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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산책(주님 수난 성지주일)
작성자박상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4-04-04 조회수2,647 추천수13 반대(0) 신고

◎ 2004년 4월 4일 (일) - 주님 수난 성지주일 (다)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 기념식 복음]  루가 19,28-40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 받으소서!>

 

  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앞장서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길을 떠나셨다. 29) 올리브 산 중턱에 있는 벳파게와 베다니아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예수께서는 두 제자를 앞질러 보내시며 30) 이렇게 말씀하셨다. "맞은편 마을로 가라. 거기에 가보면 아무도 탄 적이 없는 어린 나귀 한 마리가 매여 있을 터이니 그 나귀를 풀어오너라. 31) 혹시 누가 왜 남의 나귀를 푸느냐고 묻거든 ’주께서 쓰시겠답니다’ 하고 대답하여라." 32) 그들이 가보니 과연 모든 것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였다. 33) 그래서 나귀를 풀었더니 나귀 주인이 나타나서 "아니, 왜 나귀를 풀어가오?" 하고 물었다. 34) "주께서 쓰시겠답니다" 그들은 이렇게 대답하고 35) 나귀를 끌고 와서 나귀에 자기들의 겉옷을 얹고 예수를 그 위에 모셨다. 36) 예수께서 앞으로 나아가시자 사람들이 겉옷을 벗어 길에 펴놓았다. 37) 예수께서 올리브 산 내리막길에 이르렀을 때 수많은 제자들은 자기들이 본 모든 기적에 대하여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소리 높여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38)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임금이여, 찬미 받으소서. 하늘에는 평화, 하느님께 영광!" 39) 그러자 군중 속에 끼여 있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선생님, 제자들이 저렇게 하는데 왜 꾸짖지 않으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40) 그러나 예수께서는 "잘 들어라. 그들이 입을 다물면 돌들이 소리지를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  루가 22,14-23,56

 

[복음산책]  성주간 : 예수의 마지막 일주일  

 

  교회는 오늘 주님수난성지주일을 시작으로 1년 전례력 가운데 가장 거룩한 한 주간인 성주간(聖週間)을 맞이한다. 성주간은 예수께서 비천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심을 시작으로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시는 월요일, 유다와 베드로의 배반을 예고하시는 화요일, 유다의 실제적인 배반과 최후의 만찬을 준비시켜 그 만찬에 임하시는 수요일, 제자들과의 마지막 만찬을 통해 성체성사를 제정하시고, 친히 제자의 발을 씻겨 사랑의 본보기를 주시며, 게쎄마니 동산에서 피땀 섞인 마지막 기도를 아버지께 바치신 성목요일, 날이 채 밝기도 전에 체포되어 이리저리 끌려 다니며 결국에는 사형선고를 받고 갖은 수모와 조롱의 십자가를 지고 죽음에 이르는 성금요일, 살아 계실 적에 한 번도 누리지 못했던 안식의 무덤에 묻히시는 성토요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어찌 거룩한 주간이라 할 수 있는가? 온통 배신과 처절함으로 가득 찬 한 주간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룩한 주간이 될 수 있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그것은 이 모든 과정이 최고의 인류구원사건이라 불리는 부활을 준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죽음으로 끝날 세상에 생명을 가져온 초유(初有)의 사건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성주간의 이러한 의미는 오늘 주님수난성지주일의 모든 전례 독서에 잘 담겨져 있다. 오늘 성지주일의 전례는 제1부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 기념식과 제2부 수난복음을 중심으로 한 미사로 구성된다. 특히 제2부 미사에서 봉독되는 야훼의 종의 셋째노래를 담은 제1독서(이사 50,4-7)와 바울로 사도가 펼치는 그리스도론의 핵심이라 말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강생신비와 찬가를 담은 제2독서(필립 2,6-11)는 성주간의 의미를 마음껏 표현하고 있다. 이어지는 수난복음(루가 22,14-23,56)에서는 성주간의 절정을 이루는 성삼일(聖三日) 전례의 만찬, 수난과 죽음, 묻히심의 사건을 미리 앞당겨 기념한다. 제1부에서는 성지(聖枝)를 축복한 후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에 관한 복음(루가 19,28-40)을 듣고 손에 성지를 들고 행렬하는 예식을 갖는다. 축복한 성지를 손에 들고 행렬하는 예식은 당시 군중이 나뭇가지를 꺾어다 길에 깔았던 것(마태 21,8; 마르 11,8)과 손에 종려나무 가지들을 들고 예수님을 환영한 것(요한 12,13)을 기념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 듣는 루가복음에는 나뭇가지 이야기가 빠져있다. 예루살렘 입성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예수님은 제자 둘을 시켜 새끼 나귀 한 마리를 구해 오도록 하신다. 메시아이신 예수님은 정의와 평화의 왕이시기도 하다. 이미 예언자 즈가리야가 외쳤듯이 예수께서는 세상의 왕들이 타는 군마(軍馬)가 아닌 겸손을 상징하는 나귀를 타시는 것이다: "수도 시온아, 한껏 기뻐하여라, 수도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보아라. 네 임금이 찾아오신다. 정의를 세워 너를 찾아오신다. 그는 겸비하여 나귀, 어린 새끼 나귀를 타고 오시어 에브라임의 병거를 없애고 예루살렘의 군마를 없애시리라."(즈가 9,9-10) 나귀를 타고 입성하는 예수님을 향하여 군중들이 만세를 외치며 환호하고 그 가시는 길에 겉옷과 나뭇가지를 깔고서 열광하는 모습은 솔로몬의 즉위식(1열왕 1,38-40)과 예후의 즉위식(2열왕 9,12-13)을 연상시킨다. 군중들의 이러한 태도는 다윗의 후손이신 예수께서 솔로몬이나 예후와 똑같은 왕으로 군림하기를 기대했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오늘 루가복음에서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임금이여, 찬미 받으소서! 하늘에는 평화, 하느님께 영광!"(38절)하며 외쳐댔던 이들은 막연한 군중이 아니라 수많은 제자들(37절)이었다는 점, 군중 틈에 끼어있던 바리사이파들의 난데없는 간섭(39절)과 이에 대한 예수님의 언급(40절)은 따로 시간을 내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오늘의 전례가 관중들의 믿음과 불신, 환호와 배신, 기쁨과 슬픔 등의 두 가지 서로 다른 감정의 측면을 보여주고 있음을 알게 된다. 결국 오늘 전례는 사뭇 의아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는 말이다. 예수께서는 환호하고 박수를 치며 기뻐하는 군중들과 천진난만하게 기뻐하는 어린아이들 에 둘러 싸여 성대하고 웅장하게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 우리들도 오늘 이 미사를 시작하면서 행렬을 통하여 그 기쁨에 동참한다. 그러나 곧바로 미사 중에 듣게 되는 수난 복음을 통하여 기쁨과 환호의 장면들이 일 순간에 사라지고 모든 것이 아픔과 죽음으로 향하는 비탄에 젖은 분위기를 느껴야 한다. 이런 까닭에 오늘 주일을 "성지주일"(환호와 열광), 또는 "수난주일"(아픔과 죽음)이라 하며, 이 둘을 합쳐서 "주님수난성지주일"이라 부르는 것이다. 사실상 예수께서는 당신의 공생활 중에 한번도 스스로 영광을 받으려 하시지 않았다. 병자들과 악령 들린 사람들을 치유하는 기적을 행하신 후에도 당신의 이름을 알리지 말기를 단단히 당부하셨으며, 빵 5개와 물고기 2마리로 오 천명 이상의 군중을 배불리 먹이신 기적을 베푸신 후에 군중들의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 했지만 그분은 거절하시고 오히려 그 자리를 피하셨다.

