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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완전한 사랑은 거룩함이다.
작성자박상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4-06-15 조회수1,417 추천수13 반대(0) 신고

◎ 2004년 6월 15일 (화) -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오늘의 복음]  마태 5,43-48
<원수를 사랑하여라.>

 

  43) "'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여라'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44)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45) 그래야만 너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 46)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47) 또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를 한다면 남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48)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복음산책]  완전한 사랑은 거룩함이다.

 

  오늘 복음은 마지막 여섯 번째 대당명제를 가르친다. 오늘의 기본명제는 "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여라"는 것이며, 예수께서 제시하시는 반명제는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는 것이다. 이로써 여섯 가지 대당명제가 모두 선포되었다. 이를 다시금 정리하자면, 예수께서는 "더 옳게" 사는 방법을 6개의 대당명제(5,21-48)를 통하여 조직적으로 제시하셨다. 대당명제는 구약의 율법에 대한 예수님의 새로운 해석으로 피력된 것이다. 예수님의 새로운 해석이란 율법주의적 사고방식을 깨뜨리고 율법의 참된 정신을 밝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비록 율법주의적 사고방식에 빠져 율법의 참된 정신을 곡해하긴 했지만 세부적인 규정에 이르는 모든 계명을 지키려고 애를 썼다는 점은 인정하셨다. 그러나 이것으로 하느님나라에 들기는 부족하다는 것이 문제다. 그들보다 "더 옳게" 사는 것이 요구되고, "더 옳게" 산다는 것은 율법의 세부규정을 더 잘 지키는 것을 의미하지 않음을 밝혀주신 것이다. 이는 곧 법의 형식논리를 넘어 법의 정신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선포된 6개의 대당명제는 ① 살인하지 말라 -> 성내지도 말라(21-26절), ② 간음하지 말라 -> 음란한 생각조차 품지 말라(27-30절), ③ 이혼장을 써 주어라 -> 아내를 소박(疏薄)하지 말라(31-32절), ④ 거짓 맹세를 하지 말라 -> 아예 맹세를 하지 말라(33-37절), 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보복하라 -> 앙갚음(보복)을 하지 말라(38-42절), ⑥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 -> 원수까지도 사랑하라(43-48절)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의 기본명제에서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전반부는 구약의 율법조문이지만(레위 19,18), "원수를 미워하라"는 후반부는 구약에서 찾아볼 수 없는 계명이다. 구약성서에서는 오히려 원수에 대한 사랑을 높이 평가한 부분은 있다. 그것은 다윗이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을 되려 살려주는 대목에서 사울이 "원수를 만나서 고스란히 돌려보낼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그런데도 네가 오늘 나에게 이런 일을 해 주었으니 야훼께서 너에게 상을 주시기를 바란다"(1사무 24,20)라고 말한 곳이다. "원수를 미워하라"는 명제에 대하여 성서학자들은 반명제를 위해서 사해(死海) 근처에 모여 살았던 꿈란 공동체의 규범 중에서 "빛의 아들들을 사랑하고, 어둠의 아들들을 미워할지니, 그들은 자신의 죄과(罪過)대로 하느님의 보복을 받을 것이다"는 대목을 마태오가 빌어와 가필(加筆)한 것으로 추정한다.

 

  오늘 예수님의 요구는 "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물론이고,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웃과 원수의 구별이다. 그러나 우리가 "누가 내 이웃이며, 누가 내 원수인가?"라는 물음에 머물러 있다면 예수께서 선포하시는 새로운 의(義)를 깨닫지 못한다. 예수님의 새로운 의로움에 따르면, 우리가 내 이웃이 아닌 사람들을 원수로 규정하고 내 이웃만 사랑한다면 그 사랑은 아무 것도 아니다. 사랑하는 이웃끼리 인사하고 잘 지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세리들과 이방인들도 그만큼은 한다. 따라서 거기엔 어떠한 상(償)도 더 나음도 없다. 하느님께서는 내 이웃이나 원수에게 똑같이 대해주시기 때문이다.(45절) 세상 사람 모두가 하느님의 모상(模像)을 따라 빚어졌기 때문이다.(창세 1,26) 어떤 원수라도 그가 사랑을 받는다면 그는 원수가 아니다. 그래서 하느님에게는 어떤 원수도 없다.

 

  이로써 예수께서 선포하시는 대당명제의 깊은 의도와 의중이 모두 드러났다. 그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48절)는 것 안에 있다. 완전(完全)하다는 것은 "온전할 뿐만 아니라 전체적이다"는 것이며, "나누어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하느님께서는 완전하시지만 인간은 그렇지가 못하다. 우리는 늘 혼란스럽고 갈라지며 그 마음 또한 조석(朝夕)으로 변한다. 굳은 결심으로 시작한 하루가 그 마감시간에는 깨지고 흩어진 마음을 주워 모아야 하는 아픔으로 반복된다. 속으로는 한결같은 마음을 먹지만 마주 대하는 상대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마음을 보며 안타까워하는 우리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은 하느님의 완전함과 온전함을 배우고 익히도록 요구된다. 하느님의 완전함과 온전함은 그분이 인간에 대한 어떤 차별도 없이 수행하시는 사랑에서 드러난다. 하느님 사랑의 방법에 있다는 말이다. 이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는 것이 곧 완전하게 되는 길이다. 오늘은 적어도 왜 하느님께서 선인(善人)에게 바로 상(償)을 주지 않으시고, 악인(惡人)에게 바로 벌(罰)을 내리지 않으시냐고 말하지 말자. 그래서 하느님은 오늘도 침묵(沈默)만 하고 계신다고 말하지 말자. 그것은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똑같이 비를 주시는 하느님의 완전함과 온전함에서 우러나는 창조적이고 거룩한 사랑인 것이다.◆[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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