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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산책(부활2주간 화요일)
작성자박상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4-04-20 조회수1,404 추천수13 반대(0) 신고

◎ 2004년 4월 20일 (화) - 부활 제2주간 화요일

 

[오늘의 복음]  요한 3,7-15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의 아들 외에는 아무도 하늘에 올라간 일이 없다.>

 

  7) "새로 나야 된다는 내 말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 8) 바람은 제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듣고도 어디서 불어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모른다. 성령으로 난 사람은 누구든지 이와 마찬가지다."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시자 9) 니고데모는 다시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10) 예수께서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의 이름난 선생이면서 이런 것들을 모르느냐? 11) 정말 잘 들어 두어라.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말하고, 우리의 눈으로 본 것을 증언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너희는 우리의 증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12) 너희는 내가 이 세상일을 말하는데도 믿지 않으면서 어떻게 하늘의 일을 두고 하는 말을 믿겠느냐? 13)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의 아들 외에는 아무도 하늘에 올라간 일이 없다. 14) 구리뱀이 광야에서 모세의 손에 높이 들렸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높이 들려야 한다. 15) 그것은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려는 것이다."◆

 

[복음산책]  하느님 영의 역동성과 창의성

 

  어제 복음에 이어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가 계속된다. 오늘 복음의 대화는 물과 영으로 ’새로 남’의 의미에 대한 추가설명(7-10절)과 예수님의 자기계시적(自己啓示的) 가르침(11-15절)의 두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어제 복음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최소한, 그러나 절대적인 조건으로 ’새로 태어나야 함’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니고데모의 생각은 더 이상 진행될 수가 없었다. 이 세상에 한 번 태어난 사람이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나올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 따라서 예수께서는 ’물과 영’으로 새로 태어나야 함을 제안하신 것이다. ’물’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물은 생명(生命)과 정화(淨化)를 상징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생명과 깨끗함을 가져다준다. 문제는 ’영’에 대한 것이다. 영(靈)에 대한 지식은 모두가 짧다. 히브리어의 ’루아흐’(Ruah)나 희랍어의 ’프네우마’(Pneuma)는 구약성서에서 ’바람, 호흡, 영혼, 정신’ 등을 가리키는 의미로 다양하게 쓰인다. 예수께서는 ’영’을 니고데모뿐 아니라 사람들이 이해하기 쉬운 ’바람’에 비유하여 설명하신다. "바람은 제가 불고 싶은 대로 분다"(8절)는 말은 ’영’의 자유로운 속성을 가리킨다. 바람이 부는 소리는 우리가 들을 수 있으나, 어디서 불어와 어디로 가는 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오늘날 과학의 발달에 힘입어 기상대가 관측하여 바람의 방향을 예보(豫報)할 수는 있으나, 예보는 어디까지나 예상(豫想)이며, 가정(假定)이다. 따라서 바람의 방향은 언제나 불확실하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바람의 성질을 통하여 영의 역동성(逆動性)과 창의성(創意性)을 암시하신다. 그래서 곧바로 "성령으로 난 사람은 누구든지 이와 마찬가지다"(8절) 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공동번역 성서는 여기서 ’성령’이라고 말하지만, 희랍어 원문에는 그냥 ’영’으로 기록되어 있음에 주의해야 한다. 아직까지 하느님 성삼(聖三)의 구조를 언급할 단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대목의 ’성령(聖靈)’은 그저 ’거룩한 영’으로 알아들어야 할 것이다. 언급을 한다고 해도 하느님에 대한 유일신(唯一神) 사상을 전부로 알고 있는 니고데모가 이를 이해할 턱이 없다. 따라서 니고데모의 반문은 하느님 ’성령’이 아니라 막연한 ’영’에 의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9절) 라는 식으로 알아들어야 할 것이다. 이어서 예수님의 "너는 이스라엘의 이름난 선생이면서 이런 것들을 모르느냐?"(10절)라는 꾸중은 니고데모가 ’영’에 대한 사고의 지평을 넓혀야 함을 고무하는 말씀인 셈이다.

 

  이제 ’정말 잘 들어 두어라’(11절)라는 요한복음의 특유한 표현으로 두 번째 단락이 시작된다. 즉 예수님의 자기계시적 가르침이 주어진다는 뜻이다. 이 가르침은 단지 니고데모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니고데모가 어제 복음에서 "선생님, 우리는..."(3,2) 하고 시작했던 물음의 서두를 기억하여 예수께서도 제자들을 포함한 ’우리는’이라는 표현과 니고데모와 같은 부류에 속하는 유다인들을 지칭하는 ’너희는’이라는 표현으로 가르침을 내리신다. 이 가르침은 ’너희’를 포함한 세상에 대한 예수님의 자기계시를 의미한다. 예수님의 자기계시(自己啓示)는 그분이 말씀하시는 ’하늘의 일’이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자기계시적 가르침은 사실상 보류(保留)되고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예고하는 암시로 마무리된다. 그것은 니고데모를 포함한 세상 사람들이 ’세상의 일’(바람에 비유된, 또는 바람과 같은 영의 의미와 능력) 조차도 깨닫거나 믿지 못하기 때문에 ’하늘의 일’을 깨우치거나 믿는다는 것은 더욱 어렵기 때문이다. 성서학자들은 십자가 죽음에 관한 예고의 대목(13-15절)을 예수님의 직접적인 발설(發說)이라기보다는 요한복음저자의 독자적인 편집으로 간주한다. 그것은 공관복음에서 세 번씩이나 발견되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예고가 요한복음에는 없기 때문이며, 물과 영으로 다시 태어남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께 대한 믿음에 연결시키고자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과 영으로 새로 태어남’은 분명 세례성사를 의미한다. 세례성사에서 물의 역할을 아주 중요하다. 모든 성사에서 합법적인 성사거행을 위해 필수 불가결한 것은 형상(形象)과 질료(質料)이다. 세례성사에서 물은 질료에 속한다. 물은 생명(生命)과 정화(淨化)를 상징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생명과 깨끗함을 가져다준다고 했다. 그렇다고 물이 성사를 베푸는 것은 아니다. 물은 어디까지나 상징적인 것이다. 따라서 세례성사가 목적으로 하는 ’새로 태어남’을 가능하게 하는 역동적이고 창조적인 힘, 새 생명을 가져다주는 힘은 바로 하느님의 영이다. 이는 세상을 창조한 하느님의 기운(창세 1,2)이며, 진흙 인간이 숨을 쉬도록 생명을 가져다 준 하느님의 입김(창세 2,7)이다. 하느님 성령은 "모든 사람에게 숨길을 불어넣어 주시고"(민수 16,22), "땅위에 움직이는 모든 것들에게 숨결을 주시며"(이사 42,5), "마르고 비틀어진 뼈들 속에 숨을 불어넣어 다시 살려주시는"(에제 37,6) 힘이다. 이러한 하느님 성령의 역동적이고 창조적인 활동이 세례성사 안에서 드러나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에 맞물려 작용하기 시작한다는 것이 바로 오늘 복음의 핵심인 셈이다. 그렇다면 세례 받은 사람은 이미 역동적이고 창조적인 하느님의 영에 따라 사는 사람인 것이다.◆[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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