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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Never ending story
작성자이인옥 쪽지 캡슐 작성일2004-05-01 조회수1,378 추천수8 반대(0) 신고

수메르 신화에서는 물의 신인 엔키가 바람둥이로 나온다. 물과 대지(닌마라는 여신)과의 결합으로 대지는 풍요로와 지고, 푸른 초목(딸인 닌샤르)이 태어난다. 그런데 그 초목도 물이 없으면 한시도 살 수가 없으므로 다시 딸 닌샤르와 아버지 신인 엔키(물)는 지속적인 결합을 하게 되는 것이다. 또 물은 한 곳에 정착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흘러가는 것으로서 그와 같은 성격을 바람둥이로 표현하고 있다.

 

창세기 1장은 한 처음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분은 하느님이시라고 한다.(1절) 여기에서의 하늘과 땅은 어떤 꼴이 갖추어져 있는 하늘과 땅이 아니라 셈족의 언어 관습으로서 ’하늘과 땅’이라는 합성어는 바로 ’세상 모든 것’이라는 뜻이다. 이제부터 이야기하려는 창조 이야기의 서막이라 하겠다.

 

그래서 아직은 아무 일도 시작되기 전,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물위를 감돌고 있었다(chaos=혼돈의 상태). 수메르 신화에서는 맨 처음 세상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았고 오직 심연인 남무(Nammu) 뿐이었다. 그러나 창세기는 심연을 덮고 있는 것은 어둠이지만, 그 이전에 하느님이 계셨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수메르 신화에선 심연에게서 하늘과 땅이 탄생하는데 비해, 창세기는 하느님은 먼저 빛을 만드시고 빛과 어둠을 갈라 빛을 낮이라 부르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신다. 그 모두가 한마디 말씀으로 이루어진다. (세상이라는 무대를 설치하기 위해 먼저 조명장치를 켜는 듯하다^^)

 

6절: 둘째 날, 하느님께서는 혼돈의 물 한가운데 궁창을 만들어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을 갈라놓으신다. 하느님께서는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셨다. 이제 비로소 하늘이 생긴 것이다.(8절)[참고: 공동번역: ’창공’=새번역: ’궁창’]

 

고대 사람들이 생각했던 세상은 모두 물로 뒤덮여있는 세상이었다. 창세기의 저자들도 그 시대 사람들로서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덮고 있는 그 물을 윗물과 아랫물로 갈라놓고 마치 대접(큰 종?)을 엎어놓은 것처럼 커다랗고 단단한 둥근 것(=궁창)으로 윗물을 바쳐놓았다고 생각했다. 가끔 하느님은 그 궁창의 문들을 열어놓아서 비가 오게 하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그 궁창에 별과 달과 해를 걸어놓았다고 생각했다.

 

고대 다른 지역의 신화와 다른 것은 하늘, 대지, 물, 별, 달, 해...산천초목, 동물들.... 아니 세상 만물이 저마다 신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 하느님의 피조물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신들의 성적 결합이나 투쟁에 의해 창조한 것이 아닌 ’말씀’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것도 창세기에서만 볼 수 있는 고유한 특징이다. 또 그렇게 창조된 모든 것은 선하고 아름답고 좋았다는 것이다.(=보시니 좋았다) 창세기 창조설화가 말하고 싶은 것이 바로 그것이다.

 

당시에 다른 나라의 신화들을 훤히 알고 있었던 성서의 저자들은 그 신화의 재료들을 끌어들여 자기가 믿고 있는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 세상은 어떤 것인가를 설명하는 것이지, 하느님이 어떤 순서에 의해 어떤 과정으로 얼마나 시간을 들여 만들었나 하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창세기를 보며 진화가 어쩌니 과학적으로 맞니 틀리니 하는 것은 창세기를 이해못하는 소치일 것이다.

 

이제 인간의 창조에 대한 창세기 저자의 생각을 들어본다.

창세기의 하느님은 모든 것을 말씀으로 창조하신다는 것 즉 다른 신들과의 투쟁이나 성 관계를 통해서 창조하시는 분이 아니심을 알았다. 또한 그분의 작품인 세상 천지 만물은 투쟁의 결과나 불륜의 관계에서 예측 불허로 튀쳐나온 악의(?) 산물이 아니라 모두가 하느님의 섭리와 질서에 따라서 창조된 선하고 조화로운 피조물들임도 알았다.

