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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산책(부활 제5주일)
작성자박상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4-05-09 조회수1,240 추천수7 반대(0) 신고

◎ 2004년 5월 9일 (일) - 부활 제5주일 (다해)

 

[오늘의 복음]  요한 13,31-33a.34-35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겠다. 서로 사랑하여라.>

 

  31) 유다가 나간 뒤에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영광을 받게 되었고 또 사람의 아들로 말미암아 하느님께서도 영광을 받으시게 되었다. 32)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신다면 하느님께서도 몸소 사람의 아들에게 영광을 주실 것이다. 아니, 이제 곧 주실 것이다. 33) 나의 사랑하는 제자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있는 것도 이제 잠시뿐이다. [내가 가면 너희는 나를 찾아다닐 것이다. 일찍이 유다인들에게 말한 대로 이제 너희에게도 말하거니와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34) 나는 너희에게 새계명을 주겠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복음산책]  사랑의 새계명, 그 정체는 무엇인가?

 

  부활 제5주일에 봉독되는 오늘의 복음은 요한복음 제2부(13-21장)에 속한다. 좀더 자세히 말하면 예수님의 긴 고별사(13-17장) 안에 위치하고 있다. 요한복음 제1부가 세상을 향한 예수님의 자기계시(自己啓示)라면, 제2부는 예수님 공생활의 결론이다. 오늘 복음에는 그 결론의 핵심이 들어있다. 바로 새계명으로 주어진 사랑의 계명이다. 예수께서는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겠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34절) 하고 말씀하셨다. 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전수(傳受)하시려는 이 계명이 새계명일까? 어떤 면이 새롭다는 것인가? 그리고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은 도대체 어떤 사랑인가? 따라서 오늘 이 새계명을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랑의 계명이라면 희랍의 현자들도 논리적 구조 속에서 서로 다른 가치의 사랑을 알고 있었고, 구약성서도 하느님을 사랑하는 만큼 사랑 받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우선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태도를 공관복음에 비추어 보자. 예수께서도 구약의 계명을 반복하여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는 계명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신명 6,4-5)이며, 이에 못지 않은 둘째 계명은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는 것"(레위 19,18)이라고 하셨다.(마태 22,39; 마르 12,30-31) 그런데 예수께서 보신 유다인들의 이웃사랑이란 "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는 사랑"(마태 5,43)이었다. 따라서 예수께서 전수하시려는 사랑의 새계명은 자기를 미워하고 해를 입히려는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도 기도하는 사랑이다.(마태 5,44; 루가 6,35) 이 점이 바로 예수께서 설파하시는 사랑의 새로운 국면이다. 이 계명은 단순히 이론적인 것이 하니라 아주 구체적이다. 이 사랑을 위해 예수께서 자기 목숨까지도 내어놓을 그런 사랑인 것이다. 그래서 새계명인 것이다. 이제 요한복음이 전하는 사랑의 새계명을 다시금 잘 살펴보자. 이 사랑의 계명 속에는 사랑의 대상과 사랑의 방법, 그리고 사랑의 결과가 들어있다. 사랑의 대상은 우선 제자들 서로간이며, 방법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사랑하신 것과 같은 방법이며, 사랑의 결과는 세상사람들이 그 사랑을 통해서 제자들을 다름 아닌 예수님의 제자로 알아보게 되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차원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① 예수께서 서로 사랑하라 하심은 공관복음에는 없는 새로움이다. 이는 사랑하는 행위의 주체와 사랑 받는 객체를 따로 정한 것이 아니라 주체와 객체를 한데 묶어 ’상호간’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상호간의 범주 안에 스승을 팔아 넘기기 위해 이미 고별식장을 떠난(31절) 유다는 제외되는가? 오늘 복음의 앞서간 대목을 살펴보면 꼭 그렇다고 말할 수 없다. 예수께서는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실 때가 된 것을 아시고 사랑하시던 제자들을 더욱 극진히 사랑해 주시려는 마음을 모두 담아 12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다. 그 곳에는 배반자 유다의 발까지도 포함되어 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랑의 새계명이 비록 유다가 없는 자리에서 언급되었지만, 그가 없는 자리이기 때문에 더욱 더 설득력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새계명의 사랑에는 유다는 물론 모든 원수까지도 그 대상으로 포함된다. 아울러 배반자와 원수들이 ’상호간’의 사랑을 깨달을지는 의문으로 남는다.

 

  ② 사랑의 방법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사랑하신 것과 같은  방법으로서 제자들 모두의 발을 씻겨주신 것은 물론이고, 이들을 위해 목숨까지 내어놓는 사랑이다. 이 사랑 때문에 예수께서는 수난도 고통도 죽음도 기꺼이 받아들이시는 것이다. 우리가 요한복음을 제1부와 제2부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 구분하는 것은 단지 편의상의 구분이다. 제1부 세상을 향한 예수님 자기계시의 핵심적인 내용을 제2부 예수님 공생활의 결론이자 핵심인 사랑의 새계명에 연결시킨다면 제자들을 사랑하시는 예수님은 곧 하느님 자신이시다. 즉, 하느님 스스로가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결국 하느님 스스로가 철저하게 자신을 비우고 사람의 생명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는 것이 하느님 사랑의 방법이다. 따라서 제자들 상호간은 물론,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런 사랑의 방법으로 서로간에 사랑을 구현해야 하는 것이다.

 

  ③ 사랑의 결과에 대하여는 사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각할 바가 아니다. 사랑이 어떤 결과를 바라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호간의 사랑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알아둘 필요는 있다. 이 사랑은 예수님도 하느님도 모르는 세상에 이분들을 알려주는 결과를 초래한다. 물론 긍정적인 결과를 말한다. 이 말은 제자들 상호간에 새계명의 사랑이 제대로 구현되지 못할 때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음을 뜻한다. 동시에 이 사랑의 결과로 세상에 하느님을 알려주는 것 외에는 어떤 것도 바라지 말아야 함을 의미한다. 이 사랑은 보상을 바라고 실천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사랑의 보상을 기대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사랑에 조건을 달지 말아야 하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하지만 우리 인간들의 사랑은 이 원리를 자주 망각한다. 얼마나 많은 조건과 목적이 달려있고 달콤한 보상을 기대하고 있는가 말이다. 새계명의 사랑은 오히려 처절한 고통과 박해, 목숨까지 내어놓는 철저한 자기비움과 희생을 수반한다. 보상이 있다면 그것은 이 모든 것을 기쁘게 받아들이면서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느님이심을 세상에 알리는 일이다. 예수께서 그랬듯이 말이다. 그리고 하늘에서 승리의 월계관을 쓰고 있는 우리 교회의 수많은 순교자들이 그랬듯이 말이다.◆[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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