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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산책(부활성야)
작성자박상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4-04-10 조회수1,362 추천수14 반대(0) 신고

◎ 2004년 4월 10일 (토) - 부활성야

 

[오늘의 복음]  루가 24,1-12

<너희는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자 가운데서 찾고 있느냐?>

 

  1) 안식일 다음날 아직 동이 채 트기도 전에 그 여자들은 준비해 두었던 향료를 가지고 무덤으로 갔다. 2) 그들이 가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은 이미 굴러 나와 있었다. 3) 그래서 그들이 무덤 안으로 들어가 보았으나 주 예수의 시체는 보이지 않았다. 4) 그들은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하고 있었는데 바로 그 때에 눈부신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나타났다. 5) 여자들은 그만 겁에 질려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여자들에게 "너희는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자 가운데서 찾고 있느냐? 6) 그분은 여기 계시지 않고 다시 살아나셨다. 그분이 전에 갈릴래아에 계실 때에 무어라고 말씀하셨느냐? 7)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죄인들의 손에 넘어가 십자가에 처형되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리라고 하시지 않았느냐?" 하고 말해 주었다. 8) 이 말을 듣고 여자들은 예수의 말씀이 생각나서 9) 무덤에서 발길을 돌려 열한 제자와 그 밖의 여러 사람들에게 와서 이 모든 일을 알려주었다. 10) 그 여자들은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요안나와 또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였다. 다른 여자들도 그들과 함께 이 모든 일을 사도들에게 말하였다. 11) 그러나 사도들은 여자들의 이야기가 부질없는 헛소리려니하고 믿지 않았다. 12) 그러나 베드로는 벌떡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몸을 굽혀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랬더니 수의밖에는 아무 것도 없었으므로 그는 어떻게 된 일인가 하고 이상히 여기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부활성야]  무언의 메시지가 성취되는 밤

 

  성토요일을 비추던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고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면 교회는 바빠진다. 모두가 주님의 부활을 맞이할 준비로 분주해 지는 것이다. 정해 놓은 시간이 되면 화로의 숯불만이 깜깜한 밤을 밝힌다. 어둠을 밝히는 것은 오직 빛이요, 죽음을 이기는 것은 오직 생명이다. 빛과 생명의 잔치, 이것이 오늘 성야(聖夜)전례의 핵심이다. 오늘 성야는 성토요일이 전하는 무언(無言)의 메시지가 성취되는 밤이다. 일년 365번의 밤들 중에 가장 거룩하고 성대한 밤이다. 예수께서 어둠을 뚫고 빛으로, 죽음을 이기고 생명으로 부활하신 밤이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부활성야 예식을 함께 치러본 사람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 왜 ’부활신앙’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부활성야의 예식은 총 4부로 이루어진다. 먼저 제1부에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시간과 공간, 빛과 생명의 주인이심을 고백하는 ’빛의 예식’을 거행한다. 축성된 불로써 준비된 부활초를 밝히고 이 부활초로부터 모두가 차례로 불을 전해 받는다.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빛과 생명을 모두가 전해 받음을 뜻하는 것이다. 빛의 예식은 주님 부활의 기쁨을 어둠을 뚫고 만방에 선포하는 부활찬송(Exultet)으로 마무리된다. 제2부 말씀의 전례에서는 주 하느님께서 세상창조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세상에 펼치신 놀라운 업적을 묵상한다. 우선 구약성서에서 7개의 독서(① 창세기 1장: 천지창조/ ② 창세기 22장: 성조 아브라함의 제사/ ③ 출애급기 14장: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다/ ④ 이사야 54장: 새로운 예루살렘/ ⑤ 이사야 55장: 구원의 보편성/ ⑥ 바룩서 3장: 지혜의 샘/ ⑦ 에제키엘 36장: 새 마음과 새 영)가 봉독되고 매 독서 후에 장엄한 기도를 바친다. 대영광송(Gloria)과 본기도 후에 신약성서 서간독서(로마서 6장: 불멸의 그리스도)와 복음(가해: 마태 28,1-10/ 나해: 마르 16,1-7/ 다해: 루가 24,1-12)이 선포된다. 제3부는 세례예식이다. 선발된 예비신자들에게 물로 씻어 새로 태어나게 하는 세례성사를 베풀고, 기존의 신자들은 자신의 세례서약을 갱신한다. 이는 세례성사를 통하여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묻히심과 부활에 동참함을 의미한다. 제4부는 성찬전례로서 새로 태어난 신자들과 함께 모든 신자들이 성목요일 저녁 주님께서 친히 세우시고 성금요일 십자가 제사로 완성하신 성체성사의 성찬에 초대받는다. 이 성찬은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여 그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지속될 것이다.

 

[복음산책]  빈무덤을 경축하는가?

