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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산책(사순제4주간 토요일)
작성자박상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4-03-27 조회수1,408 추천수11 반대(0) 신고

◎ 2004년 3월 27일 (토) - 사순 제4주간 토요일

 

[오늘의 복음]  요한 7,40-53

<그리스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있겠는가?>

 

  40)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 중에는 "저분은 분명히 그 예언자이시다." 41) 또는 "저분은 그리스도이시다" 하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있겠는가? 42) 성서에도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으로 다윗이 살던 동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리라고 하지 않았느냐?" 하고 말했다. 43) 이렇게 군중은 예수 때문에 서로 갈라졌다. 44) 몇 사람은 예수를 잡아가고 싶어하였지만 예수께 손을 대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45) 성전 경비병들이 그대로 돌아온 것을 보고 대사제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어찌하여 그를 잡아오지 않았느냐?" 하고 물었다. 46) 경비병들은 "저희는 이제까지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47) 이 말을 들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너희마저 속아넘어갔느냐? 48) 우리 지도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 중에 단 한 사람이라도 그를 믿는 사람을 보았느냐? 49) 도대체 율법도 모르는 이 따위 무리는 저주받을 족속이다" 하고 말하였다. 50) 그 자리에는 전에 예수를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끼여 있었는데 그는 51) "도대체 우리 율법에 먼저 그 사람의 말을 들어보거나 그가 한 일을 알아보지도 않고 죄인으로 단정하는 법이 어디 있소?" 하고 한마디하였다. 52) 그러자 그들은 "당신도 갈릴래아 사람이란 말이오? 성서를 샅샅이 뒤져보시오. 갈릴래아에서 예언자가 나온다는 말은 없소" 하고 핀잔을 주었다. 53) 그리고 나서 사람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

 

[복음산책]  믿음에 절대적인 장애물은 고정관념이다.

 

  예수께서 사람들의 믿음을 얻는 데 가장 큰 장애물은 그들의 고정관념이었다. 고정관념은 사건의 진위(眞僞)나 정황(情況)을 떠나 판에 박힌 생각이다. 생각이 바뀌지 않는 한 태도의 변화를 기대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대부분의 유다인들은 예수가 갈릴래아 태생인 줄 알고 있었다. 예수님은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에서 30년간의 성장시절을 보내긴 했지만, 사실은 베들레헴 태생이 아닌가?(마태 2,1; 루가 2,4) 지금의 우리들은 예수님에 대한 유년시절을 포함한 전반적인 기록인 신약성서를 앞에 두고 있기에 예수에 대한 믿음을 가지기가 당시의 사람들보다는 훨씬 쉽다. 예수님의 출생과 유년시절에 관한 기록들은 빨라도 기원후 80~90년경에 집필되었기 때문이다. 대사제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구약성서가 제공하는 자료를 바탕으로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메시아의 고향이 베들레헴이라는 것은 미가 5,1에 근거하며, 베들레헴이 다윗의 마을이라는 사실은 1사무 20,6에 근거한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자신이 베들레헴 태생이라는 사실을 말씀하신 적은 한번도 없다. 어제 복음을 보면 예수께서 큰소리로 "너희는 나를 알고 있으며,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요한 7,28)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자신이 베들레헴 태생이라는 것보다는 나자렛 출신이라는 사실을 더 강조하는 듯이 보인다. 어쨌든 유다 베들레헴 태생의 예수와 갈릴래아 나자렛 출신의 예수 사이의 밀접한 관련성을 아무도 알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아쉽다. 물론 이런 아쉬움이 예수님께는 어떤 문제도 되지 않는다. 예수께서는 애당초 출신이나 신분 따위엔 관심도 없으시다. 예수께 있어서 중요한 것은 태생이나 출신이 아니라 그분이 하시는 말씀과 행적에 대한 믿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예수께서 단순히 당신의 말씀과 행적을 믿으라는 것은 아니다. 예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이 곧 아버지의 일이기 때문에 믿으라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나중에 가서 "내가 아버지의 일을 하지 않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을 하고 있으니 나를 믿지 않더라도 내가 하는 일만은 믿어야 할 것이 아니냐? 그러면 너희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될 것이다"(10,37-38)라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께서 활동하고 계시다는 사실이 무조건 거부되지는 않았다. 그것은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성전 경비대들과 예수와 구면(舊面)인 니고데모를 통하여 드러난다. 예수를 잡아오라는 명(命)을 받은 경비대들이 "저희는 이제까지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습니다"(36절) 하고 저들을 보낸 지도자들에게 알렸다. 그러나 지도자들의 생각과 입장은 바뀔 줄을 모른다. 그들은 성서의 어느 곳에서도 갈릴래아에서 메시아가 나올 수 없다는 고정관념에 자신들을 더욱 세게 얽어맨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이 작정한 길을 갈 것이고, 예수님은 예수님대로 자신의 길을 가실 것이다.  

 

  기원전 609년경 유다에 출현한 예레미아 예언자도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함에 있어서 똑같은 어려움을 겪었고, 쓴맛을 보았다. 유다 백성들이 예레미아를 통한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대사제들과 다른 예언자들, 심지어는 자기 형제들로부터 박해를 받았다. 예언자 예레미아가 자신의 소명 시간들에 받았던 수많은 고통들이 이제 막 들이닥치는 예수님의 수난역사의 전주곡이었던가? 고통의 마지막에 이른 예레미아의 처절한 호소를 들어보자: "만군의 주님, 사람의 뱃속과 심장을 달아보시는 공정한 재판관이시여! 하느님께 호소합니다. 이 백성에게 원수를 갚아 주십시오. 그것을 이 눈으로 보아야겠습니다."(예레 11,20 / 제1독서) 그 후 20년이 지난 기원전 587년에 유다왕국은 실제로 망했다.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이와 같이 망하게 될 것이다.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곧 하느님을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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