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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산책(부활6주간 목요일)
작성자박상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4-05-20 조회수1,234 추천수13 반대(0) 신고

◎ 2004년 5월 20일 (목) - 부활 제6주간 목요일

 

[오늘의 복음]  요한 16,16-20

<너희는 근심에 잠길지라도 그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16)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나를 다시 보게 될 것이다." 17) 그러자 몇몇 제자들이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게 되겠고 또 얼마 안 가서 다시 보게 되리라든지, 나는 아버지께로 간다든지 하는 말씀은 도대체 무슨 뜻일까?" 하고 수군거렸다. 18)그러면서 그들은 "’얼마 안 가서’라는 말씀이 무슨 뜻인가? 무슨 말씀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군!" 하고 말하였다. 19)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묻고 싶어하는 낌새를 알아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하게 되겠고 얼마 안 가서 다시 만나게 되리라고 한 내 말을 가지고 서로들 논의하고 있는 것이냐? 20)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너희는 울며 슬퍼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는 근심에 잠길지라도 그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복음산책]  세기의 역전극: 죽음에서 생명이, 고통에서 기쁨이...

 

  앞서간 복음(15,26-16,15)에서 오시게 될 성령 하느님의 정체는 실제적(實際的)인 차원과 학습적(學習的) 차원으로 계시되었다. 성령 하느님의 실제적 차원은 신앙의 행위에 대한 ’협조자’이고, 학습적 차원은 신앙의 내용에 대한 ’진리’이다. 무엇보다도 성령의 파견은 예수께서 떠나시는 조건으로 가능한 것이기에(16,7) 예수께서는 다시금 ’떠남’에 대하여 언급하신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떠남’은 ’잠시 동안’에 해당한다. 그것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조금 있으면’ 보지 못하게 되었다가 ’얼마 안 가서’ 다시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16절) 오랜만에 제자들이 반응을 보인다. 2차 고별사가 시작되고 꽤나 오랫동안 침묵으로 스승의 말씀을 듣고 있던 그들이 동요하기 시작한 것이다. 제자들은 ’조금 있으면 보지 못함’, ’얼마 안 가서 다시 보게 됨’, ’아버지께 가심’ 등에 대하여 몰이해를 나타내 보이면서 서로 수군거린다.(17-18절)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의아심을 직감하시지만 직접적인 해답을 주시기는커녕 이런 일들로 말미암아 제자들은 슬퍼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임을, 그러나 제자들의 근심이 곧 기쁨으로 전환될 것임을 예고하신다.(19-20절)

 

  예수님의 말씀 때문에 제자들의 머릿속이 혼란스러운 모양이다. 보지 못한다? 보게 된다? 못 본다? 본다? 이 무슨 뚱딴지같은 말씀인가? 보면 보는 것이고, 못 보면 못 보는 것이지, 보지 못하겠지만 얼마 안 가서 다시 보게 된다는 말이 과연 무슨 뜻인가? 제자들의 머릿속에 "내가 이 세상에 온 것은 보는 사람과 못 보는 사람을 가려, 못 보는 사람 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눈멀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9,39)는 말씀이 떠올랐는지도 모른다. 사실 예수님은 못 보는 사람을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을 못 보게 하려고 오신 분이 아니신가. 성서를 앞에 둔 우리는 이 대목이 예수님의 죽음, 부활과 발현, 승천과 성령강림, 그리고 마지막으로 재림(再臨)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는 당연히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들이다.

 

  우리 인간은 만나서 헤어질 때 "그럼, 잘 가. 다시 보자", "또 보자"고 말한다. 꼭 언제 다시 볼 것을 약속하지 않더라도 막연하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 보통이다. 우리가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살아 있는 동안에야 어떻게든 다시 만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이별이 죽음이라면 그런 말은 더 이상 못한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곧 죽을 것이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못 본다", 그러나 그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실 것이기 때문에 "다시 보게 될 것이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께 죽음과 부활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께 있어서 죽음과 부활은 하나의 사건이며, 이 사건이 곧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다. 예수님의 고통에서 기쁨이 솟아나고 죽음에서 생명이 태어난다 하더라도 그 생명과 기쁨이 죽음과 고통을 대체하지는 못한다. 죽음 없이 생명이 있을 수 없고, 고통 없이 기쁨이 없기 때문이다. 죽음과 고통은 참혹하고 쓰라리고 아픈 것이다. 제자들 또한 스승의 고통과 죽음의 시간에 스승과 함께 어둠의 시간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래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 사이의 시간은 제자들에게 있어서 두 번 다시없을 가장 참담하고 비통한 시간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를 죽였다"고 세상은 말한다. "우리가 예수를 이 세상에서 더 이상 볼 수 없는 존재로 제거했다"고 세상은 확신한다. 세상은 이렇게 자신의 권력으로 예수를 제거했음을 오만과 자만으로 기뻐할 것이다. 그렇지만 세상의 기쁨도 제자들의 슬픔도 그 어느 것도 오래 가지 못한다. 예수님의 부활이 이 둘을 바꾸어 놓을 것이다.(20절)

 

  세상은 예수님을 죽임으로써 그분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겠지만, 믿음의 눈을 가진 자는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시 보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승천으로 말미암아 믿음의 눈을 가진 자도 잠시동안은 못 보게 되겠지만, 그러나 얼마 안 가서 ’오시게 될 성령’ 안에서 그분을 다시 보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과 성령강림 사이에 존재하는 예수님의 시간적 부재(不在)는 제자들의 마음을 슬프게 만든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과 성령의 강림으로 말미암아 죽음으로부터 생명이 살아나고, 고통으로부터 기쁨이 태어난다. 다시없을 세기(世紀)의 역전극(逆轉劇)이 펼쳐질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믿음의 눈으로 예수부활과 성령강림사건을 보는 자만이 참된 생명과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다. 이 참된 생명과 기쁨은 사실상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유효한 것이다.◆[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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