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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산책(부활 제3주일)
작성자박상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4-04-26 조회수1,339 추천수12 반대(0) 신고

◎ 2004년 4월 25일 (일) - 부활 제3주일 (다)

 

[오늘의 복음]  요한 21,1-14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가까이 오셔서 빵을 집어 주시고 또 생선도 주셨다.>

 

  1) 그 뒤 예수께서 티베리아 호숫가에서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나셨는데 그 경위는 이러하다. 2) 시몬 베드로와 쌍둥이라는 토마와 갈릴래아 가나 사람 나타나엘과 제베대오의 아들들과 그 밖의 두 제자가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3) 그 때 시몬 베드로가 "나는 고기를 잡으러 가겠소" 하자 나머지 사람들도 같이 가겠다고 따라 나섰다. 그들은 배를 타고 고기잡이를 나갔다. 그 날 밤에는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다. 4) 이튿날 날이 밝아 올 때 예수께서 호숫가에 서 계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분이 예수이신 줄을 미처 몰랐다. 5) 예수께서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아무 것도 못 잡았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6)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져 보아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 그들이 예수께서 이르시는 대로 그물을 던졌더니 그물을 끌어올릴 수 없을 만큼 고기가 많이 걸려들었다. 7) 예수의 사랑을 받던 제자가 베드로에게 "저분은 주님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주님이시라는 말을 듣자 옷을 벗고 있던 시몬 베드로는 몸에 겉옷을 두르고 그냥 물 속에 뛰어들었다. 8) 나머지 제자들은 고기가 잔뜩 걸려든 그물을 끌며 배를 저어 육지로 나왔다. 그들이 들어갔던 곳은 육지에서 백 미터쯤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9) 그들이 육지에 올라와 보니 숯불이 있고 그 위에 생선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빵도 있었다. 10)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방금 잡은 고기를 몇 마리 가져오너라" 하고 말씀하셨다. 11) 시몬 베드로는 배에 가서 그물을 육지로 끌어올렸다. 그물 속에는 백 쉰 세 마리나 되는 큰 고기가 가득히 들어 있었다. 그렇게 많은 고기가 들어 있었는데도 그물은 터지지 않았다. 12) 예수께서 그들에게 "와서 아침을 들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 중에는 감히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분이 바로 주님이시라는 것이 분명하였기 때문이다. 13)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가까이 오셔서 빵을 집어 주시고 또 생선도 집어 주셨다. 14)예수께서 부활하신 뒤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은 이것이 세 번째였다. 15) 모두들 조반을 끝내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베드로가 "예, 주님.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내 어린양들을 잘 돌보아라" 하고 이르셨다. 16) 예수께서 두 번째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정말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예, 주님.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 하고 이르셨다. 17) 예수께서 세 번째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께서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는 바람에 마음이 슬퍼졌다. 그러나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일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니 제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 하고 분부하셨다. 18) 이어서 "정말 잘 들어두어라. 네가 젊었을 때에는 제 손으로 띠를 띠고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나이를 먹으면 그 때는 팔을 벌리고 남이 와서 허리를 묶어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끌고 갈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19) 예수의 이 말씀은 베드로가 장차 어떻게 죽어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될 것인가를 암시하신 말씀이었다. 이 말씀을 하신 뒤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

 

[복음산책]  주님께서 보여주신 아가페의 사랑

 

  요한복음 21장이 나중에 추가로 편집되었다는 것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다. 통상 21장의 저자는 요한복음의 원저자를 추종하던 요한학파에 속하는 사람일 것으로 추정된다. 21장을 단락으로 구분하여 보면, ① 티베리아 호수에서 고기를 잡던 일곱 제자에게 발현한 예수와 예수의 개입으로 뜻밖에 많은 고기를 잡은 기적(1-14절), ② 부활예수와 수제자(首弟子)인 베드로의 특별한 관계묘사 및 사명전달(15-19절), ③ 예수와 애제자(愛弟子)의 관계(20-24절), 그리고 ④ 맺음말에 해당하는 에필로그(25절)의 4단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오늘 복음은 첫 번째와 두 번째 단락을 함께 묶은 것인데, 첫 번째 단락은 ’부활 팔일축제 내 금요일’의 복음으로 이미 들은 바 있다.

