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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산책(사순5주간 목요일)
작성자박상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4-04-01 조회수1,415 추천수13 반대(0) 신고

◎ 2004년 4월 1일 (목) - 사순 제5주간 목요일

 

[오늘의 복음]  요한 8,51-59

<유다인들이 예수를 붙잡으려고 했으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손에서 벗어나 몸을 피하셨다.>

 

  51)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내 말을 잘 지키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52) 그러자 유다인들은 "이제 우리는 당신이 정녕 마귀 들린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소. 아브라함도 죽고 예언자들도 죽었는데 당신은 ’내 말을 잘 지키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 하니 53) 그래 당신이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더 훌륭하다는 말이오? 예언자들도 죽었는데 당신은 도대체 누구란 말이오?" 하고 대들었다. 54)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내가 나 자신을 높인다면 그 영광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나에게 영광을 주시는 분은 너희가 자기 하느님이라고 하는 나의 아버지이시다. 55)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하지만 나는 그분을 알고 있다. 내가 만일 그분을 모른다고 말한다면 나도 너희처럼 거짓말쟁이가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분을 알고 있으며 그분의 말씀을 지키고 있다. 56)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은 내 날을 보리라는 희망에 차 있었고 과연 그 날을 보고 기뻐하였다." 57) 유다인들은 이 말씀을 듣고 "당신이 아직 쉰 살도 못 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단 말이오?" 하고 따지고 들었다. 58) 예수께서는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 하고 대답하셨다. 59) 이 말씀을 듣고 그들은 돌을 집어 예수를 치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몸을 피하여 성전을 떠나가셨다.◆

 

[복음산책]  하느님의 존재 방식 : 순수현재

 

  오늘 복음은 그 동안 지속되어 온 예수님과 적대자들 사이에 벌어진 격렬한 논쟁(7-8장)의 마지막 부분이다. 초막절 축제를 맞아 예루살렘에 상경하신(7,10) 예수께서는 7일간의 축제기간 중간쯤 해서(7,14) 성전으로 올라가 가르치기 시작하셨고, 이 가르침은 바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8장 전체는 축제를 마감하는 제8일째 날에 거행된 ’등불을 끄는 예식’(사순 제5주간 다해 월요일 복음 참조)에서 있었던 긴 논쟁과 가르침을 담고 있다. 간음한 여인에 대한 예수님의 용서로 시작된 요한복음 8장의 가르침과 논쟁의 핵심은 ’나는 ~이다’(에고 에이미)라는 하느님 자기계시(출애 3,14)의 도식 안에서 선포되는 예수님의 신성(神性)이다.

 

  예수님의 신성(神性)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유다인들이 믿고 있는 하느님의 신성과 같은 것이며,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로서 가지는 신성이다. 따라서 예수 또한 아버지처럼 영원한 생명을 주고 싶은 사람에게 줄 수 있으며(51절), 아브라함이 태어나기도 전에 계셨던 분(58절)이시다. 이는 곧 예수께서도 영생(永生)을 주관하는 분이시며, 시간(時間)이 있기도 전에 존재해 온 분이심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께서 이 사실을 계시함에 있어서 "정말 잘 들어 두어라" 하고 말씀하시는 서두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200주년 신약성서에서는 이를 ’진실히 진실히 당신들에게 말합니다’ 라고 번역하였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내 말을 잘 지키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51절), 그리고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58절)는 구절에서와 같이 예수께서는 특별히 자기 자신을 계시하고자 하는 말씀에 이 서두를 붙임으로써 계시하시는 말씀의 내용을 한층 강조하고 계신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라는 서두말씀은 공관복음에서는 찾아 볼 수 없고, 유독 요한복음에서만 발견된다. 요한복음서 저자는 이 서두를 아주 즐겨 사용하는데, 그것도 무려 25번이나 사용하고 있다.(1,51; 3,3; 3,5; 3,11; 5,19; 5,24; 5,25; 6,26; 6,32; 6,47; 6,53; 8,34; 8,51; 8,58; 10,1; 10,7; 12,24; 13,16; 13,20; 13,21; 13,38; 14,12; 16,20; 16,23; 21,18) 공관복음에서 이와 견줄만한 어법(語法)은 두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예수께서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마태 5,22.28.32.34.38.44; 19,9), 그리고 "나는 분명히 말한다"(마태 17,20; 19,23.28; 21,21.31; 마르 12,43; 루가 21,3)라고 하신 서두말씀이다.

 