 

  어제 성금요일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기념하는 전례를 통하여 우리는 어떠한 욕설과 조롱도, 침 뱉음과 모욕적인 발언도, 무자비한 채찍질과 구타도, 살을 파고드는 아픔도, 나아가 인간 최대의 부정적인 체험인 사형선고와 그로 인한 죽음도 예수님의 인간적이고 하느님적인 사랑을 굴복시킬 수 없음을 보았다. 하느님 사랑은 이렇게 죽음까지도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이신 것이다. 자기에게 모든 불리한 것을 참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 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제 다 이루었다."(요한 19,30) 이 말씀을 마지막으로 인간 예수님은 고개를 떨구며 숨을 거두셨다.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신 순간, 공관복음이 공통적으로 보도하는 바에 따르면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폭으로 찢어졌으며(마태 27,51; 마르 15,38; 루가 23,44), 예수의 죽음을 지켜보던 백인대장과 사람들은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었구나"(마태 27,54; 마르 15,38; 루가 23,47) 하고 고백하였다. 마태오는 그 순간 땅이 흔들리며 바위가 갈라지고, 무덤이 열리면서 잠들었던 많은 옛 성인들이 다시 살아났다는 사실을 추가로 보도하고 있다.(마태 27,51-53) 이들은 예수님의 죽음이 가져온 사건들이다. 사태는 분명히 돌변했다. 예수께서 숨을 거두시는 순간, 그분이 원래 지니고 계셨던 신성(神性)이 그 모습을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제 세계의 역사에는 또 다른 하느님의 자기계시가 시작되었다. 예수의 죽음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가 드러난 것이다. 예수의 죽음은 패배가 아니라 죽음에 대한 승리의 사건이다. 이는 인류의 역사가 지금껏 누려보지 못했고, 앞으로도 누리지 못할 최대의 승리이다. 이는 죄에 대한 승리요, 죄로 말미암은 죽음에 대한 승리로서 곧 부활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다시 살아 나셨다.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이는 일이었고, 유다인들에게는 비위에 거슬리고, 온갖 분노와 모욕을 불러일으킨 일이었지만(1 고린 1,23), 예수님의 공생활 중 모든 가르침과 행동의 마지막 책임 있는 결론이 십자가상 죽음이라면, 오늘 우리가 자랑스럽게 믿고, 경축하는 예수님의 부활은 이 모든 것이 참되다는 것을 확증해 주는 사건이다. 그분이 일찍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더라도 영원히 살 것"(요한 11,25)이라는 말씀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는 말씀에 대한 확증이다. 따라서 그분의 부활은 우리의 믿음이 헛되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것이며, 우리의 믿음과 희망이 죽음으로 끝나거나 죽음에 머물지 않고 살아 있는 자에 있다는 사실을 보증해주는 것이다. 참된 믿음이란 거짓에 뿌리를 둘 수 없다. 참된 믿음은 변할 수 없는 ’진리’에 그 뿌리를 두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리심으로써 그분 삶의 내용뿐만이 아니라, 그분 자체가 진리임을 증명해 주신 것이다. 진리는 불멸한다. 죽을 수 없다. 만약 죽더라도 다시 살아나야 하는 것이 진리이다.

 

  하느님께도 예수님께도 죽음은 없다. 그분은 부활이요 생명이기 때문이며, 이것이 곧 진리이기 때문이다. 하느님 편에서는 그렇다 치더라도, 죽어야 할 운명을 지닌 우리 인간들 편에서 진리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에 관한 믿음을 얻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은 일단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들은 루가복음에서도 부활을 목격했다는 보도는 아무 데도 없다. 이는 모든 복음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확실한 것 두 가지는 안식일 이른 아침에 무덤을 찾아갔던 여인들이 예수님의 시신이 없는 빈무덤만을 보았다 것과 (두) 젊은이가 전해주는 메시지가 전부였다는 것이다. 결국 빈무덤과 메시지를 가지고 우리는 예수부활의 믿음에 도달하여야 한다는 결론이다. 그렇다면 예수부활에 관한 믿음은 하나의 도전인 셈이다. 믿어지지 않는 것을 믿어야하는 도전이다. 이 도전이 비단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만 갑자기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첫날 아침부터 그랬다.

 

  부활의 믿음에 대한 도전의 실마리는 빈무덤과 젊은이의 메시지이다. "너희는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자 가운데서 찾고 있느냐? 그분은 여기 계시지 않고 다시 살아나셨다. 그분이 전에 갈릴래아에 계실 때에 무어라고 말씀하셨느냐?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죄인들의 손에 넘어가 십자가에 처형되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리라고 하시지 않았느냐?"(5-7절) 이 구절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는 곧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이 죽은 자 가운데 있을 수 없으므로 무덤이 비어있다는 것이며, 갈릴래아 활동시절에 세 번에 걸쳐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더욱이 오늘 복음에서 빈무덤을 최초로 목격한 여인들이 바로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님을 줄곧 따라 다녔던 여인들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루가 23,49) 오늘 루가복음의 내용을 미루어 볼 때 이 여인들은 예수님 부활의 최초 증인들이다. 이 여인들은 갈릴래아 시절부터 예수님의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예수님과 함께 했던 사람들이었다. 안식일 이른 새벽에 급하게 준비한 향료를 가지고 무덤에 갔던 이유도 ’명절 준비일’과 ’안식일 시작’ 때문에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과 함께 경황없이 치렀던 예수님의 장례(루가 23,50-56)를 송구스럽게 생각하여 보완하려 했던 것이다. 이렇게 그들은 예수님의 생애 마지막 그 이상을 그분과 함께 하려 했던 것이다. 결국 이런 여인들에게 부활신앙의 은총은 주어지는 것이다. 우리들 또한 부활신앙이 갈릴래아와 빈무덤에서 시작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애독자 여러분, 주님의 부활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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