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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산책(부활2주간 수요일)
작성자박상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4-04-21 조회수1,417 추천수10 반대(0) 신고

◎ 2004년 4월 21일 (수) - 부활 제2주간 수요일

 

▣ 성 안셀모 (1033-1109) 주교 학자 기념일

 

  안셀모 성인은 1033년경 북부 이탈리아의 롬바르디아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모친을 여읜 후 부친과의 갈등으로 말미암아 부르군드의 친지 댁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060년 당시 유명했던 랑프랑크(1005-1089)가 이끄는 노르망디의 레벡 베네딕토 수도원에 입회하였다. 성인은 학문과 신심에 큰 진전을 보였고, 동료 수사들의 권고로 1077년 독백형식의 묵상집《모노로기온》을 집필하였다. 아우구스티노의 사상을 반향하고 있는 이 묵상집은 하느님을 최고의 절대적 존재로 설정하고 하느님의 존재적 속성을 피력하고 있다. 주위의 커다란 호응과 함께 힘을 얻은 성인은 1078년 대화형식의 《프로스로기온》을 집필하여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이해의 길을 열었다. 이 작품의 일부분은 18세기에 이르러 성 안셀모의 《존재론적 신존재 증명》으로 각색되어 널리 알려졌다. 1078년 수도원장 랑프랑크가 영국 캔터베리의 대주교로 임명되자 안셀모가 후임으로 선출되어 수도원을 이끌었으며, 1093년에는 캔터베리의 대주교에 서임되었다. 이 즈음 영국에도 독일에서와 비슷한 ’주교서임투쟁’이 발생하여 왕과 주교의 모호한 관계가 성립되면서 안셀모 성인의 삶은 세속의 권력과의 갈등으로 치닫는다.

 

  1097년 영국의 윌리엄 2세(일명 루푸스)가 사냥터에서 살해되자 이탈리아로 추방된 가운데서도 성인은 학문의 정진에 소홀히 하지 않았다. 이 때 안셀모는 걸작 《꾸르 데우스 호모》(왜 하느님이 사람이 되었는가?)를 집필하였다. 1100년 헨리 1세가 왕위를 계승하자 안셀모는 다시 캔터베리로 돌아왔으나 권력과의 갈등을 계속되었다. 1103년 다시금 추방된 성인은 1106년 헨리 1세와 교황 파스칼리스 2세(1099-1118)의 협정에 의하여 캔터베리로 복귀하여 교구사목과 신학연구에 여생을 봉헌할 수 있었다. 안셀모 성인은 당대 최고의 스콜라철학자요 신학자로 통한다. 그는 인간 이성의 능력을 강조하여 ’이해하기 위하여 먼저 믿어라’고 하였다. 특히 존재론적 신존재 증명에서 안셀모는 인간이 하느님을 절대적으로 사고(思考)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서 출발하여 하느님을 ’더 이상 사고될 수 없는 최종의 규모’로 제시한다. 인간의 사고 속에 이러한 최고의 규모는 필히 존재함으로 하느님의 존재는 필연적이며, 비록 인간이 하느님의 존재를 의심한다 하더라도 의심하는 자체가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으로 정립된다. 나아가 이렇게 정립된 하느님은 다름 아닌 ’완전한’ 존재로 인식되며, 그렇지 않고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모순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안셀모의 신존재 증명에서 하느님의 존재가 단순히 인간의 이성과 사고 안에만 존재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주기 때문에 후일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와 임마누엘 칸트(1724-1804)에 의해 비판되기도 하지만 그의 사상은 데카르트(1596-1650), 스피노자(1632-1677), 라이프니츠(1646-1716) 등 다수의 철학자들에게서 발견된다. 안셀모는 무엇보다 경건하고 신비주의적 성인으로 공경 받고 있다. 그의 무덤은 캔터베리의 주교좌 성당에 있으며, 1494년에 성인품에 올랐고 1720년에 교회학자로 선포되었다.◆

 

[오늘의 복음]  요한 3,16-21

<하느님이 아들을 보내신 것은 아들을 시켜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16)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 17) 하느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시켜 구원하시려는 것이다. 18) 그를 믿는 사람은 죄인으로 판결 받지 않으나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죄인으로 판결을 받았다. 하느님의 외아들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19)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자기들의 행실이 악하여 빛 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다. 이것이 벌써 죄인으로 판결 받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20) 과연 악한 일을 일삼는 자는 누구나 자기 죄상이 드러날까 봐 빛을 미워하고 멀리한다. 21) 그러나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은 빛이 있는 데로 나아간다. 그리하여 그가 한 일은 모두 하느님의 뜻을 따라 한 일이라는 것이 드러나게 된다."◆

 

[복음산책]  불신자체가 불신자를 심판한다.

 

  니고데모의 호감에서 출발한 예수님과의 대화는 어느새 세상을 향한 예수님의 자기계시적(自己啓示的) 가르침으로 반전되었다. ’세상의 일’ 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니고데모가 ’하늘의 일’을 이해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따라서 오늘 복음에 담겨있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니고데모와 행한 대화의 연속으로 보기는 어렵다. 즉, 예수의 역사적 발설(發說)이라는 보다는 요한복음사가의 독자적 성찰의 결과로 후에 편집된 것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16절) 이 말씀은 모든 복음서와 성서 말씀의 요약이며, 결론이다. 요한은 자신의 서간에서 이 점을 더욱 분명히 하고 있다.(1요한 4,9-16) 세상의 구원이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이루어졌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게 되는 동기(動機)는 바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구원의 방법(方法)으로 하느님은 ’외아들을 보내주시고’, 외아들을 세상에 보낸 목적(目的)은 곧,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자기 외아들까지 보내어 세상을 구원하려는 동기(動機: motivation)이다. 그 동기가 바로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심이다.

 

  하느님께서 그토록 극진히 사랑하시는 세상(世上)이 무엇인가? 우리가 사는 곳이다. 온갖 악(惡)과 불의(不義), 고통과 죽음이 한데 뒤섞여 질서 없이 춤을 추는 곳이 아닌가? 사실 세상은 비구원적 상태 그 자체이다. 비구원적 세상에 대한 인간의 경험은 구원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그렇다고 해서 구원이 자연발생적으로 주어지거나 툭하면 죄에 빠져 허덕이는 나약한 인간의 힘으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세상의 많은 종교들(특히 힌두교, 불교, 유교, 도교 등의 동양종교)이 그러한 착각에 빠져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자신의 능력이나 고도(高度)로 수련한 삶을 통하여 적어도 구원을 성취할 수 있다는 아집에 빠져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을 구원할 수는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너나 나만의 구원이 아니라, 전적으로(total) 비구원적 상태에 빠져있는 세상의 구원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세상을 하느님은 사랑하신다. 그렇다고 세상이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것도 아니다. 세상이 벌어들인 것은 사실상 하느님의 분노(忿怒)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세상을 사랑하신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고(1요한 4,8), 그 사랑이 세상을 창조하였기 때문이며, 이 사랑이 하느님 스스로를 사람이 되게 하였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영(靈)이 바로 사랑이다. 이 사랑만이 자신의 외아들을 세상에 보낼 수 있는 것이다. 세상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느님께서 극진히 사랑하시는 자기에게 파견된 외아들을 믿는 일 뿐이다. 믿지 않는 사람은 죄인으로 판결 받는다. 이 판결은 하느님이 내리시는 것이 아니라 불신(不信) 그 자체가 불신자(不信者)에게 내리는 판결이다.◆[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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