 

메소포타미아와 그리스 등의 신화에선 인간은 신의 고된 노역(勞役)을 해결할 목적으로 창조되었고, 자연 만물보다 열등한 존재로 창조되었다. 그러나 창세기의 인간 창조는 모든 만물의 정점에 있는 가장 선하고 아름다운 존재이다.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 하신 후, "보시니 참 좋았다"라는 최고의 찬사를 보내신다. (원문엔 인간 창조 후에만 ’참’이 더 붙는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존재로 창조된다. 고대 동방에서 신의 모상은 통치자의 신분을 상징하는 것으로 왕과 같은 지위를 가리켰다.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된 인간은 지상에 세워진 하느님의 대리자로서 자연 만물이 번성할 수 있도록 보호하고 다스려야 할 임무가 주어진다. 창세기의 인간은 바로 그 목적으로 창조된 것이다.

 

인간은 남자와 여자로 창조되었는데, 둘다 똑같이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된 존재로서 평등하게 지음 받았다.(1,27)

 

창세기 2장의 저자는(1장의 저자와 다르다) 세상 만물보다 인간을 먼저 창조하셨다고 말하는데 창세기 1장과 순서는 다르지만 모든 천지 만물이 인간을 중심으로 창조된다는 점이 공통점이다. 1장은 인간이 살 수 있는 조건이 먼저 창조 된 후에, 그리고 2장은 인간에게 좋은 환경을 하나씩 덧붙여주는 방식이다. 두 설화가 모두 인간을 가장 뛰어난 하느님의 걸작품으로 보고 있다는 것과 하느님은 인간을 가장 친밀하고 귀하게 여기는 존재였음(동산을 거니는 친구처럼...)을 강조하고 있다.

 

창세기 2장의 설화도 여자와 남자는 서로 ’거들짝’으로 보완과 협력의 관계라는 것과 ’뼈에서 나온 뼈, 살에서 나온 살’로서 한 몸(일치)를 이루어야 하는 상대라고 한다. 남자가 여자의 갈비뼈에서 나왔다는 말은 해석이 구구하지만, 아랍인들에게 있어 ’갈빗대’는 절친한 친구를 나타내는 말이고, 수메르어로 갈빗대라는 말은 생명이라는 뜻이 들어있다. 아니면 갈빗대가 허파와 심장을 보호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때문이라는 의미를 찾기도 한다.

 

우스개 소리로는 여자가 남자의 머리에서 나왔다면 남자의 머리 꼭대기에 있으려 할 것이고, 발에서 나왔다면 남자는 여자를 발로 짓뭉개려 할 것이라, 딱 중앙 갈비뼈를 선택하셨다는 말도 있다.(믿거나 말거나...) 여권운동 하는 사람들은 남자는 흙으로 만들고 여자는 뼈로 만들었기 때문에 품질이 더 우수하다고도 한다. ^^(토기보다 본 차이나가 더 비쌈 ^^)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창세기 2장은 사실 3장을 준비하는 역할도 하고 있어서 인간이 범죄하기 전의 하느님이 태초에 지으신 세상은 하느님과 인간, 남자와 여자(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만물의 관계가 지극히 조화로운 세상이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배경이 된다.

 

창세기 2장-3장은 야휘스트라 불리우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번화했던 솔로몬 시대의 저자들에 의해서 쓰여졌다. 솔로몬 시대에는 주변국들과의 교역이 활발했던 시기이고, 문학 창작 활동이 꽃을 피웠던 시기이다. 당연히 외국의 문학이나 문물, 풍습들을 수집하고 연구하던 이들도 있었고 궁중학교에서는 현자들이 상류 계층의 자녀들에게 자기 나라의 전통들은 물론, 다른 나라의 언어나 종교, 관습들도 가르쳤다.

