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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산책(성주간 수요일)
작성자박상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4-04-07 조회수1,572 추천수15 반대(0) 신고

◎ 2004년 4월 7일 (수) - 성주간 수요일

 

[오늘의 복음]  마태 26,14-25

<사람의 아들은 성서에 기록된 대로 죽음의 길로 가겠지만 사람의 아들을 배반한 그 사람은 화를 입을 것이다.>

 

  14) 그 때에 열두 제자의 하나인 가리옷 사람 유다가 대사제들에게 가서 15) "내가 당신들에게 예수를 넘겨주면 그 값으로 얼마를 주겠소?" 하자 그들은 은전 서른 닢을 내주었다. 16) 그 때부터 유다는 예수를 넘겨 줄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17) 무교절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와서 "선생님께서 드실 과월절 음식을 어디에다 차렸으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18) 예수께서는 이렇게 일러 주셨다. "성안에 들어가면 이러 이러한 사람이 있을 터이니 그 사람더러 ’우리 선생님께서 자기 때가 가까이 왔다고 하시며 제자들과 함께 댁에서 과월절을 지내시겠다고 하십니다’ 하고 말하여라." 19) 제자들은 예수께서 시키신 대로 과월절 준비를 하였다. 20) 날이 저물었을 때에 예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식탁에 앉아 21) 같이 음식을 나누시면서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배반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22) 이 말씀에 제자들은 몹시 걱정이 되어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물었다. 23)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지금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은 사람이 바로 나를 배반할 것이다. 24) 사람의 아들은 성서에 기록된 대로 죽음의 길로 가겠지만 사람의 아들을 배반한 그 사람은 화를 입을 것이다. 그는 차라리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을 뻔했다." 25) 그 때에 예수를 배반한 유다도 나서서 "선생님, 저는 아니지요?" 하고 묻자 예수께서 "그것은 네 말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복음산책]  배반의 길과 십자가의 길

 

  지난 사순 제5주간 월요일부터 어제 성주간 화요일까지는 평일미사의 복음으로 요한복음이 봉독되었다. 오늘 성주간 수요일에는 마태오복음에 담겨 있는 수난사화의 한 토막을 듣는다. 오늘 복음은 유다가 대사제들로부터 은전 서른 닢을 받고 예수를 넘겨주기로 이미 약속했고(14-16절), 무교절 첫날, 과월절이 시작되는 저녁 시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하시는 과월절 만찬에서 유다의 배반을 결정적으로 예언하심으로써(20-25절) 본격적인 수난사화의 도입부 역할을 담당한다. 이는 예수께서 아직 오지 않았다고 자주 말씀하셨던 ’당신의 때’가 드디어 왔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 때는 ’제자의 이율배반적인 행동’과 과월절 만찬에서 스승이 발설하신 ’제자의 배반예고’로 시작된다. 스승의 제자가 스승을 넘겨주기로 약속했고, 스승은 제자의 배반을 예고한 것이다. 참담한 비극(悲劇: tragedy)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어제는 요한이 쓴 비극을 접했고, 오늘은 마태오가 쓴 비극을 읽는다. 성주간 화요일과 수요일에 연이어 같은 비극을 들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요한의 기록과 마태오의 기록이 마지막 만찬의 틀 안에서 수난사화의 시작으로 제자의 배반을 주제로 삼고 있기는 하지만 전후 문맥상 많은 차이점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 수난사화의 도입부에 있어서 요한복음과 공관복음의 가장 큰 차이점은 최후만찬의 시점(時點)이다.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과월절을 하루 앞두고(요한 13,1) 마지막 만찬으로 추정되는 제자들과의 식사를 나누는 식탁에서 세족례를 행하시고 유다의 배반, 새계명 선포, 베드로의 배반을 차례로 예고하시면서 길고 장황한 고별사를 행하신 것으로 보도하는 한편, 공관복음은 무교절 첫날(마태 26,17; 마르 14,12; 루가 22,7) 과월절이 시작하는 시각에 제자들과의 최후만찬, 이 자리에서 유다의 배반 예고, 성체성사 제정, 그 후 올리브산으로 향하는 도중에 베드로의 배반을 예고하고 있다. 마르코와 루가는 무교절 첫날에 과월절을 위한 양을 잡는 관습이 있었다고 하는데, 무교절과 과월절은 동시에 시작되는 축제(출애 12,1-20)이다. 참고로 유다인의 모든 축제들은 안식일과 마찬가지로 전날 저녁 해질 무렵부터(대략 6시경) 시작된다. 따라서 최후만찬의 시점이 요한복음에는 과월절 하루 전 저녁 6시 이후로, 공관복음에는 과월절이 시작하는 바로 그날 저녁 6시 이후라는 점은 확실하다. 왜 같은 사건을 이렇게 다른 시점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일까? 어느 쪽이 정확한지를 따져 묻는 것은 사실 별 의미가 없다. 물론 성서학자들 간에는 다양한 의견이 있다. 결국 요한복음사가가 좀 다른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즉 요한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과월절이 시작되기 전 낮에(또는 해질 무렵에) 양을 잡는 예식과 연결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잠시 무교절과 과월절에 대하여 살펴보자. 원래 무교절(Mazzot)은 "누룩 없는 빵의 축제"로 농경사회였던 이방인 가나안의 축제였다. 과월절(Pesah)은 이스라엘 백성의 이집트탈출을 기념하는 축제로서 니산월(유대력으로 1월) 15일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 축제는 둘 다 이미 니산월 14일 저녁부터 시작된다. 역사적인 이집트 탈출사건이 벌어진 훨씬 후에 기록된 출애급기는 무교절과 과월절 축제를 한꺼번에 묶어 이스라엘의 해방을 기념하도록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출애 12,1-20)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니산월 10일에 어린양을 준비하여 두었다가, 이를 니산월 14일 해가 지기 전에 도살하여(대략 오후 3시~6시 사이) 누룩 없는 빵을 함께 준비하여 놓고, 해가 저문 뒤에(무교절과 과월절의 시작) 불에 구운 양고기와 누룩 없는 빵을 먹음으로써 축제를 시작하였던 것이다. 누룩 없는 빵은 곧 정월 14일 저녁부터 20일 저녁까지 먹어야 했다.(출애 12,18) 그런데 최후만찬의 시점이 정확히 언제였던가를 묻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왜 예수님의 최후만찬과 십자가 죽음이 무교절과 과월절에 연결되어 있는가 하는 점이다. 해결점은 ’누룩 없는 빵’과 ’어린양의 피’이다. 예수께서는 세상의 죄사함을 위하여 내어줄 자신의 몸과 피를 무교절과 과월절 축제의 의미로 부각시켜 신약의 새로운 축제를 세우시려 하신 것이다. 이로써 구약의 해방절 만찬은 제자들에게는 스승과 함께 나눈 최후의 만찬이 되었고, 예수님에게는 세상과 인류를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구원의 징표요 새로운 계약의 설정이 된 셈이다.

