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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수성심대축일 - 벌은 꿀을, 뱀은 독을...
작성자박상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4-06-17 조회수1,556 추천수6 반대(0) 신고

◎ 2004년 6월 18일 (금) - 예수 성심 대축일
▣ 사제 성화의 날

 

[오늘의 복음]  루가 15,3-7
<자, 같이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양을 찾았습니다.>

 

  [1)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들었다. 2) 이것을 본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저 사람은 죄인들을 환영하고 그들과 함께 음식까지 나누고 있구나!" 하며 못마땅해하였다.] 3)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셨다. 4) "너희 가운데 누가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 한 마리를 잃었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아흔 아홉 마리는 들판에 그대로 둔 채 잃은 양을 찾아 헤매지 않겠느냐? 5) 그러다가 찾게 되면 기뻐서 양을 어깨에 메고 6) 집으로 돌아와 친구들과 이웃을 불러모으고 '자, 같이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양을 찾았습니다' 하며 좋아할 것이다. 7) 잘 들어두어라. 이와 같이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보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는 것을 하늘에서는 더 기뻐할 것이다."◆

 

[복음산책]  같은 물을 마셔 뱀은 독을, 벌을 꿀을 만든다.

 

  고대 철학자들은 거의 모두가 "행위(行爲)는 본성(本性)을 따른다"(agere sequitur esse!)라는 명제에 의견을 같이 했다. 뿐만 아니라 중세기의 독일철학자들도 하나같이 "가지지 않은 것을 줄 수는 없다"(Was man nicht hat, das kann man nicht geben!)는 생각에 일치하였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겉으로 행하는 어떤 행위든 그것은 내면(內面)의 본성을 드러내는 것이며, 사람은 자기가 스스로 가지지 않은 것을 남에게 줄 수는 없다는 말이다. 여기서 후자(後者)를 굳이 유물론적으로만 생각할 필요는 없다. 결국 사람은 본성에 따라 행동할 것이고, 무엇이든 스스로 가진 것을 남에게 줄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고 보면 사람이 어떤 마음을 가지던 마음은 참으로 중요한 것이다.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생각이 달라지고, 생각에 따라 사람은 행동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는 생각이 달라지면 태도가 달라지고, 태도가 달라지면 습관이 바뀌며, 습관에 따라 운명이 좌우된다는 말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도식(圖式)으로 설명하자면, 마음(heart) -> 생각(thinking) -> 태도(attitude) -> 행위(act) -> 습관(habit) -> 운명(destiny)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인간행동의 많은 부분은 거의 습관에 따라 행동하는데 습관은 곧 반복된 행위를 말한다.

 

  행동하기 위해 이왕에 마음을 먹을 것이라면 좋은 마음을 먹는 편이 바람직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가 그것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타인이 나에게 좋은 마음을 먹도록 강제로 요구할 수는 없는 일이다. 마음의 문(門)에는 손잡이가 하나 밖에 없기 때문이며, 그것도 밖으로 나 있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 나 있기 때문이다. 보통 문이란 손잡이가 안팎으로 나 있어 어느 쪽에서나 쉽게 열 수 있지만, 마음의 문을 여는 손잡이는 마음을 가진 자의 편에서만 열 수 있다는 말이다. 이렇게 나 자신만이 열어 보일 수 있는 마음의 좋음과 나쁨의 기준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한 사람의 마음이 좋고 나쁜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밖에서는 손잡이가 없으니 열고 들어가 볼 수 없다. 그렇다고 남의 마음을 투시(透視)하기란 더더욱 어렵다. 결국 내 마음은 나만이 안다는 결론이다. 나 혼자 아는 마음이 좋은지 나쁜지는 자기 마음보다 더 깊은 곳에 있는 양심(良心)에 비추어 봄으로써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방법이 늘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양심이 올바르고 보편적이라면 문제는 없다. 그래서 독일의 철학자 칸트(1724-1804)는 자신의 저서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을 통하여 세인(世人)들에게 "너의 행위를 보편적 규범에 맞게 하라"고 주문했던 것이다. 자기 마음의 선과 악, 옳고 그름을 평가하는 데 실패하는 경우는 보통 양심이 혼탁(混濁)하여 마음을 비추어 볼 수 없는 경우가 그렇다. 이럴 땐 낭패를 본다. 그래도 방법은 있다. 행위는 마음의 본성을 따르고, 자기 마음에 없는 것을 남에게 줄 수 없다고들 하니, 수행된 행동의 결과와 타인에게 주어진 것을 보고 그 원인이 되는 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즉, 행동의 결과, 타인의 반응, 자신의 후감(後感) 등을 검증함으로써 마음을 알 수 있는 방법이다. 물론 행동에는 착오가, 반응에는 오해가 있기 마련이다. 또는 양자택일의 기로에서 고민하다 수행한 최선이 원치 않은 결과를 가져오는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시킬 수는 없다. 좋은 결과를 목적으로 나쁜 수단을 쓸 수는 없다는 말이다. 행위의 좋고 옳은 결과를 위해서는 늘 좋고 옳은 마음을 가지도록 요구되지만, 마음은 스스로가 가꾸어야 하며, 전적으로 자신이 열고 나가야 하는 것이다.

