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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수 수난, 그 여정의 인물들 3
작성자김현정 쪽지 캡슐 작성일2004-04-09 조회수1,311 추천수8 반대(0) 신고

 

예수 수난 여정에서 각 인물들을 통해서 자신을 비춰 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순절을 보내게 되면서, 저는 제 자신에 대한 새로운 의견과 영화와 책, 기도 나누기를 통해서 예수님의 현존을 체험 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성 삼일 첫째 날로써 다시 한번 자신을 되돌아 봅시다.

 

알몸으로 도망친 젊은이

 

(마르코 14,50-52)

 

유다는 자기 스승을 입맞춤으로 배반하였고, 제자들은 모두 도망친다. 바로 이 상황에서 젊은이가 등장하게 되는데, 제자들이 모두 도망을 쳤을때에도 그는 예수곁에 남아 있기를 마음 먹었으나, 병사들이 그를 잡았을때,  그는 자기 옷을 벗어버리며 도망치게 된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유독 네 복음서 중에 마르코 복음서에만 있을까?

필자가 간단하게 이야기 하자면 그는 바로 마르코 자신 이었다. 그는 예수를 떠난 수치감과 함께 병사들에게 자기 옷을 벗어 주기 전까지 목격한 장면을  증언 하기 위하여 그는 알몸으로 도망친 이를 복음사가에 넣었을 것이다.

 

그도 처음에는 끝까지 예수님과 함께 가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는 십자가의 길이 어떤것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도 소경이었던 바르티메오처럼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따르기를 원했다.

 

소경 바르티메오

 

그는 수난기의 중심에 등장하지는 않지만,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 곧 십자가의 여정의 마지막 부분에 등장한다.

 

(마르코 10,46-52)

 

요르단 저지대의 오아시스에 위치한 예리고.

과월절 축제를 앞두고,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과 군중과 함께 이 예리고를 떠나신다. 바로 이때에 예수께서는 길가에 앉아 구걸하는 소경을 만나신다.

 

바르티메오는 구걸하는 장소에서, 예수께서 많은 순례객과 함께 지나가고 계신다는 말을 듣는다. 그는 이미 예수의 활동상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에 예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자 불현듯 "바로 지금이다. 아니면 끝장이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는 예수가 어디계신지 알 수 없었기에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하고 외쳤고, 그 곳에는 동요가 일어나기 시작 하였다. 바르티메오의 고함 소리가 경건한 순례길을 방해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꾸짖지만, 바르티메오는 지금 삶의 마지막 순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쉽게 포기하지 않고 더욱 큰 소리로"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하고 소리지른다.

 

이에 예수께서는 가던 길을 멈추시고, 그를 가까이 부르시자 소경은 벌떡 일어나 겉옷을 벗고 그에게 필사적으로 다가간다.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그러자 바르티메오는 평범하게 구걸을 하지않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눈을 떠야 한다고 생각하여서 한가지 을 원한다.

"선생님 제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하고 말한다.

 

우리는 예수께선 말씀 하신데로  그의 믿음이 그의 눈을 뜨게 한 것을 안다. 복음사가에서는 눈을 뜬 바르티메오가 어떠한 일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는 것이 없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짧게 이 이야기를 전한다.

 

그 순간에 소경은 눈을 뜨고 예수를 따라 나섰다.(마르코 10,52)

 

물동이에 물을 길어 가는 사람

 

그는 파스카의 신비의 만찬이 이루지는 방으로 안내하는 길잡이다.

또한 우리는 그를 통해 예수님께서 받으신 수난은 그가 어리석거나 경솔해서 죽음을 당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는 복음사가(마르코 14,12-16)에서 보여 지는 것처럼, 자신의 수난 길을 구체적이며 세세하게 계획하셨으며, 미래를 내다보는 가지심과 홀로 섭리 하셨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디에다 과월절 음식을 준비해야 하는가?"라는 제자들의 짧은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놀랍도록 구체적인 대답이다.

예수께서 이 "중개자"를 익명으로 설정하신 이유를 추측해 보면, 라자로를 무덤에서 살리신 이후, 예수께서는 반대 세력이 예수를 죽일 궁리를 하자, 예루살렘에서 드러 기를 꺼려 하셨으며, 그의 제자안에 배신자는 호시탐탐 예수를 팔아넘길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렇다면 하필 물을 길어 가는 사람을 택하셨을까?

그는 성서 안에서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앞으로 있을 이 만찬으로 오늘 여기에서 예수를 통하여 새롭고 결정적인 만찬으로 변하게 된다. 하느님께서는 몸소 예수 그리스도를 새로운 파스카의 어린양으로 내어 주시기 때문이다.

그 어린 양은 세상에 죄를 없애시며 인간을 하느님과 화해하게 하시는 양이다.

 

그 때에 실로암 연못에 물을 길러 다니는 남자는 흔했다. 그러나 물동이는 여자가, 남자는 가죽부대에 물을 길어 갔다고 한다. 때문에 물동이는 제자가 마지막 만찬을 준비하기 위해 먼저 만나야 했던 그 사람을 알아보는 표시였다. 또한 물은 생명을 상징한다.

 

그는 묵묵히 자기 역할을 충실히 하였다. 그저 하느님의 뜻에  이렇다 할 질문을 하지 않는 사람이 필요했다. 그느 파스카의 신비가 이루어질 방으로 제자들을 안내 하였다.

 

물동이에 물을 긷는 사람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점은 바로 이렇다.

이 세상에는 하느님께서 필요로 하지 않는 그 어떤 인간도 없으며, 하느님께 봉사할 수 없는 그 어떤 인간도 없다. 모든 인간은 각자 하느님께 중요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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