 

  요한복음 21장을 추가로 편집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자세히 살펴보면 추가편집의 이유가 오늘 복음에 해당하는 ①단락과 ②단락에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예수님을 이미 배반한 적이 있는 베드로(요한 18,15-18.25-27)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단의 으뜸으로, 그리고 초대교회의 수장(首長)으로 인정하고 내세우기 위해 부활하신 예수님과 베드로의 특별한 관계를 엮어주려는 의도가 깔려있다는 것이다. 만약 요한복음이 20장으로 끝난다면 어떨까? 그것은 마르코의 원복음이 16장 8절로 끝나는 경우와도 비슷할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사건이 하느님 편에서 볼 때는 지극히 당연한 하느님 능력의 결론이지만, 예수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장나는 줄 알았던 제자들 편에서 볼 때 부활은 이해하기 힘든 사건이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계속되는 부활예수의 발현과 이에 대한 제자들의 체험은 모든 것을 변화시켰다. 예수의 부활사건이 그들 신앙의 핵심으로 자리잡게 되면서 신앙이 곧 복음선포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마태오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전권을 받았다는 선언(28,18)과 복음선포의 지상명령(28,19-20)과 세상 끝날까지 제자들과 함께 계시겠다는 약속(28,20)으로 복음서를 마무리 지었다. 루가 또한 복음서의 마지막 부분을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내리는 마지막 분부로 끝맺고 있다. 루가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위에서 오는 능력을 받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라"(24,49)는 말씀을 끝으로 승천하시는데, 실제로 성령의 강림(사도 2,3)으로 능력을 받은 제자들이 교회공동체를 건설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예언직, 사제직, 왕직에 참여하는 활동상을 사도행전에 담았다. 그래서 마르코도 요한복음(20,11-18)을 참조하여 막달라 여자 마리아에게 대한 부활예수의 발현과 루가복음(24,13-35)을 참조하여 엠마오의 두 제자에게 대한 부활예수의 발현을 엮었고, 나아가 다른 기록들을 참고하여(마태 28,16-20; 루가 24,36-53; 요한 20,21-23; 사도 1,6-11) 제자들의 사명과 예수의 승천을 추가로 편집함으로써 차후 제자들이 해야 할 일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부활의 증인으로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공동체를 건설하는 것이 바로 마르코복음의 추가 편집자의 의도인 셈이다. 이렇게 볼 때, 모든 복음서는 그 마지막에 복음선포와 교회공동체 건설이 제자들에게 주어진 마지막 지상사명임을 굳건히 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은 20장에서 공관복음서들이 겨냥하는 목적, 즉 복음선포와 교회공동체 건설의 사명을 어느 정도 성취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시며 성령을 부어주시면서 죄인을 용서할 수 있는 전권을 주어 세상에 파견하시는 말씀(20,21-23)이 바로 그 부분이다. 토마의 불신앙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20,29)는 주님의 말씀이 글쎄 얼마나 효과적일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따라서 21장을 추가로 편집한 저자는 초대교회의 현실을 감안하여 복음선포와 교회공동체 건설에 구심점이 될 베드로의 역할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이 교회와 늘 함께 있을 것이라 해도 주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저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을 베드로를 통하여 보이게 하려는 것이다. 이 엄청난 역할을 베드로의 몫으로 돌리려는 것이다. 21장을 추가로 편집함에 있어서 20장과 연결이 매끄럽지 못한 점은 복음전체와의 구도상의 문제점으로 지적될 수도 있다. 요한복음 1장부터 20장을 집필한 원저자는 철저한 구도상의 논리를 중요시하였고, 시종 장고(長考)의 성찰(省察)과 명상(冥想)을 토대로 ’생명의 책’(20,30-31)을 완성하였다. 이제 21장을 편집하는 저자는 상징적이고 신비적인 표현을 통하여 부활예수와 베드로, 그리고 교회와의 긴밀한 삼각관계를 조명(照明)하고 있으며, 베드로를 부각시켜 부활예수와 교회의 일치를 도모하고 있다. 아울러 생명의 책인 요한복음이 예수와 베드로와 교회의 삼각관계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복음 21장은 교회론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동시에 그 가치가 높이 평가된다고 하겠다.

