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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산책(사순4주간 금요일)
작성자박상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4-03-26 조회수1,331 추천수9 반대(0) 신고

◎ 2004년 3월 26일 (금) - 사순 제4주간 금요일

 

[오늘의 복음]   요한 7,1-2.10.25-30

<그들은 예수를 잡고 싶었으나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

 

  1) 그 뒤에 예수께서는 유다인들이 자기를 죽이려고 했으므로 유다 지방으로는 다니고 싶지 않아서 갈릴래아 지방을 찾아다니셨다. 2) 그런데 유다인들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워지자 10) 형제들이 명절을 지내러 올라가고 난 뒤에 예수께서도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올라가셨다. 25) 한편 예루살렘 사람들 중에서 더러는 "유다인들이 죽이려고 찾는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 아닌가? 26) 저렇게 대중 앞에서 거침없이 말하고 있는데도 말 한마디 못하는 것을 보면 혹시 우리 지도자들이 그를 정말 그리스도로 아는 것이 아닐까? 27) 그러나 그리스도가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무도 모를 터인데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다 알고 있지 않은가?" 하고 말하였다. 28) 그 때 예수께서는 성전에서 가르치시면서 큰소리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나를 알고 있으며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내 마음대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정녕 따로 계신다. 너희는 그분을 모르지만 29) 나는 알고 있다. 나는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은 나를 보내셨다." 30) 그러자 그들은 예수를 잡고 싶었으나 그에게 손을 대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예수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던 것이다.◆

 

[복음산책]  지혜서 저자의 예언

 

  비교적 많은 분량의 가르침과 사건들을 담고 있는 마태오와 루가복음을 포함한 공관복음이 서술 구조상 예수님의 전체 공생활 기간을 약 1년 조금 넘게 설정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아울러 공관복음은 예수님의 활동시기와 활동무대를 예수님의 유년시절(베들레헴, 나자렛, 예루살렘) -> 예수의 세례(요르단강) - 갈릴래아 활동기(갈릴래아, 시로페니키아, 골란, 데카폴리스 지방) -> 예루살렘 상경기(데카폴리스, 베레아 지방, 사마리아 접경지역) -> 예루살렘 활동기(유다지방, 예루살렘)의 순서로 다루고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예수님의 수난 직전의 마지막 가르침과 죽음과 부활사건(13-21장)을 제외한 비교적 적은 분량을 통해서 예수님의 순수 공생활 기간을 꼬박 3년으로 나누어 보도하고 있는 점은 요한복음만이 가지는 특징이다. 그러다 보니 예수님의 활동무대가 예루살렘(유다지방)에서 갈릴래아로,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자주 바뀌는 것도 요한복음의 특징이다. 그 사이에 사마리아 지방도 끼어있다. 요한복음만의 이러한 특징들은 복음서 전체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늘 주의를 요하는 부분이다.

 

  오늘 복음은 유다인의 3대 명절 중의 하나인 초막절을 맞아 상경하신(10절) 예수께서 초막절 기간(7일) 중에 성전에서 가르치신 내용을 전해 주고 있다. 편의상 초막절을 앞두고 아직 갈릴래아 지방에서 있었던 예수와 형제들간의 대화부분(7,3-9)을 삭제한 채로 오늘 복음은 구성되었다. 우리가 당일 복음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항상 전후 문맥을 살펴보아야 하는데, 오늘 복음은 앞서간 6장의 내용보다는 5장과의 직접적인 연결을 요구한다. 6장은 갈릴래아 호수 근처에서 있었던 빵의 기적과 물위를 걸으신 기적과 생명의 빵에 대한 가르침을 전해주고 있기 때문이며, 차라리 5장의 내용이 오순절 기간 중에 예수님의 예루살렘 활동을 전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6장의 내용은 단독으로도 중요하지만, 복음서 전체를 꿰뚫고 있는 생명의 빵으로서의 예수 정체성을 계시하는 가르침으로 평가된다.