 

바로 이 대목을 쓰고 있는 최초의 성서 저자인 야휘스트들이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의 상당 부분을 기록하게 된 것도 이런 시대적 상황과 연관이 있다. 그들은 어느정도 주변국의 신화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야휘스트들은 주변국의 신화들 안에서 어떤 재료들을 끄집어 내서 주변국들이 알고 있는 신관, 인간관, 세상관과는 전혀 다른 야훼 하느님과 인간과 세상에 대한 그분의 섭리를 설명하고자 한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지으시고. 에덴 동산이라는 곳으로 사람을 데려다 놓으셨다고 한다. 사람을 동산으로 데리고 온 목적은 ’그곳을 일구고 돌보게’(2, 15)하기 위함이었다.

 

처음부터 노동은 인간에게 고역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다른 신화에서 보는 것처럼 신의 노역을 줄이기 위해, 고된 일을 시키기 위해서 사람을 만들었다는 노동에 관한 부정적 의미는 담겨있지 않다.

 

왜냐하면 하느님 자신이 노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흙으로 사람을 빚고 온갖 것을 손으로 직접 만드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그것을 즐겁게 하신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 주리라’고 하시며 당신 스스로 온갖 짐승과 온갖 새를 빚으신다. 즉 인간을 위해 노동을 마다 않으시고 기뻐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신 것이다.

 

그분은 인간의 기쁨을 위해 모든 동물들을 하나 하나 빚어 인간에게 데려다 주며, 그 동물들은 인간의 협력자라는 것을 주지시킨다. (공동번역엔 ’거들짝’) 더구나 동물에게 이름을 하나 하나 붙여주는 일을 사람에게 맡기신다. 고대에서 이름을 붙여준다는 것은 그들에 대한 관리의 권한을 인정한다는 말이 된다.

 

창세기 1장 28절처럼 명확하게 ’지배하고.. 다스리라’는 말은 안하셨으나, 이름을 붙이는 행위가 바로 같은 의미이다. 그리고 에덴을 ’일구고 돌보게’(2,15) 하시는 것도 하느님의 행위 즉 에덴을 꾸미고(8절), 나무를 자라게(9절)하시는 일(노동)을 이어받는 행위이다. 그러니까 창세기 1장의 제관계 저자들이 이야기하는 하느님의 지상 대리자(1,26절)의 역할을 하라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하느님은 동물을 인간의 협력자로 빚어주셨으나, 가장 완벽한 협력자는 바로 여자이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에게 완벽한 거들짝으로서, 이 둘은 본래 둘이 아닌 한몸에 기원을 두고 있는 것이다.(갈비뼈에서의 탄생을 상기하자)

 

여기서 남자는 여자에게는 이름을 붙여주지 않았다는 사실도 주목해보아야 할 대목이다. 남자가 여자에게 ’하와’라는 이름을 붙여주는 것은 3, 28에 비로소 나온다. 즉 그둘의 근본적 관계는 엄밀하게 따져서 범죄 이전엔 협조자이지, 종속의 관계가 아니었다.

 

인간의 죄는 여자와 남자의 관계뿐 아니라 모든 조화로운 관계를 깨뜨렸다. 먼저는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깨뜨리고 나아가서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 인간과 자연만물(땅, 동물)의 조화를 깨뜨렸다.

 

범죄 이전엔 ’뼈에서 나온 뼈, 살에서 나온 살’이라는 감탄이 절로 나오던 둘의 관계는 ’여자가 따줘서 먹었다’는 책임전가, 더 나아가  ’당신이 짝지어 주신 여자’라는 하느님께 대한 책임전가까지(12절) 확대된다. 그것은 다시 여자가 뱀에게 책임을 전가하면서 동물에게까지 이어지고 그 모든 책임을 물어 하느님은 땅을 저주하신다. 과거의 조화롭던 관계는 깨어져버리는 것이다. (나는 이 장면에서, 아이들이 비칠거리며 걷다가 넘어지면 땅을 때리며 야단을 치는 엄마의 모습이 연상된다. 아이는 그 엄마의 모습으로 위로받고 울음을 뚝 그치고 일어나기 마련이다.)