 

  21장의 무대를 갈릴래아(티베리아)로 옮긴 것은 제자들이 처음으로 예수를 만났던 장소가 바로 이곳이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첫 단락(1-14절)이 보여주는 고기잡이의 기적은 루가가 전하는 첫 제자의 소명사화(루가 5,1-11)와 매우 흡사한데 여기서 죄인임을 고백하는 시몬 베드로를 예수께서는 사람 낚는 어부로 뽑아 세우셨다. 베드로를 비롯한 일곱 제자가 배를 탔다고 했는데, 배는 교회를, 7이라는 숫자가 풍요와 완전(完全)을 뜻한다. 고기잡이에서 그들만의 수고는 헛되었지만 부활예수의 지시(指示)와 명령을 따름은 성취와 보람과 기쁨을 가져온다. 이 과정에서 베드로의 행동이 부각되고 그의 이름이 여러 번 거명되지만 그의 역할은 크게 강조할 것이 없다. 중요한 것은 고기잡이에서와 같이 교회의 모든 일이 예수의 뜻을 따를 때 성취된다는 것이며, 베드로는 이 점을 가슴과 머리에 새겨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①단락의 결론이다.

 

  둘째 단락(15-19절)에서는 베드로의 위치가 크게 강조된다. 세 번에 걸쳐 베드로에게 주어지는 사랑에 관한 예수님의 질문은 베드로의 심중(心中)에 있는 모든 것을 드러내게 한다. 우선 세 번이나 스승을 배반했던 배신자의 부끄러움이다.(요한 18,15-18.25-27) 자신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스승을 배반해야 했던 그 때의 상황은 마태오복음(26,69-75)에서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처음은 ’그냥’ 부인한다. 그 다음은 ’맹세까지 하면서’ 부인한다. 마지막으로는 ’거짓말이라면 처벌이라도 받겠다고 맹세하면서’ 부인한다. 이러한 기막힌 점층법의 기법으로 마태오는 배반자의 심중을 파헤치고 있는 것이다. 사랑에 관한 예수의 질문과 베드로의 대답은 상당한 주의력을 요구한다. 21장의 추가 편집자는 이 대목에서 ’사랑’이라는 단어를 조심스럽게 선별하고 있다. 이 단어를 주목하면 왜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세 번씩이나 사랑의 질문을 던지는지, 단지 베드로가 예수를 세 번 배반했기 때문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희랍어 원문성서를 보자. ① 질문: "아가파스 메?", 대답: "필로 세", ② 질문: "아가파스 메?", 대답: "필로 세", ③ 질문: "필레이스 메?", 대답: "필로 세". 문제는 아가페 사랑과 필로 사랑의 차이점이다. 예수께서는 두 번씩이나 베드로에게 "친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놓는" 실전의 사랑을 요구했다. 이는 돌아가시기 전날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고 내려주신 사랑의 새계명이었다.(요한 13,34: 여기서도 "아가파떼"가 엄선되었다.) 그러나 베드로의 대답은 그저 아름답고 고상한 사랑이었다. 베드로는 누구보다 자신을 잘 알고 있었다. 이제 예수님 앞에 더 이상 거짓을 말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베드로의 눈물은 사랑이 장담(壯談)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눈물이다. 이제 베드로는 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주님의 양떼를 잘 ’돌보는 것’임을, ’하나되게 하는 것’임을, 그리고 그 양떼를 위하여 언제라도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임을 말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교회의 수장(首長)으로 예수님을 따라 자신의 길을 가는 것이다.(19절)◆[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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