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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산책(부활7주간 토요일)
작성자박상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4-05-29 조회수1,240 추천수10 반대(0) 신고

◎ 2004년 5월 29일 (토) - 부활 제7주간 토요일

 

[오늘의 복음]  요한 21,20-25

<그 제자가 이 일들을 글로 기록한 사람이며, 그의 증언은 참되다.>

 

  20) 베드로가 돌아다보았더니 예수의 사랑을 받던 제자가 뒤따라오고 있었다. 그 제자는 만찬 때에 예수의 옆자리에 앉아 있다가 "주님, 주님을 팔아 넘길 자가 누구입니까?" 하고 묻던 제자였다. 21) 그 제자를 본 베드로가 "주님, 저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고 예수께 물었다. 22) 예수께서는 "내가 돌아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고 한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다. 23) 그래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 제자는 죽지 않으리라는 소문이 퍼졌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가 죽지 않으리라고 하지는 않으셨고 다만 "설사 내가 돌아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고 한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고 말씀하신 것뿐이다. 24) 그 제자는 이 일들을 증언하고 또 글로 기록한 사람이다.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알고 있다. 25) 예수께서는 이 밖에도 여러 가지 일을 하셨다. 그 하신 일들을 낱낱이 다 기록하자면 기록된 책은 이 세상을 가득히 채우고도 남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복음산책]  부활시기의 에필로그(맺음말)

 

  예수님의 부활시기를 마감하는 마지막 날에 걸맞게 오늘 미사에는 요한복음의 끝 부분이 봉독된다.(21,20-25) 우리는 요한복음 21장이 15-17장과 더불어 추가로 편집되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어제 복음에서 보았듯이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단독으로 내세워 사랑의 다짐을 받았고, 그 사랑 위에 당신 양떼의 사목(司牧)을 맡기셨으며, 아울러 그가 걸어가야 할 길을 암시하셨다. "나를 따라라"(19절)는 예수님의 말씀에 베드로가 따라 나섰다. 그 뒤를 애제자(愛弟子)가 따르고 있었다.(20절) 자신의 미래를 계시 받은 베드로는 애제자의 미래도 알고 싶었다. 그래서 "주님, 저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21절) 하고 예수께 물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수제자(首弟子)와 애제자(愛弟子)가 차지하는 공동체 안에서의 위상(位相)을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앞서간 복음에서 공동체의 수장(首長)으로서의 위치를 보장받은 베드로가 스승의 사랑을 독차지한 애제자의 위상도 알고 싶었을 것이다. 베드로의 질문에는 호기심뿐 아니라 경쟁심도 다소 포함되어 있는 듯 보인다. 역사적 사실을 따져 볼 때 이 호기심이 베드로의 호기심이라기보다는 요한복음공동체를 포함한 후기 편집자의 호기심이다. 역사적 사실과 시간상의 간격을 따져 볼 때 원래의 요한복음이 기록되던 시점에 베드로는 이미 순교하였고(64-67년경), 요한은 아직 살아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믿는 사람들 사이에 스승의 사랑을 받던 요한이 죽지 않을 것이라는 소문이 퍼져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요한이 영원히 불멸한다는 것은 아니고, 적어도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는 죽지 않을 것이라는 소문이다.(23절) 그런데 애제자 요한도 결국은 100년경 도미씨아누스 박해 때 순교하였다. 그래서 21장의 후기 편집자는 애제자가 뒤따르는 장면에서 예수와 베드로의 대화를 통하여 바로 잡아 주고 싶었던 것이다. 성서 본문에 따르면 예수께서 베드로의 호기심과 경쟁심을 한 마디로 일축해 버리셨다: "너와는 상관없는 일이니, 너는 나를 따라라."(22절) 예수께서는 애제자의 미래가 베드로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하시면서 베드로의 추종만을 요구하신다. 사실 제자들의 제각기 갈 길은 예수님의 계획안에 들어있다. 제자는 오직 스승께서 이끄시는 대로 따르는 것이 제자 됨의 본성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을 믿는 공동체의 일치를 바라셨고, 일치를 위해 기도하셨다. 그러나 그분은 구성원 모두의 강압적이거나 획일적인 추종은 원치 않으셨다. 즉 내가 이러하니 너도 이러해야 한다는 식의 획일(劃一)은 예수님의 원의(願意)가 아니다. 교회 안에는 서로의 비교(比較)나 경쟁(競爭) 등, 우열(優劣)가림을 통한 획일적인 시도의 발상이 적지 않게 있다. 자신의 신심(信心)을 기준으로 삼아 타인의 신심을 종용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 점은 믿음의 공동체가 각별히 경계해야 할 부분이다. 그러나 필자도 그런 생각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나는 신부(神父)로서 이렇게 사는 데 저 신부는 왜 저렇게 사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다. 이런 생각으로 남을 험담하면 그것은 일치를 깨는 일이며 분열을 조장하는 일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계획안에서 자기를 비추어 보고 그 안에서 남을 위해 기도하는 자신의 모습을 본다면 이는 일치를 도모하는 일이다. 어떤 모양으로 살던 삶은 자신의 몫이다. 그저 우리는 자신과 타인을 위해 기도하는 데 익숙해야 할 것이다. 지상에서의 삶은 무릇 각자의 몫이겠지만, 천상(天上)의 삶은 공유(公有)하는 삶이다. 거기에는 차별(差別)도 열외(列外)도 없다. 그렇다면 지상에서 이미 천상의 삶을 공유하는 연습을 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 오시는 성령의 다양한 은사(恩師)가 꼭 필요한 것이다. "오소서. 성령이시여, 믿는 이들의 마음을 충만하게 하시고 그들의 믿음을 불태우소서." 아멘.◆[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

 

  "교회가 언제나 주장하였고 또 현재에도 주장하고 있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무한한 사랑에서 모든 사람들의 죄 때문에 자원으로 수난하시고 죽으시어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구원을 얻도록 하신 것이다. 따라서 교회의 의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하느님의 보편적 사랑의 표시와 온갖 은총의 원천으로 선포하는 그것이다." "만일, 우리가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사람들 가운데서 한 사람이라도 형제로 대하기를 거절한다면 우리는 하느님을 감히 모든 사람들의 아버지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를 대하는 인간의 태도와 이웃 형제들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는 이처럼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으니, 성경이 말해 주듯이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은 알지 못합니다.’(1요한4,8) 여기서 마침내, 인권과 거기서 귀결되는 권리에 있어서 사람과 사람, 민족과 민족 사이의 차별을 주장하는 온갖 이론과 실행의 기반이 무너지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온갖 차별과, 혈통이나 피부색이나 사회적 조건이나 종교적 차별의 이유로써 생겨난 모든 박해를 그리스도의 뜻에 어긋나는 것으로 알아 배격하는 바이다. 따라서 성스러운 교회 공의회는 사도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의 유훈을 따라 모든 신자들로 하여금 ’이방인들 사이에서 행실을 단정하게 하십시오’(1베드 2,12), 할 수만 있다면 각자의 능력대로 모든 사람들과 화평하여(로마 12,18참조) 참으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되도록 간절히 비는 바이다(마태5,45)."[제2차 바티칸공의회 비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 4-5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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