 

야휘스트는 어떻든 이 세상이 왜 이렇게 힘들고 고생스러운지를 설명해주어야 했다. 이제 본래의 창조의 모습을 잃어버린 부조화한 세상에서는 노동과 출산의 의미도 변질되고 만다. 여자는 남자에게 종속된 삶을 살며, 남자는 고생을 하며 땅을 일궈야하고, 여자는 해산의 고통을 겪어야 하는 부정적인 것으로 의미가 바뀐다. 이미 세상에 벌어지고 있는 부정적인 현실의 원인으로 성서저자는 그것이 하느님에게서 연유된 것이 아닌 인간에게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원인론적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범죄 이전엔 그런 일들이 없었다기 보다는 의미가 변화되었다는 것으로 알아듣는 것이 훨씬 성서저자의 의도에 접근하는 것이다. 즉 이전엔 창조적이고 즐거웠던 일들이 범죄 이후엔  고생스럽고 저주스러운 의미로 변질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죄의 결과이고, 저주라는 것이다.

 

야휘스트가 말하고 싶은 죽음의 의미 역시, 처음부터 하느님은 인간이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도록 막은 분이 아니었다. 생명나무는 동산에 있어 늘 먹을 수 있는 과실이었고, 그 나무는 금지한 바 없었다. 다른 나라 신화에서는 처음부터 터부였다는 것도 다르다.

 

그러나 인간이 자기 자신의 적나라한 모습(약점, 한계)을 부끄럽게 여기게 되었을 때(즉 그 이전엔 자신의 한계와 결함을 알고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인정했다는 뜻도 된다), 이제는 모든 관계가 손상되어버려 인간에게 영원히 산다는 것이 오히려 고통이 되는 상황이다. 끝도없는 고통의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의 상황, 만일 그곳에서 영원히 살 수밖에 없다면 그것이야말로 지옥인 것이다.(지옥은 에덴의 반대개념이다)

 

그런데 이 비참한 결과를 만든 인간을 하느님은 어떻게 다루셨는가?

그분은 인간이 자신의 수치를 가려보려고 마련한 허술한 나뭇잎을 거둬내지 않으시고 튼튼한 가죽옷을 입혀주시는 분이다. 그분은 생명나무를 따먹지 못하도록 에덴에서 내보내시어 영원한 고통의 상태에서 해방시키신다.

 

그러므로 창세기 2-3장을 쓴 야휘스트는 죽음이란 것은 하느님이 주신 마지막 선물로 보는 것이다. 다른 신화에서 보듯이 인간이 신이 되지 못하도록 끝까지 방해하는 하나의 장치로 불칼을 들고 지키시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야휘스트가 미처 내다보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나무>이다.

 

구약의 전 역사는 하느님이 인간을 찾으시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분이 아담과 카인을 찾는 목소리는 인류 역사상 끊임없이 지속된다. 그분이 마침내 인간을 찾아 몸소 에덴의 동쪽으로 들어오셨고, 낙원-하느님 나라-을 이 세상 안에서 부터 꾸밀 것을 몸소 가르치셨다.

 

그분은 당신의 목숨을 생명나무로 이 낙원 안에 심어주셨다. 그러나 아직 낙원은 낙원이 아니다. 낙원을 일구고 돌보는 사명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다시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나무!

그것이 이제 우리가 마지막으로 따 먹어야할 <생명 나무>이다. 그 나무의 열매인 사랑과 희생을 매일처럼 따먹어야만 부활에 이르는 영원한 생명이 우리에게 보장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담과 하와가 잃어버린 낙원으로 이제 우리는 들어가야한다. 그것을 위해 그분은 우리를 찾아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의 에덴에서 가출하셨다. 우리 모두를 데리고 가기 위해 그분은 여기 우리와 함께 있다.

 

이렇듯 한 처음부터 시작된 하느님의 사랑은

한순간도 그칠줄 모르고 지속되고 있다.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ps. 오늘 독서는 창세기의 첫번째 창조이야기입니다. 대학 다니는 딸이 학교에서 여러나라의 ’신화’를 배우고 와서는 성서의 창세기와 아주 흡사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어떤 차이점이 있냐고 물어서 2시간 동안 딸에게 설명해준 이야기를 글로 정리해보았습니다. "성서 안에 그렇게 깊은 뜻이 있는 줄은 몰랐다"며 우리 하느님이 너무 멋진 분이라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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