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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아시시의 프란치스코(1)
작성자박영희 쪽지 캡슐 작성일2004-04-27 조회수1,637 추천수9 반대(0) 신고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는 교회 안에서 뿐만 아니라 인류의 역사 안에서 가장 매력적인 사람중에 속한다.

 

그는 1181년에서 1182년 사이에 아시시에서 마침 아버지 피에트로 베르나르도네(Pietro Bernardone)가 집에 없을때 태어나 죠반니(Giovanni,세례자 요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이 이름은 고행과 가난, 기도와 사막을 연상케 했다. 그러나 프랑스 여행에서 돌아온 아버지에 의해 나중에 이 이름은 ’프란치스코(Francesco, 작은 프랑스 사람)’로 바뀐다. 이 이름은 아들이 좀 더 우아한 삶을 살게 되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뜻이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의 어린시절과 청소년 시절은 프란치스코란 이름에 어울리는 생활이었다. 소년은 축제와 휴가, 풍부한 물질과 삶의 기쁨, 시와 음악, 연애와 귀족적인 삶의 양식을 즐기면서 자라났다.

 

명예욕이 많았던 아버지는 아들이 좋은 교육을 받으며 좋은 인간관계 속에서 살아가도록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프란치스코는 본당에서 운영하는 학교를 다녔고 14세가 되자 충분하게 성장한 한 사람으로서 상인협회에 가입하여 충성서약을 했다. 가족이 제공해주는 풍부한 돈으로 주변에 많은 친구들을 둘 수 있었다.

 

노래하고 춤을 추면서 도시를 돌아다니던 ’춤단체’에서 주연급 역할을 하여 많은 젊은 아가씨들의 호감을 샀고, 종교적 축제나 세속적인 축제에 리더가 되어 대중들 앞에서 춤을 추었다.

 

1202년에 아시시가 경쟁도시이던 페루지아와 전쟁에 휘말렸을때 전투에 나선 그는 포로가 되어 아버지가 돈을 주고 자신을 구하기 까지 약 1년간 감옥에서 두려움과 의혹속에서 질병에 시달리며 기달려야 했다.

 

고충이 말이 아닌 감옥에서 그에게 서서히 그러나 지속적인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감옥에서 얻은 병으로부터 회복되자 마자 그는 병상에서 읽은 기사들의 생애에 관한 책들에 영향을 받아 이상적인 기사의 정신에 충만하여 브린네의 발터(Walter von Brienne)라는 모험가와 함께 전쟁터로 출발했다.

 

그러나 스폴레토(Spoleto)에서 "새로운 전쟁이나 일으키는 주인보다 더 높고 위대한 주인을 섬길 생각은 없느냐?" 라는 질문을 하는 소리를 들었다. 이러한 소리에 힘입은 그는 "모든 사람은 종에 지나지 않는다! 오직 한 분만이 주님이시다. 앞으로는 이분께 봉사하겠다" 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어떻게 봉사할 것인가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지만 "주인이 누구인가?" 는 알게 되었다. 그는 브린네의 발터를 포함한 그의 군대와 헤어져서 도중에 포기하고 돌아오는 그를 조롱하고 비난하기만 할 집으로 돌아왔다.

 

아시시에서 그는 다시 ’춤단체’ 의 리더가 되었다. 그러나 이후 일어난 여러가지 사건들이 그를 앞으로 살아가야 할 방향으로 인도해 갔다. 이제 그는 ’프란치스코’ 에서 ’죠반니’ 로 서서히 걸어가고 있었다.

 

당시 교회는 부유했고 부자와 권력을 쥔 사람들과 깊이 연계되어 있었다. 교회가 가진 세속적인 영화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복음서의 소박한 기쁜 소식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프란치스코는 이러한 교회와는 달리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가난한 삶을 살아가고픈 소망을 가지게 되었다. 로마로 여행을 하면서 그는 자신의 옷을 벗어 어느한 거지가 입고 있던 옷과 교환했다.

 

아시시로 돌아온 다음 사회로부터 소외된 나병환자를 만나 극심한 구역질을 불러일으키는 그의 외모에도 부구하고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이러한 것은 이전에는 거부감 때문에 도저히 할수 없는 행동이었으나, 이제는 ’영혼과 몸에 달콤함을 가져다 주는 행동’ 이 되었다. 그리스도를 가난한 사람들 안에서 알아보았고, 가난은 그의 ’여주인’ 이 되었다.

 

                    <영적 삶의 샘/요셉 봐이스마이어 外>발췌

 

 

프란치스코 성인이 불리움을 받는 장면입니다. 저도 그분께로 부터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과 같은 확고한 부르심은 아니었지만, 제 힘으로는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무력함에 내던져 졌을 때, 그분은 저를 손잡아 주셨습니다.

 

성인과 제가 다른 것은 무엇일까요? 성인은 어떠한 유보도 없이 복음서의 길을 따라 실천에 옮긴 것입니다. 저는 왜 그렇게 이유가 많고, 미꾸라지처럼 핑계를 대고 빠져나가게 될까요?

 

저마다 부를 쫓는데 혈안이 되어 있는 세상 풍조에서 볼 때, 성인은 주어진 부유함도 마다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가는 길로 들어섭니다.

 

"이 어리석은 자야, 바로 오늘 밤 네 영혼이 너에게서 떠나 가리라. 그러니 네가 쌓아 둔 것은 누구의 차지가 되겠느냐?"

 

이 성서 귀절이 현실에서 갖는 의미는 너무도 명백하다. 현대사회에서는 재산이나 소득을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안전" 이라는 말은 대체로 재정적인 안전을 의미 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 결과로 우리는 재산을 모으는데 급급하여우리의 노력과 시간의 대부분을 이를 위해 쓰게 된다.

 

우리의 문화 안에 스트레스에 관련된 병이 빈번한 것은 우리가 개인적으로뿐 아니라 집단적으로도 이 헛된 것을 추구하느라 모진 애를 쓰는 우리의 숨은 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징표이다.

 

이것은 끝도 없고 점점 심해지는 투쟁이며 어던 사람들은 문자 그대로 목숨까지 잃는다. 그 박의 사람들도 살아 있기는 하지만 자기 중심적 고정 관념 안에서 정신적으로 마비 상태에 있다.

 

우리는 우리의 심판이 바로 이 순간에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라는 경종을 듣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마음 안에서 성령에 의해 심판을 받고 있는 것이다.

 

만약에 우리가 소홀하여 우리 자신 안에 이미 현존하고 항상 열려 있는 천국에 들어 갈 수 없다면 이 얼마나 큰 비극인가!

 

                                        <용서> 편집

 

주님, 제가 당신을 주인으로 섬기기 보다는 재산, 학위, 특권, 명예 등에 집착해 온 삶들을 보면서 근본적인 무질서함을 보게 됩니다. 미래의 보장책으로 삼아 온 이러한 것들이 아무 소용이 없음을 보면서도 프란치스코 성인 처럼 완전히 자유로와지지 못할까요?

 

당신께 대한 사랑과 믿음과 용기가 없어서인 것 같습니다.

 

주님, 당신께 대한 더욱 뜨거운 사랑과 믿음과 용기를 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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