 

  현대인들이 선호하는 주거공간인 아파트나 관광지에 위치한 호텔은 같은 평수의 방이라도 전망에 따라 가격차가 상당히 나는 법이다. 똑같은 설계, 재료, 인테리어라 할지라도 방이 난 방향에 따라 가격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동물농장"으로 잘 알려진 인도태생 영국인 조지 오웰(1903-1950)은 천재적인 머리를 가졌으나 식민역사의 죄책감과 부정적인 인생관 때문에 생긴 우울증과 폐결핵으로 젊은 나이에 인생을 마감해야 했다. 반면에 엘리너 루스벨트(1884-1962)는 어릴 때 고아가 되었으나 진취적인 인생관으로 20세에 루스벨트와 결혼하여 미국의 역대 대통령 부인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여성이 되었다. 그뿐이랴. 생후 19개월만에 눈, 귀, 입의 기능을 모두 잃고도 사물에 대한 진지한 마음과 밝은 생각으로 아름다운 인생을 꾸려나간 "3중고(三重苦)의 성녀(聖女)" 헬렌 켈러(1880 1968)도 있다. 1956년에 세상을 떠난 프랑스의 철학자 살리에즈(Sali ge)는 "이성을 가진 인간의 생각은 감동(感動), 아니면 독선(獨善)의 싹을 피운다"고 했다. 벌은 물을 마셔서 꿀을 만들고, 뱀은 물을 마셔서 독을 만든다는 말이 기막히게 들어맞는 순간이다. 감동과 독선, 바로 이 두 가지가 우리들 생활기록부의 양면성이다. 이는 우리들 생활기록부의 두 가지 서로 다른 문체이다. 감동은 사랑과 관심, 희생과 배려의 글씨체를, 독선은 미움과 무관심, 욕심과 배타의 글씨체를 구사한다.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우리 삶은 지금보다 훨씬 달라질 것이다.

 

  예수님의 마음, 그분의 거룩한 마음을 기억하며 본받고자 하는 "예수성심대축일"이다. 일찍이 어느 인간도 겪어보지 못했을 그런 무지막지한 고통을 이겨내며, 세상의 죄를 대신하여 "어린양"으로 아버지께 자신의 생명을 바치신 예수님을 그 때 그 자리에서 지켜본 사람들은 "예수님의 성심(聖心)"을 모른다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그 성심을 자기 마음속 깊이 새겼고, 또 닮으려고 했던 사람들의 증언으로 복음서가 집필되어 우리에게까지 전해졌다. 그래서 복음서의 말씀은 그분의 자신의 말씀과 행동이며, 그것은 그분의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온 것이다. 교회는 일찍부터 예수님의 성심을 공경해 왔다. 이를 축일로 공경하기 시작한 것은 방문회의 수녀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콕(1647-1690)이 세상을 떠난 후부터였다. 10살 때 전신마비의 병을 얻은 마리아는 14살 때 기적적으로 치유되었고,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은혜와 예수님의 성심을 볼 수 있는 은혜를 함께 받았었다. 자신의 눈으로 직접 목격한 사랑으로 불타는 예수님의 성심을 죽을 때까지 외쳤던 성녀 마리아 덕분에 "예수성심축일"이 수도회와 프랑스 전역으로 확산되어 축일미사를 거행하였고, 교황 비오 9세(1846-1878)는 이를 대축일로 제정하여 전체교회에 공포하였으며, "그리스도의 성체성혈 대축일" 다음 금요일로 고정하였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1995년부터 오늘 대축일을 "사제 성화의 날"로 지정하여 누구보다 사제들이 먼저 스승의 성심을 공경하고 닮아서 복음선포와 성사거행의 직무에 더욱 매진하기를 촉구하고 있다. 오늘 우리는 한없이 풍요로우신 예수성심께 감사를 드리고, 나의 잘못과 죄로 상처받은 예수성심을 통회하는 마음으로 묵상해야 할 것이다.

 

  오늘 복음은 바로 이러한 예수성심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세리와 죄인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여들었고, 예수님은 애당초 그들을 위해 세상에 오셨다. 예수님의 말씀을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듣게 된다는 사실 자체가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에게 있어서는 모욕적인 일이었고, 예수에게는 비난의 빌미가 된다. 이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세 가지 비유를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루가복음사가가 하느님의 크고 무한한 사랑과 자비를 집약한 15장으로서, 잃은 양(4-7절), 잃은 은전(8-10절), 잃은 아들(11-32절)에 관한 비유말씀이다. 하느님은 잃은 것을 찾아 나서시는 분이며, 죄인들을 회개로 초대하시는 분이시다. 바리사이와 율사들에게는 스캔들이 될지는 몰라도 하늘에서는 죄인의 회개와 잃은 것의 되찾음이 큰 잔치의 이유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마음이요, 세상이 주는 고통으로 아파하며 죄를 짓고 길을 잃고 헤매는 바로 나 자신을 향한 예수님의 성심이다. "걸음마를 가르치고, 팔에 안아 키워주고, 인정으로 매어 끌어주고, 사랑으로 묶어 이끌고, 젖먹이처럼 들어올려 볼에 비비기도 하며, 허리를 굽혀 입에 먹을 넣어주고, 죽을 것을 살려주시는"(호세 11,3-4) 예수 성심이여, 온 세상에서 찬미 받으소서. 아멘.◆[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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