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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생명에로 되돌아감
작성자박영희 쪽지 캡슐 작성일2004-04-11 조회수1,175 추천수7 반대(0) 신고

                 

                     

 

"너희는 어찌하여 살아계신 분을 죽은자 가운데서 찾고 있느냐? 그분은 여기 계시지 않고 다시 살아나셨다. 그분이 갈릴래아에 계실 때에 무어라고 말씀하셨느냐?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죄인들의 손에 넘어가 십자가형에 처형되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리라고 하시지 않았느냐?"   

                             (루가 24, 5-7)

 

하늘에서 온 두 분이 여인들을 질책한다. 짐작건대 우리도 그 여인들처럼, 그분을 마지막으로 보았던 무덤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찾는 일 부터 할 것이다.

 

처음에는 시신부터 찾는다. 이해가 되긴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하지 못한다. 우리는 종종 생명을 죽은자 가운데서 찾는다. 죽은 율법조문에서 찾으려고 한다. 모든 계명을 지키고 모든 것을 올바르게 행하기만 하면 그것이 생명이라고 여긴다.

 

어릴 때부터 "내가 하는 일은 옳은 일인가? 이렇게 하는 것이 옳은가?" 라고 늘 묻기만 해온 부인을 알고 있다. 그러나 옳고 그름을 묻는 것만으로 생명에 이를 수는 없다. 그녀는 죽은 이들 가운데서 산 이를 찾고 있다.

 

어떤 이는 생명을 돈과 재산에서 찾는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고 싶어하는 젊은이에게 "죽은이 장사는 죽은 이들이 치르도록 내버려두고 그대는 가서 하느님 나라를 알리시오" (루가 9, 60) 하고 말씀하신다.

 

돈, 재산, 권력, 지위 이 모든 것은 죽은 것이다. 우리는 그것들을 묻어 버려야 한다. 죽게 내버려 두어야 한다. 그리고 생명에로, 하느님 나라로 향해야 한다.

 

하느님이 그 안에 계실 때, 하느님이 그 안에서 다스리실 때, 하느님의 빛과 사랑이 그 안에서 드러날 때 생명은 비로소 참 생명이 된다.

 

유산을 탕진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며, 밥도 안 되는 음식 찌꺼기로 배고픔을 달랜 탕자 역시 죽은 자이다. 외적인 쾌락, 무절제한 생활, 자제력 없이 기분내키는 대로 사는 것, 이 모두가 죽은 것이다.

 

여기서는 생명을 찾을 수 없다. 아들이 회개하고 집으로 돌아왔을 대 참고향인 그곳에서 다시 살아난다. 아버지는 성대한 생명의 잔치를 벌이게 한다.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루가 15, 24)

 

죽음의 영역에서 생명을 찾을 수 없다. 하늘에서 온 두 사자는 여인들에게 살아있는 주님을 찾을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준다. 그들은 예수의 말씀을 상기시킨다. "그분이 갈릴래아에 계실 때에 무어라고 말씀하셨느냐?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죄인들의 손에 넘어가 십자가형에 처형되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리라고 하시지 않았느냐?" (루가 24, 6-7)

 

예수의 말씀을 상기시킨 것이 여인들로 하여금 믿게했다. 예수의 말씀안에서 생명을 찾았다. 그분의 말씀을 상기하면, 혹은 "레꼬르다미니 (recordamini)" 라는 라틴어 표현처럼 말씀을 마음속으로 음미하거나 되새기면, 부활의 신비를 깨닫게 된다.

 

그대가 죽은 것들 가운데서 산 것을 찾는데가 어디입니까? 이미 죽었기 때문에 묻어버려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지난날의 갈등과 상처들, 그리고 그대를 비참하게 만든 좌절이 아직 당신을 괴롭힐지 모르겠습니다.

 

그대안에서 죽운 것들을 모두 적어보십시오, 그리고 그것들을 정원이나 화분에 묻어버리십시오. 상처들을 묻은 무덤에서 새 생명이 피어날 수 있도록 그 위에 꽃씨를 뿌려보십시오. 상처입은 인생사의 무덤을  새삼스레 파뒤집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꽃들이 일깨워 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과거라는 무덤 위에 어떤 꽃도 새로 피어날 수 없을 테니까요.

 

<안셀름 그륀/ 부활의 기쁨 백배 맛보기> 편집 정리

 

상처들을 끓어 안고 울면서 그자리에 버티고 서서 안가겠다고 고집부리는 어린아이와 같은 자신의 모습을 바라봅니다. 울면서라도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내가 죽은 것들에서 산 것을 찾는 데가 어디일까? 위의 예의 부인처럼 "내가 하는 일은 옳은 일인가? 이렇게 하는 것이 옳은가?" 라고 끊임없이 물음만을 제기하며 맴돌고 살아온 느낌이 듭니다.

 

그뿐인가요? 돈과 재산, 명예와 지위, 외적인 쾌락, 자제력 없이 사는 것, 이 모든 것들에서 자유로와지지않은 자신의 모습을 봅니다.

 

내안에서 죽은 것들을 묻어버리고 새 생명이 피어나려면 "예수님의 사랑에 기쁘게 굴복할 때", 순간 순간을 그분께 위탁하며 살아갈 때 이루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 분의 죽음을 가져온 그 사랑이 바로 우리를 치유하고 회복시켜 주며 변화시키는 사랑이다. 이 사랑은 부활하여 살아계신 예수님 -영광스러운 , 그러나 여전히 고난의 상처를 안고 계시는 예수님-의 현존을 통하여 끊임없이 우리에게 부어진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선으로 부르심으로써 우리를 치유하시며 당신 사랑의 현존을 계속하신다.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예수님의 현존에로 초대받았다. 우리가 해야할 것은 오로지 믿는 것, 즉 "예" 하고 그분의 사랑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사랑은 변화를 가져온다. 이 변화는 오랜세월을 두고 마침내 우리를 완전에로 이끌 때까지 계속된다. 즉 우리의 참 모습 - 사랑을 받으며 또한 주는 사람-을 실현할 때까지 계속된다." <용서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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