 

  따라서 오순절 기간 중에 예루살렘에서 행하신 가르침과 오늘 초막절 기간 중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행하시는 가르침을 연결하여 오늘 복음을 살펴야 한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아들임을 주장하였고, 존재의 본성상 하느님과 같은 하느님임을 주장하였다. 예수님은 자신의 이러한 주장이 진실한 진술임을 증명하기 위하여 증인 셋을 내세웠다. 그것은 세례자 요한과 하느님 아버지와 성경말씀이었다.(5,31-47) 그러나 세례자 요한도, 하느님 아버지도, (구약)성경도 유다인들의 예수에 대한 이해를 돕지 못했다. 어느 것도 예수의 ’범법적 행위와 신성모독적 발언’에 대한 증오감을 누그러뜨릴 수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예수를 제거해 버리려는 음모를 꾸민다. 이 점에 있어서는 오늘 미사전례의 제1독서(지혜서 2,1.12-22)를 조심스럽게 읽어볼 필요가 있다.

 

  올바른 지각이 없어, 악인들은 이렇게 뇌까린다. "의인은 우리를 방해하고 우리가 하는 일을 반대하며, 율법을 어긴다고 우리를 책망하고, 배운 대로 않는다고 나무라니 그를 함정에 빠뜨리자. 의인은 자기가 하느님을 안다고 큰소리치고, 주님의 아들로 자처한다.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든지 늘 우리를 책망하기만 하니, 그를 보기만 해도 마음의 짐이 되는구나. 아무튼 그의 생활은 다른 사람과는 다르고, 그가 가는 길은 엉뚱하기만 하다. 그의 눈에는 우리가 가짜로만 보인다. 그는 우리가 걷는 길이 더럽다고 멀찍이 피해 간다. 의인들의 최후가 행복스럽다고 큰소리치고, 하느님이 자기 아버지라고 자랑한다. 그가 한 말이 정말인지 두고 보자. 그의 인생의 말로가 어떻게 될 것인지 기다려 보자. 의인이 과연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하느님이 그를 도와서 원수의 손아귀에서 구해 주실 것이다. 그러니 그를 폭력과 고문으로 시험해 보자. 그러면 그의 온유한 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며, 인내력을 시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입만 열면, 주님이 자기를 도와주신다고 말해 왔으니, 그에게 아주 수치스러운 죽음을 한 번 안겨 보자." 악인들은 이렇게 뇌까리지만 그들의 생각은 그릇되었다. 그들의 악한 마음 때문에 눈이 먼 것이다. 그들은 하느님의 오묘한 뜻을 모르며, 거룩한 생활에 대한 보상을 바라지 않으며, 깨끗한 영혼이 받는 상급을 믿지 않는다.(지혜 2,1.12-22/ 제1독서)

 

  기원전 50년경에 희랍어로 집필되어 제2경전에 속하면서 ’솔로몬의 지혜’라는 명칭을 가진 지혜서의 핵심사상은 ’정의(正義)의 불멸’, 좀더 구체적으로는 ’의인은 죽지 않는다’는 말로 요약된다. 지혜서의 저자는 당시 희랍 정치문화의 중심지였던 알렉산드리아(이집트 북동 해안도시)에 살고 있던 유다인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저자는 당시 이방인의 도시인 알렉산드리아에 살면서 희랍문화에 영합되어 신앙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는 유다인들과 자신의 신앙을 고수함으로써 온갖 위협과 경멸과 박해를 받던 유다인들을 위해 이 글을 쓴 것이다. 여기서 후자의 유다인을 저자는 의인으로 고무(鼓舞)하는 바, 예수님이 지금 처해 있는 상황과 너무나 흡사하다. 그렇다고 저자가 지혜서의 집필과정에서 예수를 염두에 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예수께서 믿음과 신뢰로 인해 당하는 모든 이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받아들이신다. 모든 성서말씀의 주체이신 하느님 아버지께서 아들 예수를 세상에 보내셨고,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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