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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야곱의 우물을 나르며..(4부)♣
작성자조영숙 쪽지 캡슐 작성일2004-04-28 조회수1,148 추천수8 반대(0) 신고

 

    †   ♣야곱의 우물을 나르며..(4부)♣  †

 

 

여자의 몸으로 대형버스를 운전하면 얼마나 힘드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데 나는 힘들다고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내가 그리 씩씩하게 살아 갈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님이

살아계셨기 때문이었다.

 

단촐한 식구뿐이 없었던 영안실 장례식 장은 함께 근무하는

동료기사들의 밤 샘으로 외롭지 않았으며 가슴으로 운구를

메어주겠다고 장지까지 따라와서 위로해주었던 그 동료애를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끊이지 않는 레지오 팀들의

연도와 연령회의 봉사로 감동받은 가족들은 서서히

천주교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운전하면서 노인분들을 보기만해도 어머니 생각에 눈물을

떨구곤했던 두어달이 지나 7월 26일 ’안나’ 축일이 되었다.  

 

첫 축일에는 조안나 아이스크림을 나누면서 본명을 자랑도

하였지만 어머니가 떠나신지 두 달이 겨우 지났으니 그 해

축일은 슬픔에 잠긴 채 맞이 할 수 밖에 없었지만 나는

깨끗하고 정갈한 차림으로 새벽 미사에 참석하였다.

 

미사 중에 신부님께서 안나와 요아킴은 일어나라고 하시는데

혼자뿐이었다.  교우들의 박수 소리가 우뢰와 같이 들렸던

축일 아침을 평생 잊을 수 없게 만든 것은 그 날 저녁 태평양

건너 아름다운 나라에 사는 한 남자로부터 국제전화가

걸려왔기 때문이다.

 

이십여년간 가까이 지내던 형님께서 소개를 시켜주시겠다며

’참 좋은 사람인데..., 진국이라고 하던데...’하시며

지나가는 말씀으로 전해주셨지만 병환 중에 계신 어머님을

두고 미국으로 갈 수 없다는 내 뜻이 너무나 단호하였기

때문에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 다시 연락을 하셔서

전화연결을 시켜주셨다.

 

첫 통화에서 우리는 1시간 40분이란 긴 통화를 하면서

오래 전부터 알고 지냈던 사람처럼 스스럼없이 살아왔던

날들을, 살아가고픈 삶에 대해서 진솔하게 나누었다.

 

                             **

 

통화를 끝내고 새벽에 겨우 새우잠을 자고서 여름 휴가로

부산행 기차를 타러 종종걸음치는 나에게 핸드폰으르

그의 음성이 들렸다.  혹시 잠들어서 휴가 못떠났을까봐...

깨워준다면서...

 

나는 21세기를 살고 있음이 느껴짐은 물론 우리의 느낌이

서로 좋았음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 후 우리는

셀 수 없는 많은 전화통화와 편지로 사연을 주고 받다가

9월 말에 한국으로 나를 만나기 위해서 태평양을 건너

내게로 왔고 우리의 늦사랑은 젊은 나이 못지않게

뜨겁게 불타올랐다.

 

우리 둘이 함께 맞이하는 첫 성탄에 나는 그가 사는 미국

주소로 ’야곱의 우물’을 1년 구독 신청하였다.

 

다음해 2월. 해마다 발렌타인 데이가 돌아오면 힘겹게

살았던 날들을 잊지 않기 위해서 퇴직일로 정하고 동료

기사들에게 쵸코렛을 나눠주며 누나가 동생들을 두고

떠나는 마음으로 만 5년의 근무기간에 마침표를 찍었다.

 

몇 일뒤 방통대학을 졸업하고, 언니가 엘리사벳 이름으로

영세를받으셨다.  조카들은 예비자 교리반에 다니는 것을

보고 3월 10일에 뉴욕 케네디 공항을 밟았다.  

교리신학원은 미국까지 이어져 이곳에서 수료증을 받았다.

 

태평양을 건너면서 만감이 교차하는데...

내가 왜 버스 회사에서 5년간 세월을 보냈어야 했던가를

이해 할 수 있었다.  배낭 하나 메고 여자 홀로 30대에

유럽여행을 경험 하였기에 친정 식구들을 두고 고국을

떠나 오직 남편이 될 남자 하나만 바라보고 이국만리 머나

먼 나라로 떠나는 40대의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

 

20대에 그렇게 가고팠던 나라 미국이었지만 여자 혼자의

신분으로는 VISA를 받을 수 없음에 포기했던 꿈이 5년간

세금 실적으로 인터뷰없이 보름만에 비자가 내 손에

쥐어졌기 때문이었다.

 

성당 입구에 들어서며 모두들 목례만 하고 지나치는

그 분께 다가가서 소곤소곤 내 깊은 속 사정을 아뢰이던

3분 기도 또한 무슨 설명도 필요없이 주님의 손길로

내 가슴에 잔잔하게 전해져왔다.

 

 

※ 송봉모 신부님의 『고통 그 인간적인 것』中에서

 

 

요셉의 생은 어떤가?

형들의 질투를 사서 살해당할 뻔한 뒤, 열일곱 살이란 젊은 나이로

이집트에 노예로 끌려갔던 요셉.

 

노예생활 10년 뒤 상전의 아내를 겁탈하려 했다는 무고를 받아 강간

미수죄로 감옥에 들어가 무기수로 살아야 했다. 3년동안 옥살이를

한 후에 풀려나게 된 요셉의 고통스러웠던 생을 요셉은 어떻게 정리할까?

