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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산책(부활4주간 화요일)
작성자박상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4-05-04 조회수1,484 추천수11 반대(0) 신고

◎ 2004년 5월 4일 (화) - 부활 제4주간 화요일

 

[오늘의 복음]  요한 10,22-30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

 

  22) 때는 겨울이었다. 예루살렘에서는 봉헌절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23) 예수께서는 성전 구내에 있는 솔로몬 행각을 거닐고 계셨는데 24) 유다인들이 예수를 둘러싸고 "당신은 얼마나 더 오래 우리의 마음을 조이게 할 작정입니까? 당신이 정말 그리스도라면 그렇다고 분명히 말해 주시오" 하고 말하였다. 25) 그러자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이미 말했는데도 너희는 내 말을 믿지 않는구나.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바로 나를 증명해 준다. 26) 그러나 너희는 내 양이 아니기 때문에 나를 믿지 않는다. 27)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라온다. 28)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래서 그들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고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29) 아버지께서 내게 맡겨 주신 것은 무엇보다도 소중하다. 아무도 그것을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30)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복음산책]  확증과 믿음은 별개의 것이다.

 

  오늘 복음을 포함한 요한 복음 10,22-42는 예수의 신성(神聖)에 관한 유다인과의 논쟁을 보도하고 있다. 이 논쟁보도는 앞서간 ’목자와 문’과 ’착한 목자와 양’의 비유말씀(10,1-21)과 비교해 볼 때, 장소는 같은 예루살렘을 무대로 삼고 있지만 시기적으로는 바로 연결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늘 복음의 도입부인 22절이 밝히고 있듯이 논쟁의 시점은 성전 봉헌절 축제기간이며 계절은 겨울철이다. 반면에 비유말씀은 요한복음 7,10이 보도하는 초막절 축제기간 중에 행해진 말씀이다. 따라서 요한복음 7,10-10,21의 보도는 시기적으로 봉헌절보다 2달 정도 빠른 초막절에 속한다. 성전 봉헌절은 기원전 165년 기슬레우 달(12월)에 유다 마카베오가 시리아의 왕 안티오쿠스 4세(기원전 175-164년)에 의해 더럽혀진 예루살렘 성전을 탈환하여 성전을 정화하고 번제(燔祭) 제단을 세워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축제이다. 유다인들은 이 축제를 일주일간 계속 지냈으며, 초막절과 비슷한 전례의식들을 거행하였다.(2마카 1,9; 10,6 참조) 그러나 전체 구조상의 논리성은 상당히 면밀하여 착한 목자를 주제로 한 그리스도론은 일관성 있게 추구되고 있다.

 

  시간은 흘러 예루살렘 성전 봉헌절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성전 구내에 있는 솔로몬 행각(주랑)을 거닐고 계셨다. 계절적으로 시간만 흐른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예수께서 더 이상 시간을 끌지 말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혀주기를 재촉한다. "당신은 얼마나 더 오래 우리의 마음을 조이게 할 작정입니까? 당신이 정말 그리스도라면 그렇다고 분명히 말해 주시오."(24절) 예수께서는 "내가 이미 말했는데도 너희는 내 말을 믿지 않는구나.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바로 나를 증명해 준다"고 대답하신다.(25절) 그렇다. 예수께서는 지금까지 누누이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고, 아버지께서 자기를 파견하셨으며, 종말론적 계시자임을 언급하셨을 뿐 아니라(5,17; 5,38; 6,36; 8,54 등 참조), 이 언명(言明)을 입증할 수 있는 수많은 업적을 행하셨다. 예수께서 자신의 입으로 직접 메시아이심을 밝힌 적은 요한복음에 딱 한 번 나온다. 그것은 예수께서 사마리아 지방 시카르에서 한 여인이 "그리스도라 하는 메시아가 오실 것을 알고 있다"는 말에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 라고 대답하신 부분이다.(4,25-26)

 

  유다인들은 그러나 메시아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그것은 그들이 예수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 유다인들이 예수를 불신(不信)하는 이유로 예수께서는 ’목자와 양’의 비유말씀을 재삼 언급하신다. "너희는 내 양이 아니기 때문에 나를 믿지 않으며,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26-27절) 한 목자에게 속한 양들이 그 주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 것과 양들이 자기 주인이 아닌 다른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뿐만 아니라 주인의 목소리를 알아들은 양들이 주인의 말을 따라 행동할 것은 뻔한 일이다. 달리 말하자면 양들이 주인을 믿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듣다’와 ’믿다’의 상호관계가 부각된다. 즉 믿음은 들음의 결과이며, 들음은 믿음의 원인이다. 유다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자세가 되어있지 않았고, 그 결과 예수께 대한 믿음을 얻을 수 없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귀기울이고 이를 받아들이려하기보다는 예수가 그리스도인지 아닌지에 대한 확증을 먼저 손에 쥐려했던 것이다.(24절) 확증을 손에 쥐고 그 다음에 믿겠다는 심산(心算)이다. 누누이 말하지만 확증과 믿음은 별개의 것이다. 자명한 사실을 두고는 믿음을 거론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30절)라는 말씀은 유다인들뿐 아니라 우리들에게도 어렵게 들린다. 예수님 편에서 볼 때 그분이 그리스도이시고 아버지와 하나이심은 토론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나 우리들 편에서는 믿음이 따라야 하는 차원의 문제이다. 그래서 믿음은 고귀한 것이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자신을 ’아버지와 아들이 이루는 일치의 공동체’로 내어 맡길 때, 즉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자세를 갖출 때 그 뜻을 조금씩 깨닫게 될 것이다.◆[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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