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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산책(부활6주간 화요일)
작성자박상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4-05-18 조회수1,346 추천수11 반대(0) 신고

◎ 2004년 5월 18일 (화) - 부활 제6주간 화요일

 

[오늘의 복음]  요한 16,5-11

<내가 떠나가지 않으면 그 협조자가 너희에게 오시지 않을 것이다.>

 

  5) "나는 지금 나를 보내신 분에게 돌아간다. 그런데도 너희는 어디로 가느냐고 묻기는커녕 6) 오히려 내가 한 말 때문에 모두 슬픔에 잠겨 있다. 7) 그러나 사실은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는 더 유익하다. 내가 떠나가지 않으면 그 협조자가 너희에게 오시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보내겠다. 8) 그분이 오시면 죄와 정의와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꾸짖어 바로잡아 주실 것이다. 9) 그분은 나를 믿지 않은 것이 바로 죄라고 지적하실 것이며 10) 내가 아버지께 돌아가고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 하느님의 정의를 나타내시는 것이라고 가르치실 것이고 11) 이 세상의 권력자가 이미 심판을 받았다는 사실로써 정말 심판을 받을 자가 누구인지를 보여 주실 것이다."◆

 

[복음산책]  예수님의 떠남으로 오시는 성령

 

  오늘 복음의 역점은 예수께서 떠나야 하심으로 말미암아 슬픔에 잠긴 제자들을 격려하려는 데 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떠남이 제자들에게 더 유익한 즉, 떠남이 없이는 성령의 오심이 이루어질 수 없음을 강조하시면서, 오시는 성령의 구체적인 업무(業務)를 밝히신다. 아울러 "나는 지금 나를 보내신 분에게 돌아간다"(5절)고 말씀하심으로써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머물러 계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암시하신다. 이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은 사실 모두에게 중요하다. 예수께서 ’가신다’는 암시는 공생활 중에도 여러 번 하신 바 있다. 초막절을 맞아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 상경하신 예수께서는 성전에서 "내가 아직 얼마동안은 너희와 함께 있겠지만 결국 나를 보내신 분에게 돌아가야 한다"(7,33)고 가르치셨다. 또 간음한 여인의 죄를 용서해 주신 그 자리에서 자신을 세상의 빛으로 계시하시고 난 뒤 "나는 간다. 그리고 당신들은 나를 찾을 것이며, 내가 가는 곳에 당신들은 올 수 없다"(8,21)고 하셨다. 이 두 경우는 예수께서 곧 가시게 됨으로써 세상에 남아 있는 시간의 절박함을 나타내고 있다. 이는 세상에 대한 예수님의 경고로서 예수께서 아직 머무는 동안 세상의 사람들은 믿음의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 순간을 놓치면 다시는 기회가 없다는 말이다. 따라서 세상은 예수님을 볼 수 있는 이 마지막 시간에 예수께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고별사(13-17장)에서도 ’나는 간다’는 말씀은 여러 번 등장한다. 예수께서는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실 때가 된 것을 아시고"(13,1) 최후의 만찬을 마련하셔서 고별사를 시작하셨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에도 예수께서는 "나의 사랑하는 제자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있는 것도 이제 잠시 뿐이다. 내가 가면 너희는 나를 찾아다닐 것이다. 일찍이 유다인들에게 말한 대로 이제 너희에게도 말하거니와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13,33)고 하셨다. 공생활 중에 언급한 말씀들이(7,33; 8,21) 믿음의 결단을 요구한다면, 여기서는 목전에 다가와 있는 예수님의 죽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제자들이 ’어디로 가느냐’는 질문을 하지 않았다고 하시는 데(16,5), 사실은 제자들이 두 번이나 질문을 했었다. 가신다는 말씀과 함께 사랑의 새계명이 선포되었을 때 시몬 베드로가 "주님 어디로 가시겠습니까?"(13,36) 라고 질문을 했으며, 예수께서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14,4)고 하셨을 때 토마스도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 하고 질문하였다. 그렇다면 왜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어디로 가느냐’고 묻지 않았다고 하시는 것일까? 요한복음사가가 예수님의 2차 고별사(15-17장)를 추가로 편집할 때 앞서간 1차 고별사(13-14장)의 내용을 무시했을 리는 없다. 결국 복음서 저자는 예수께서 ’가시는 것’의 또 다른 의미를 주고자 의도하고 있는 것이다. 첫 번째 ’가심’이 예수님의 죽음을 의미한다면, 두 번째 ’가심’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승천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의 ’가심’은 제자들에게 슬픔과 두려움을 조장하지만, 동시에 유익한 사건이 된다. 예수께서 떠나가시는 조건으로 오실 성령께서 그 빈자리를 채워주실 것이다.(8절) 성령은 바로 이 슬픔과 두려움을 제거해 주실 ’협조자’이시다. 예수께서 오시는 성령을 협조자로 계시하심은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다. 협조자로서의 성령계시는 오시게 될 성령이 제자들의 슬픔과 두려움을 단순히 제거해 주실 것임을 알아들으라는 학습(學習)이 아니라, 슬픔과 두려움을 제거하여 기쁨과 신뢰심으로 바꾸어 주실 것이라는 실제(實際)를 의미하는 것이다. 실제는 곧 현장감(現場感)을 의미한다. 따라서 협조자이신 성령께서는 실제로 세상을 향한 제자들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실 것이고, 동시에 진리의 성령으로서 세상의 죄와 정의에 대한 올바른 판결을 선언하실 것이며(9절), 예수께 대한 불신(不信)을 유죄(有罪)로 판결하실 것이고(10절), 세상의 권력자, 즉 예수님을 팔아 넘긴 자와 죽인 자들을 오히려 죄인으로 판결하심으로써(11절), 예수님의 부당한 재판을 다시 세워 그분의 의로움을 밝혀주실 것이다. 그렇다고 오시게 될 성령 하느님께서 제자들의 눈에 보이는 예수님처럼 이런 업무들을 수행하시는 것은 아니다. 성령의 업무는 성령을 받은 제자들과 교회를 통하여 수행된다. 제자들과 교회가 성령을 받았는지에 대한 검증은 그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그분의 복음을 증언하는 가운데 이루어진다. 이는 마치 풀밭에서 시계를 잃어버린 사람이 아무리 찾아도 시계는 보이지 않고 풀만 보이다가, 간절한 기도를 올린 후 다시 찾아보니 풀은 보이지 않고 시계만 보이는 경우와도 같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5.18 민주화항쟁으로 세상을 떠난 연령들의 영원한 안식을 빌며...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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