 

누구의 생이 더 고통스럽고 힘들게 보이는가?

아무리 야곱의 생이 비참하다 하더라도 요셉만큼 비극적인 것은 아니다.

야곱은 유랑생활을 하였지만 요셉처럼 노예생활을 한 것은 아니다.

 

야곱은 14년간이나 돈 한푼 받지 않고 일을 했지만 자유인이었고 옆에는

사랑스런 연인 라헬이 있었다. 하지만 요셉은 자유인이 아닌 종의 신분

으로 일했고 상전의 부인으로부터 성적 시달림을 받아야 했다.

나아가 요셉은 언제 풀려날지도 모르는 무기로서 감옥에서 살아야 했다.

 

이렇게 요셉의 생은 그의 아버지 야곱보다 더 고통스런 생이었지만,

창세기 본문을 읽어보면 요셉의 생은 봄날 순풍에 돛단배 가듯 평탄한

인생처럼 보인다.

 

아버지보다 훨씬 더 힘겨운 생이었는데도 축복받은 생처럼 보여진다.

이것은 무슨 까닭일까?

야곱의 집념과 요셉의 순종이 바로 그 이유이다.

 

야곱은 집념이 컸던 만큼 하느님께 대한 항복이 늦었다.

한편 요셉은 어떠한 처지에서든 하느님을 신뢰하고 순리대로 살아왔기

때문에 고통보다는 축복이 부각되는 것이다.

 

요셉은 전적으로 하느님께 의존하며 산 삶이다.

요셉은 한번도 생의 비극에 굴복해 본 적이 없다.

그는 어떠한 시련이 닥쳐와도 늘 하느님 안에 머물렀다.

 

고통 한가운데에서도 하느님이 당신 선의로 자기 삶을 이끌어 주리라고

믿었다. 요셉은 전적으로 하느님께 그 중심을 두었다.그가 무슨 이야기

를 할때에나 무슨 행위를 할 때에 ’하느님’이란 단어가 얼마나 자주

들어가는지 모른다.

 

(1)감옥에 함께 같혔던 파라오의 두 시종장이 꿈을 꾸고 나서

요셉에게 해몽을 청했을 때,

 

요셉은 "꿈을 푸는 것은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라고 (창세40,8)한다.

 

(2)파라오가 요셉에게 해몽해 달라고하자 요셉은 파라오에게,

 

"저에게 무슨 그런 힘이 있겠습니까? 폐하께 복된 말씀을 일러주실 이는

하느님뿐이십니다."(창세41,16)라고 대답한다.

 

(3)긴 세월이 지나서 다시 만나게 된 형들에게 요셉은 자기 정체를 밝히면서,

 

"하느님께서 우리의 목숨을 살리시려고 나를 형님들보다 앞서 이곳 이집트로

보낸 것입니다."(창세45,5)라고 말한다. 또 하느님 섭리를 강조하기 위하여 재차

"나를 이곳으로 보낸 것은 형님들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이십니다."(창세45,8)라고 한다.

 

(4)자기가 이집트의 통치자가 된 것은 파라오가 그를 재상으로 임명하였기에

 

그렇게 된 것인데, 형들에게는 "하느님께서는 나를 ..이집트 전국을

다스리는 자로 세워주셨습니다."(창세45,9)라고 말한다.

 

(5)야곱이 죽기 직전 요셉의 두 아들을 가리키면서 "얘들이 누구냐?"하고 묻자

 

요셉은 "얘들은 하느님께서 이곳에서 저에게 주신 제 아들들입니다."

(창세48,8-9)라고 대답한다.

 

이상의 예문들을 통해서 하느님을 향한 요셉의 신앙이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있다. 요셉은 자기 삶의 고통스런 자리에서 하느님이 함께하심을 믿었

던 인물이다.

 

하느님이 언제나 자기를 버리지 않으시고 돌본다는 것을 믿는 사람이다.

요셉과 같은 신앙을 가진 이에게는 인생의 어떤 고통도 힘겹지 않다.

그가 고통의 폭풍우 속을 지나갈 때 하느님께서 그와 함께하면서 당신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그를 지켜주시니 힘겨울 수가 없다.

 

그는 기쁨이든, 슬픔이든, 편안함이든, 고통이든, 항상 하느님과 함께하기

에 어려움이 어려움으로 끝나지 않는다.

 

어떻게 한 신앙인의 마음과 삶 속에 있는 하느님의 현존을 알 수 있을까?

 

그것은 그 사람이 누리는 평화로움으로 알 수 있다. 하느님을 마음속에

모시고 사는 사람은 커다란 평화 속에 살며 어떠한 시련 속에서도 평화

잃지 않는다. 우리는 이런 사람을 만날 때 그를 통해서 더 위대한 존재를

느끼게 된다.

 

요셉은

바오로 사도가 한 말씀 그대로 고통을 통해서 적극적 열매를 딴 사람이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작용해서 좋은 결과를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로마8,28)

 

고통의 적극적 열매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것은 아니다.

바오로 사도는 분명히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만사는 좋은 결과를

이룬다고 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서 "사랑하는"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동사는 계속적인 행위를 나타내는 현재 시제이다.

 

고통을 당하는 동안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의 모든 체험이 구원적이고 신학적이라는 말이다.

 

오늘도 낙선된 안나의 신앙수기를 읽고 가시는 분들께

하느님의 평화를 마음껏 빌어보는...

 

안나가 가요*^^*

 

☞ 시모님께 다녀오느라 조금 늦은 시간에 올리게 되었습니다.((^_ _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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