 

  그러나 오늘은 예수께서 지금껏 받지 못하셨던 영광을 허락하시고 환호와 열광을 한 몸에 받으신다.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 받으소서"하고 군중들이 외친다. 이는 곧 예수께서 당신이 왕이며 메시아임을 부르짖는 군중의 고백을 받아들이시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이제 머지않아 몸소 수난 받으시고 죽으시고 또 부활하심으로써 친히 영원한 왕이시며, 메시아로서 드러나시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를 왕이며 메시아라 부르고 환호하던 군중들은 백성의 대사제들과 원로들, 그리고 율법학자들의 선동에 빠져들어 마음이 변한다. 그들은 돌변하여 살인자 바라빠를 놓아주고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부추긴다. 예수님의 주변에는 차츰 빈자리가 생기기 시작하나. 군중들과 당신의 친 제자 유다스만이 당신을 배반하여 떠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제자들도 겁에 질려 예수를 버리고, 베드로까지도 예수를 알지 못한다고 부인하였다. 결국 사형선고를 받으신 예수님! 머리 위에는 왕관이 아닌 가시관이 씌워지고 채찍질에 온몸이 헤어져 피범벅이 된 예수! 이제 그분은 몸소 매어 달리실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타로 향하신다. 언젠가 그분은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는 자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매일 나를 따라야 한다"라고 말이다.

 

  한때는 환호하고 열광하던 군중들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옆에 따라 가면서 침을 뱉고 조롱하는 구경꾼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과연 누구인가? 구경꾼인가? 동반자인가? 아니면 방관자인가? 우리는 어떠한 마음으로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행렬에 임하고 있는가? 또 어떤 마음으로 수난복음을 들었는가? 우리가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며 "호산나"를 외치는 것은 그분이 진정 메시아요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가 처절한 고통의 수난복음을 듣는 것은 우리도 그분과 함께 십자가를 지고 그 위에서 목숨을 내어놓기 위해서이다. 이제 그분의 길은 우리의 길이 되었고 그분의 십자가는 우리의 십자가가 되었다. "사랑하올 주 예수님,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죽기까지 당신을 낮추셨으니, 거만한 저희를 용서하소서. 그러나 하느님께서 모든 것 위에 당신을 높이셨으니, 나약한 저희를 받아주소서. 이제는 당신 앞에 무릎을 꿇고 고백하나이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시여!" 아멘.◆[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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