 기쁨으로 종결된다. 이는 곧 세리와 죄인들을 멀리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과는 대조적으로 이들을 받아들이고 환영하며 잃은 것을 끝까지 찾아 나서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 그리고 다시 찾으신 후 기뻐하시는 그분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라 하겠다.

 

  오늘 복음에는 ’잃었던 아들을 되찾고 기뻐하는 아버지 비유’가 선포된다. 이는 루가 고유의 사료이면서도 너무나 잘 알려진 비유로서 때로는 ’탕자의 비유’로, 때로는 ’자비로우신 아버지의 비유’로 소개되기도 한다. 당시 죄인이라는 굴레를 뒤집어쓰고 살아야 했던 세리와 죄인들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끊임없이 예수께 모여든다.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그들을 예수께서는 환영하여 맞아들이고 기꺼이 말씀의 식탁에 앉혀 말씀의 음식을 나누어주시는 것이다. 이는 예수께서 자주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함께 식사하는 것을 비난하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에 대한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해명이다.

 

  탕자와 그에 대한 자비로우신 아버지의 비유는 세부묘사가 매우 생생하여 당시의 관습과 법적인 절차를 반영하고 있으며, 동시에 충격과 감동의 영적인 차원에로 청자(聽者)들을 초대한다. 비유는 크게 작은아들의 타락, 아버지와 탕자의 관계회복의 두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가운데 탕자의 처절한 깨달음이, 그 마지막에 회복의 불가능을 시사하는 큰아들의 정의(正義)가 각각 그 고유의 역할을 행사하고 있다. ① 타락의 단계: 타락의 과정은 작은아들의 자기고집과 이기심으로 말미암아 아버지로부터의 분리와 이탈에서 시작된다. 아버지로부터의 이탈은 방종(放縱)을 초래하고, 방종은 곧바로 육신의 욕심, 즉 방탕(放蕩)과 정욕(情慾)으로 치닫게 되고, 그 결과는 비천함과 굶주림이다. 이는 곧 영적인 빈곤으로 표현된다.(11b-17절) ② 깨달음의 단계: 영적인 빈곤을 깨닫게 되면 이제 회복과 복귀의 과정이 이루어진다. 회복과 복귀의 과정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결심과 회개이다. 진정한 결심과 회개는 때때로 인간성 자체를 포기하는 처절한 자각에 그 뿌리를 둔다.(18-19절) ③ 복귀와 화해의 단계: 이제 복귀가 진행된다. 진정한 복귀는 육(肉)과 영(靈)의 차원에서의 변화를 의미하며, 이 변화는 처음부터 이탈된 장본인(아버지)에 의한 수용을 필요로 한다. 수용은 변화를 전제로 하여 화해와 화목을 조장하지만, 비유에서는 아버지가 보여준 인내의 기다림과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인 용서가 인상적이다.(20-24절) ④ 제3자의 입장: 이제 큰아들의 입장이 표명된다. 큰아들이 전체 사건과 아무런 관계없는 제3자는 아니지만, 타락과 회복의 과정에서 용서의 불가능함을 시사하는 정의(正義)를 대변한다.(25-32절)

 

  루가복음은 죄인에 대한 하느님의 마지막 대답이 정의이기보다는 자비임을 강조한다. 즉, 심판이기보다는 용서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죄인에 비유된 탕자가 아버지의 용서를 회개함으로써 벌어들인 것은 아니다. 용서는 아버지에 의해 무조건적으로 베풀어진다. 오늘 비유에서 보듯이 탕자인 작은아들(죄인)과 묵묵히 자기 본분을 다한 큰아들(의인)이 대조를 이루고 그 사이에 아버지가 서 있다. 아버지의 태도는 두 가지로 드러난다. 작은아들에게는 용서와 기쁨의 태도를 큰아들에게는 설득과 달램의 태도를 보인다. 큰아들이 작은아들의 잘못을 응징하려는 태도는 정의(正意)를 대변하는 것이며, 흔히 제3자인 우리들의 입장도 이와 같을 수 있다. 무릇 죄인이 우리도 다른 사람의 잘못은 응징하려든다는 말이다. 불의가 정의를 이길 수는 없다. 그러나 작은아들이 자기의 잘못을 깊이 뉘우치고 있다(21절)는 점이 변수(變數)이다. 사실 이 변수에 관계없이 용서가 베풀어지는 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의 속성인 것이다. 아버지의 기쁨은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왔다"(32절)는 데 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 난 생명에 대한 기쁨은 그 어떤 것도 불사(不辭)하는 하느님의 진정한 마음인 것이다. 혹자는 순리적인 인과응보도 정당한 심판도 정의도 불사하는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탓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스스로 탕자의 입장이라면 그저 감사할 따름일 것이다. 그런데 감사할 줄 아는 탕자 또한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처절한 자기 깨달음의 시간을 가졌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오늘 래따레 주일의 의미는 말씀의 전례식탁에 차려진 모든 독서의 말씀을 두루 꿰뚫고 있다.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40년간의 광야생활을 마치고 드디어 약속의 땅 가나안에 이르러 첫 과월절을 지내고 그곳의 소출로 양식을 삼게된다.(제1독서) 사도 바울로는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이 하느님과 화해를 이루고 ’새사람’으로 탄생하였음을 본다. 그러나 이 화해는 전적으로 죄 없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느님 편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선포된다.(제2독서) 이는 오늘 복음이 보여 주듯이 탕자에 대한 아버지의 용서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느님과의 화해로 승화(昇華)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새사람’이 된 신약의 백성은 탕자로서의 묶은 삶을 버리고 화해의 새 삶을 살아야하는 의무를 가진다. ’새사람’은 곧 그리스도를 보고 화해를 베풀어주신 하느님께 새 삶으로 보답하는 사람인 것이다.◆[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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