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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수 수난, 그 여정의 인물들2(노르베르트 마기노트)
작성자김현정 쪽지 캡슐 작성일2004-03-25 조회수1,049 추천수5 반대(0) 신고

바라빠-노르베르트 마기노트

 

바라빠와 예수의 만남은 숙명적이었으며 예수 수난의 중심에 등장하다. 이에 대해 복음사가들은 이렇게 보도한다.

 

(마태오 27,15-26; 마르코 15,6-15; 루가 23,17-25; 요한 18,39-40;19,4-16a)

 

빌라도는 오히려 원로들이 예수에게 씌우는 죄목에는 다른 동기가 숨어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자신은 그 동기에 좌우되어 행동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백성은 빌라도의 계획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빌라도는 상황을 잘못 판단했고, 그 때문에 예수를 석방하려는 계획을 너무 서툴게 세운거 같다. 빌라도가 파스카 축일을 맞아 백성의 요구대로 죄수 하나를 놓아주는 관례를 예수에게 적용하려 했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그는 아무 죄도 없어 보이는 나자렛 예수가 아니라 바라빠를 석방하게 된다.

 

바라빠는 누구인가?

이름의 뜻은 "아버지의 아들(Bar-abbas)"이다. 동시에 바라빠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중요한 가족 상황을 묻게 된다. 자녀가 부모의 따뜻한 사랑과 돌봄을 받고 성장했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따라 그 차이는 엄청나다. 인간의 비극은 사실상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데서 부터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 보자.

 

그의 부모는 서로의 성향과 성격이 다름에서 비롯되는 피할 수 없는 긴장에도 불구하고 서로 사랑과 기쁨으로, 항상 새롭게 서로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함께 살았을까, 아니면 끊임없는 부부싸움과 논쟁으로 일관했을까?

그는 가정에서 하느님.세계.인간에 관해 배웠을까?

상대방에 대해 이해하는 방향에서 말했을까, 아님 질투나 시기 혹은 악의에 찬 말을 했을까?

가정과 그 주위 환경은 성장하는 바라빠에게 어떤 정치적 신념을 심어주었을까?

부모와 가족, 그 주변 사람들은 바라빠와 문제를 함께 해결하려고 노력하였을까, 아니면 혼자서 해결 해야만 했을까?

그는 자신을 신뢰했을까, 아니면 열등의식에 사로잡혀 있었을까?

 

 

우리는 복음을 통하여 바라빠가 반란을 일으키다가 사람을 죽이고 체포되어 감옥에 갇혀 있는 폭도라는 것을 안다.

당시에는 그런 테러리스트들을 열혈당원, 곧 옷 속에 단검을 품고 다니며 살인까지도 서슴지 않는 열성주의자라고 일컸는다. 그들의 목적은 로마인들의 압제에서 백성을 구하는 것이다.

 

바라빠의 살인은 오늘날 우리가 보고 듣는 살인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심판하는 재판관으로 자처하고 유괴와 폭탄세례와 살인을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하는 사람들, 그들의 그런 행동으로 과연 세상이 좀더 나은 세상으로 변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그런 이상주의자들을 보며 어이없어한다. 그러나 더더욱 놀라운 것은 당시에도 그렇게 잘못된 길을 걸어가는 사람을 "영웅"으로 간주했고 오늘날도 그렇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바라빠를 놓아주시오."하고 소리치며, 그를 자기 사람이라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나자렛 예수는 과연 누구인가? 그분 역시 결코 온화하고 조용히 인내하기만 하는 겁쟁이가 아니다. 그 분은 독선과 자기 만족만을 찾는 사람들과 하느님의 영광보다는 돈을 더 생각하는 사람들을 향해 분노했다. 그러나 그분은 인간 마음의 혁명을 부르짖었다.

 

 

사람을 신분상승과 돈벌이를 위해 이용하고, 자신의 경력을 위한 카드로 사용하는 재판관과 극도로 흥분한 폭도들 앞에서 예수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었는가?

이런 장면은 흥분한 군중이 한 사람의 선동으로 이리저리 몰려 다니며 특정인의 죽음을 요구하면서 그의 허수아비를 불에 태우는 텔레비젼 뉴스를 연상시킨다.

 

모든 사람이 자기 자신을 척도로 삼았다면 인류의 역사는 어떻게 되었겠는가?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마태오 5,21이하)

마음먹은 것이 행동으로 나타나는 법이다.

 

돛단배가 자유롭게 항해하도록 하겠다고 돛을 잘라버린다면 그 배는 어떻게 되겠는가? 그것은 마치 의미있게 살겠다고 사회의 구조악에 반대하는 사람을 죽여버리는 것과 같다.

 

계속 질문해 보자.

 

그 중에는 예수의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치유를 받은 사람들과 도움을 받은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정말 예수가 죽기를 원했을까? 아니면 그들의 올바른 목소리는 군중의 흥분된 목소리에 감추어져 버렸을까? 그 들은 유다처럼 후회했을까?

우리는 아무 죄도 없이 채찍질 당하고 십자가에 죽어야 했던 예수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가?

다른 사람과 반대하는 좋지 않은 생각과 나쁜 관념을 실제로 포기하는가?

우리는 일상적인  견해와 주입 교육에서 탈피하여 우리의 독자성을 유지할 수 있는가?

혹시"...그렇지 않으면 총독님은 카이사르의 충신이 아닙니다."(요한 19,12)라는 말을 뿌리칠 용기가 없는 것은 아닌가?

그런 다수의 목소리 안에서 명확한 이성의 소리를 듣는가, 아니면 다수의 의견을 아무런 생각 없이 받아들이며 살아가는가?

 

바라빠는 결국 무죄한 예수의 죽음을 통하여 자유롭게 되었다. 그는 예수의 덕을 입은 자이다. 석방한 바라빠가 어떻게 되었는지 우리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앞에는 빌라도가 일전에 주목하던 한분이 서 계신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주님,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다시 오실 주님께 이렇게 기도하자.

 

주님, 우리가 참된 인간의 길을 걷도록 하시고, 당신의 모습을 닮은 자가 되도록 도와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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