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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산책(사순 제5주일)
작성자박상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4-03-28 조회수1,599 추천수10 반대(0) 신고

◎ 2004년 3월 28일 (일) - 사순 제5주일 (다해)

 

[오늘의 복음]  요한 8,1-11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

 

  1) 예수께서는 올리브산으로 가셨다. 2) 다음날 이른 아침에 예수께서 또다시 성전에 나타나셨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그들 앞에 앉아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3) 그때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간음하다 잡힌 여자 한 사람을 데리고 와서 앞에 내세우고 4) "선생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5) 우리의 모세법에는 이런 죄를 범한 여자는 돌로 쳐죽이라고 하였는데 선생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하고 물었다. 6) 그들은 예수께 올가미를 씌워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이런 말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바닥에 무엇인가 쓰고 계셨다. 7) 그들이 하도 대답을 재촉하므로 예수께서는 고개를 드시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 하시고 8) 다시 몸을 굽혀 계속해서 땅바닥에 무엇인가 쓰셨다. 9) 그들은 이 말씀을 듣자 나이 많은 사람부터 하나하나 가 버리고 마침내 예수 앞에는 그 한가운데 서 있던 여자만이 남아 있었다. 10) 예수께서 고개를 드시고 그 여자에게 "그들은 다 어디 있느냐? 너의 죄를 묻던 사람은 아무도 없느냐?" 하고 물으셨다. 11)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 그 여자가 이렇게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 어서 돌아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하고 말씀하셨다.◆

 

[복음산책]  두 갈래의 길 : 살리는 길과 죽이는 길

 

  요한복음 7-10장에는 애당초 계시된 두 갈래의 길이 뚜렷이 보인다. 하나는 하느님께서 계획하시고 예수께서 추진하시는 생명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의 적대자들이 꾸미고 있는 죽음의 길이다. 이 두 길은 예수와 그의 적대자들 사이에 벌어지는 격렬한 논쟁으로 서로 고조되어 가고 있다. 그래서 이 두 길은 나란히 펼쳐진 평행의 길이 아니라 서로 교차되는, 또 교차될 수밖에 없는 길로써 하나가 다른 하나에 의해 막다른 길이 되어야 하는 길이다. 생명의 길은 빛이요, 죽음의 길은 어둠이다. 그런데 생명의 길이 죽음의 길과의 교차점에서 제지당하고 거부당하고 있다. 어둠에 덮여있는 이 세상에 한 가닥의 빛이라도 더 주시려 바삐 움직이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사순 제5주일에 들려주는 복음말씀에 그대로 쓰며있다.

 

  초막절 축제를 지내러 예루살렘에 올라오신(7,10) 예수께서는 축제기간 7일 중에 반(半)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계셨으며(7,11), 나머지 반은 거의 매일 성전에서 가르치시는(7,14) 바쁜 일정을 보내신 것으로 추정된다.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는 군중을 가르치시는 중에 ’큰소리’(7,28)와 ’외침’(7,37)을 곁들이는 큰 열성을 보이셨다. 생명의 길을 위한 예수의 가르침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다행한 일은 죽음의 길에 합세했던 자들 중에 몇몇이 예수께 호감을 가지기 시작한 것이다. 예수를 잡으러 갔다가 오히려 그분의 가르침에 매료되어 빈손으로 돌아왔던 성전 경비병들(7,45-46)도 그렇고 니고데모(7,51)도 그렇다.

 

  명절의 마지막 날(7,37)을 올리브산에서 묵으신 예수께서 다음날 이른 아침에 또다시 성전에 나타나 가르치신 것(2절)으로 오늘 복음은 시작된다. 오늘 복음은 언제 들어도 아름다운 복음으로 ’간음(姦淫)한 여인에 대한 예수님의 놀라운 판결’에 관한 이야기이다. 성서학자들은 오늘 복음(8,1-11)을 놓고 서로 다른 의견을 보인다. 이 대목은 원래 요한복음의 수사본(手寫本)에 없던 대목이다. 따라서 오늘 복음은 구전(口傳)으로 전해오다가 빨라도 5세기경 그 내용의 중요성을 인정받아 지금의 위치에 삽입된 것이라는 주장이 압도적이다. 학자들은 오늘 복음을 앞·뒤의 문맥과 비교하여 볼 때 어느 쪽으로도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주장한다. 오히려 이것이 7-10장 전체에 고조되는 논쟁의 분위기를 깨뜨리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또 다른 이유로는 8장 12절부터의 말씀이 성전 입구 헌금궤가 있는 곳(8,20)에서 언급된 데 비하여 오늘 복음은 땅바닥이 있는 성전 마당에서 있었던 사건으로서 서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점을 든다. 어울리지 않는 이유야 어찌 되었든 필자가 보기엔 이 대목을 여기에 삽입한 이유를 찾는 것이 더 바람직한 일이라 생각한다.

 

  이 대목을 여기에 첨가한 의도는 앞에서 언급한 두 갈래 서로 다른 길에 있다. 즉, 사람을 살리는 길과 죽이는 길에 있다는 말이다. 간음(姦淫) 행위의 주인공인 여인이 현장에서 발각되었기 때문에 발뺌의 여지가 추호도 없다. 여인은 현장에서 체포되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넘겨진 셈이다. 간음한 행위 자체는 이미 율법에 따라 돌에 맞아 죽어야하는 범죄이다.(신명 22,22-24; 레위 20,10) 그러나 그들이 여인에 대한 판결을 유보한 채로 예수를 진퇴양난의 길에 빠뜨리려 한다. 예수께서 여인을 용서하면 율법을 어기게 되고, 여인을 단죄하면 자비와 사랑은 물거품이 될 것이다. 여기서 두 갈래의 길이 팽팽히 맞선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여인을 법대로 죽이려는 죽음의 길을, 예수께서는 법을 어겨서라도 여인을 살리는 생명의 길을 택하려 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놀라운 대답이 우리의 심금(心琴)을 울린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7절) 다른 필사본에는 그 동안 예수께서 땅바닥에 돌을 쥔 사람들의 죄목을 썼다고 한다. 나이가 많은 사람부터 그 자리를 떠나갔다. 예수께서 간음한 여인에게 ’죄 없다’고 하지 않으시고, ’죄를 묻지 않겠다’, ’다시는 죄짓지 말라’(11절)고 하신 말씀을 깊이 새겨야 한다. 그렇다. 죄가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스스로는 죄인이면서도 남의 잘못을 응징하려 한다면 죽음의 길을 걸으려는 바리사이와 다를 바 없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비록 죄인이지만 생명의 길을 걷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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