     

  유다의 배반에 관하여도 좀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오늘 복음의 서두가 밝히고 있듯이, 유다는 대사제들로부터 예수를 넘겨주기로 약속하고 은전 서른 닢을 받았다. 이것으로 유다가 스승을 배반했다는 말은 없으나 예수를 넘겨줄 기회를 보고 있었다니 이미 배반한 것으로 간주해도 좋을 것이다. 유다가 왜 이토록 무모한 결정을 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전후 구절을 토대로 각자의 상상에 맡길 수도 있겠다. 예수를 넘겨주는 대가로 유다가 받은 은전 30닢은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을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고 받은 은 20냥(창세 37,28), 들릴라가 삼손을 넘겨주는 대가로 받은 은 1,100세겔(판관 16,5.18), 그리고 즈가리야 예언자에게 팔아 넘길 양을 친 대가로 준 30세겔(즈가 11,12)을 떠올려준다. 아무튼 유다도 12제자 중 하나이며, 예수님과 다른 제자들과 더불어 3년간 동고동락하였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때’가 드디어 왔음을 아시고 사랑하는 제자들과 함께 이 지상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하신다. 이 식사는 무교절과 과월절, 해방절의 만찬이요, 동시에 최후의 만찬이다. 예수께서는 해방절 만찬 식탁에 앉아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배반할 것이다"(21절) 하고 말문을 여셨다. 이에 제자들은 몹시 걱정이 되어 제각기 자기는 아닐 것이라고 반문하였다.(22절) 예수께서는 요한복음의 보도와 는 전혀 달리 "지금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은 사람이 바로 나를 배반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은 성서에 기록된 대로 죽음의 길로 가겠지만 사람의 아들을 배반한 그 사람은 화를 입을 것이다. 그는 차라리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좋을 뻔했다"(23-24절) 라고 하신다. 예수님과 함께 그릇에 손을 넣은 사람이라니 그가 과연 누구인가? 사실은 막막하다. 물론 배반자는 유다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죽게된다. 예수께서 사형언도를 받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지(마태 27,3-10), 아니면 은전 30닢으로 땅을 샀다가 거꾸러져 배가 터지는 극도의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였는지(사도 1,16-20) 자세히 알 수는 없다.

 

  아무튼 이 시점에서 예수께서는 누구 하나를 지목하신 것이 아니라 12명 중 누구든지 그가 될 수 있다는 의도로 배반의 가능성과 영역을 극대화시키고 계신다. 결국 제 발이 저린 유다가 걸려들었다: "선생님, 저는 아니지요?" 그러자 예수님은 "그것은 네 말이다" 하고 일축하셨다. 이게 무슨 뜻일까? 첫째는 유다가 자기는 아니라는 말이 사실과 다른 말로서 "너만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고, 둘째는 "그것이 너의 말이기는 하지만 나(예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라는 뜻이 될 수도 있다. 필자는 전자의 의미를 예수를 따르려는 개개인의 상황에 부쳐두고, 후자의 의미에 동의하고 싶다.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이 시작부터 제자의 배반으로 침울해진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이 제자의 배반 때문에 십자가의 길을 가시려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의 관계상 아들로서 아버지의 뜻에 자신을 내어 맡겼으며, 본성상 같은 하느님으로서 완전한 자유의지로 세상 구원의 십자가 길을 가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사람됨의 참 뜻일 것이다. 배반 때문에 십자가의 길이 있는 것이 아니다. 배반의 길과 십자가의 길은 서로 완전히 다른 길이다.◆[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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