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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수 수난, 그 여정의 인물들2(오토 하인리히 제메트)
작성자김현정 쪽지 캡슐 작성일2004-03-21 조회수1,228 추천수4 반대(0) 신고

대사관 관제의 여종-오토 하인리히 제메트

 

우리는 왜 그다지 중요한 인물도 아닌 대사제 관제의 여종에 대해 묵상하려 하는가? 그 첫번째 이유는 중요 인물들이 나름대로 그 역할을 수행했던 것처럼 어는 시대에나 사람들은 비슷한게 각각의 모습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 두번째 이유는 성서가 이 인물들을 아무 생각없이 무의미하게 소개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들을 결코 과소평가하거나 경시해서는 안된다.

 

세 번째 이유는 하느님 앞에서는 누구도 차별이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변두리 인물로 여길지 모르지만 하느님께서는 가치있는 인물로 생각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부정적인 측면에서도 그렇다. 아주 보잘것 없는 사람이 악의 우두머리가 되어 아름다운 세계의 질서를 혼란 시킬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느님 손에는 도구일 뿐이다. 비록 이해하기 힘든 대목이기는 하지만.

 

베드로를 궁지에 몰아넣었던 대사관제 여종에 대한 마르코 복음의 기록을 읽어 보자.

 

(마르 14,66-72)

-네 복음사가에는 모두 베드로의 세번씩이나 거듭된 부인이 있으나 여종의 이야기에는 몇 가지 차이가 있음을 지적한다.-

 

베드로는 예수께서 올리브산에 기도하러 가시기 바로 몇 시간 전, 베드로는 주님을 결코 버리지 않겠노라고 장담하였다. 그 말을 듣고 예수께서는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배반할 것이라고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주님을 모른다고는 하지 않겠습니다.(마르코 14,31)

 

그러나 이에 반하는 사건이 즉시 일어나고, 칼을 빼어 말코스의 귀를 자른 베드로도 다른 사도들과 함께 슬금슬금 도망친다.

 

그러나 마르코 복음사가에 의하면 베드로는

’멀찍이 떨어져서 예수를 뒤따라 대사제의 관저 안뜰까지 들어가서 경바원들 틈에 끼여 앉아 불을 쬐었다.’(마르코 14,54)

 

베드로는 예수가 누구인지도 모르며,왜 체포 되었는지, 또 왜 예수라는 작자 때문에 밤잠을 설쳐야 했는지 모르는 사람들 틈에 끼여 앉아 불을 쬐고 있었다.

그는 가슴을 졸이면 스승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주시하고 있었다. 바로 그런 상황에서 일이 터진 것이다. 대사제의 여종이 다가와 그에게 이렇게 물어본 것이다.

 

당신도 저 나자렛 사람 예수와 함께 다니던 사람이군요?(마르코 14,67)

 

여종의 말을 들은 베드로는 강력하게 부인하며 스그머니 자리를 피하고 그 것을 본 여종는 확신에 차 ’저자는 체포된 사람과 한패야. 저런 작자들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밤을 세워야 해!’ 그 여종이 이렇게 곁에 있는 사람에게 외치자 베드로는 다시 한번 부인했다.

 

그리고 닭이 두 번째 우는 소리를 듣고  베드로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기가 주님이시며 스승이신 예수를 배반하다니... 그는 슬피 울기 시작하였다(마르코 14,72참조)

 

어떻게 여종은 베드로가 예수의 추종자인 줄 알았을까? 그도 제자단을 본 적이 있을까? 아니면 베드로가 불을 쬐는 동안 수상한 일을 했을까?

 

권력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과 교제하면서 다양한 체험을 한 때문인지 종종 놀라운 직감력으로 사람을 알아본다.

 

그에게 나자렛 예수의 패거리를 체포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자기 주인에게 충성을 보이고 동시에 인정을 받을 수 있는 호기였다.

이런 자들은 또 한 상황이 바뀌면 주저없이 태도를 바꾸는 기회주의자들이기도 하다.

 

한사람이 궁지에 빠지면 너도 나도  그 사람을 짓밟아 버리려고 달려든다. 그런 일을 당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때문에 베드로는 빨리 그 자리를 떠나야 했다. 그곳에는 잘나 체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 속에는 공동으로 자행하는 악이 깃들여 있다.

 

지상의 많은 권력자들은  바로 여종같은 사람을 크게 환영하며 교묘히 이용할 수 있었다.

그렇게 길러진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억압하고 그 영역을 끊임없이 확장시킨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여종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 여종처럼 예수의 수난의 길목에 서 있고 아주 다양한 방법으로 수난의 길을 걸으시는 예수를 만나기 때문이다.

 

한가지 더 생각해 보자.

 

우리도 베드로처럼 불안해서, 려워서 또는 안락함을 추구하느라고 주님을 배반했던 적은 없는가? 그 누구 앞에서 하든 그 배반은 여종앞에서 하는 배반과 같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 여종의 이름은 발릴라(Ballila)였다. 주변 인물, 대사제의 여종은 엑스트라 역할만을 담당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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