  예수께서 자신의 신성(神性)을 선포함에 있어서 하느님의 자기계시 방법인 ’에고 에이미’ 도식을 사용할 때는 하느님께서 본성상(本性上) 소유하시고 누리시는 모든 특성이 가감(加減) 없이 그대로 예수께도 적용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사람도 자기가 누구인지를 밝힐 때 ’나는 ~입니다’, ’나는 (누구, 무엇)입니다’ 라고 말한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인간이 진술하는 ’나는 (무엇)이다’라는 말은 사실상 ’나는 그(무엇)가 아니다’라는 말로 알아들어야 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어느 누구도 처음부터 ’그(무엇)’인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의 그 무엇은 모두가 다 세상에 태어난 다음, 후천적(後天的)으로 습득한 것, 또는 후천적으로 맺어지는 관계에 의한 것이며 그 관계는 살아가면서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영삼은 김현철의 아버지다"는 진술을 예로 들면, 김영삼은 원래부터 아버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가 아버지이기 위해서는 보어(補語)로 사용된 김현철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김영삼이 아버지일 수 있는 이유는 아들인 김현철과의 관계 속에서만 가능하다. 아들 김현철이 없이는 아버지 김영삼도 없는 것이다. 물론 그 전에 결혼한 남편으로서의 김영삼은 있다. ’나는 박상대 신부(神父)입니다’라는 진술을 예로 들어보자. 이 진술에서 ’박상대’는 별 의미 없는, 그렇게 불리는 글자나 이름에 불과하다. 나는 처음부터 신부가 아니었고 1988년 2월 6일 사제로 서품된 이후부터 신부이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신부일 수 있을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따라서 ’나는 신부입니다’라는 진술은 내가 애당초 아니었던 신부임을 지금 주장(主張)하는 것이며, 그래서 신부이며, 끝까지 신부로 있기를 원하는 의지(意志)를 표명하는 진술인 셈이다. 이는 곧 내가 신부인 근거와 이유가 내 안에 있지 않고 다른 곳에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애당초 신부는 물론 아무 것도 아닌 내가 현재 신부인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것은 적어도 예수님, 하느님, 신자(信者), 주교, 동료사제, 교회, 미사, 기도, 성사집행, 말씀선포, 봉사생활 등, 이들과의 관계 속에 있다. 결국 내가 이런 관계에서 비롯되는 일을 수행할 때 비로소 신부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은 관계 속에서만 실존(實存)한다. 관계 없이는 실존할 수 없으며, 관계없이 있는 존재(存在)는 아무 의미가 없다. 그래서 인간은 늘 자신의 실존적 관계에 충실하여야 하며, 그 관계를 잘 가꾸고 지켜야 한다. 그러나 하느님은 다르다. 하느님께서 ’나는 (무엇)이다’ 라고 말씀하실 때, 어떤 ’무엇’이 술어(述語)로서 주어(主語)인 하느님을 설명하거나 진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바로 그 ’무엇’ 자체라는 말이 된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사람인 내가 ’나는 (무엇)이다’ 라고 한다면, 나는 원래 그 ’무엇’ 자체가 아니기 때문에 ’무엇’이라는 술어(述語)는 주어(主語)인 나를 설명하거나 그 의미와 관계를 밝혀줄 뿐이다. 하느님은 그 어떠한 경우에도 보어(補語)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느님이신 예수께서 "나는 세상의 빛이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시면, 그분은 진실로 세상을 밝히는 빛이시며, 우리가 걸어갈 수 있는 길이시고, 진리요 생명 그 자체이시라는 말이 된다. 하느님만이 "나는 곧 나다"(출애 3,14; 요한 6,20)라는 분이시다. 하느님만이 ’그것일 수 있는’ 이유를 모두 자기 안에 소유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빛이시오, 말씀이오, 진리요, 생명 그 자체이시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은 그 말씀 안에 머무르는 것이며, 나아가 생명이신 예수님 안에 살게 된다. 그러므로 그 사람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살게 된다. 여기서 영원한 삶이란 지상에서 마냥 이어지는 ’지긋지긋할 수도 있는 그런 삶’이 아니라 죽은 후에 맞이하는 새로운 삶이다.(이 대목에서 1999년에 제작된 크리스 콜럼버스 감독, 로빈 윌리암스 주연의 영화 "바이센테니얼 맨"《Bicentennial Man》을 한 번 감상해 보시도록 추천하고 싶다.) 사실 영원한 생명의 삶이 지상과 연속된 삶이라면 오히려 불행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영생은 우리가 알 수 없는 전혀 다른 삶이 될 것이다. 유다인들의 눈에는 민족의 조상인 아브라함도 하느님의 예언자들도 다 죽은 것으로 보이지만, 그들은 하느님 곁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있다.(루가 16,19-31/ 부자와 라자로 비유; 마태 17,1-8/ 예수의 거룩한 변모 참조.) 이 생명을 그들에게 주신 분은 바로 하느님이신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보다 훨씬 전인, 천지창조 이전부터 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58절) 이러한 언명이 ’전(前) 실존적(實存的) 그리스도론’을 가능하게 한다. 아브라함은 태어났지만(기노마이, ginomai), 예수님은 처음부터 계시는 분이시다(에이나이, einai). 사실 시간(時間)이 하느님을 구속하거나 제한할 수 없다. 하느님께는 시간(時間)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있다면 하느님은 이를 초월하여 계신다. 하느님을 굳이 인간이 말하는 시간 영역, 즉 과거(過去), 현재(現在), 미래(未來)의 영역에로 끌어온다면, 하느님은 항상 현재에만 계신다. 시작이 없으시니 과거가 없고, 끝이 없으시니 미래가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느님은 현재, 그것도 순수현재(pura praesentia)에 존재하신다. 따라서 하느님은 늘 산 자의 하느님이시다.(로마 14,9) 이로써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자기계시는 절정에 이르렀다. 동시에 유다인들의 불신과 인내심도 그 한계에 달하여 손에 돌을 거머쥐었다.(59절) 그러나 아직은 때가 아니다.◆[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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