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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 알로이시오 - 판단은 하느님의 몫이다.
작성자박상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4-06-21 조회수1,174 추천수9 반대(0) 신고

◎ 2004년 6월 21일 (월) -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수도자 기념일

▣ 성 알로이시오 (1568-1591) / 증거자

 

  한참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장점은 무엇이나 다 받아들일 수 있는 가능성이다. 이 가능성은 빠른 속도의 학습능력과 함께 더욱 빛난다. 문제는 청소년들이 얼마나 옳고 좋은 것을 학습하느냐에 달렸다. 공부하는 학생들이라면 누구나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의 생활철학을 모범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성인은 1568년 이탈리아 롬바르디아의 만토바 근교 카스틸리오네 귀족가문의 후계자로 태어났다. 어린 알로이시오는 신심 깊은 어머니의 교육으로 경건하게 자라는 한편, 왕궁의 군사훈련장을 드나들면서 영웅적 군인이 되었으면 하는 아버지의 염원을 안고 자랐다. 그는 10살의 나이에 플로렌츠의 메디치 왕가에서 시동(侍童)으로 일하다 스페인으로 옮겨가 필립 2세의 궁전에서 같을 일을 했다. 이런 곳에서 알로이시오는 많은 정치적 지도자들을 사귀기도 했지만, 당시 사회와 궁전이 성인에게 보여준 것이란 살인, 사기, 방탕, 음욕 등으로 가득 찬 지도층의 타락상이었다. 그럴수록 성인의 영적 갈망을 커져갔고, 12살에 평생순결을 서약하였다. 성인의 영적 갈망은 매일의 성무일도와 신심기도를 통하여 수도생활로 구체화되었고, 당시 밀라노 대교구의 추기경 가롤로 보로메오(1538-1584) 성인의 영적 지도를 받았다. 1585년 17살의 나이에 알로이시오는 장자의 모든 권한을 동생에게 이양하고 예수회에 입회하였다. 물론 아들을 통해 세속적 영달을 꾀했던 아버지의 반대는 놀랄 정도로 컸다.

 

  로마에서 시작한 수련생활이 그리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유산문제와 가문의 영토분쟁이 법적 권한을 포기한 성인을 계속 괴롭혔으며,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미 영적으로 대단히 성숙한 성인이 다른 수련생들의 낮은 수준에 따라야 하는 어려움도 있었다. 사제로 서품된 성인의 열정은 예수회 소속으로 첫 교수였던 성 로베르토 벨라르미노(1542-1621) 주교학자의 지도와 함께 철학과 신학공부로 이어졌다. 그러는 중에도 성인은 병자들을 돌보는 일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았고 서신을 통한 청소년사목에도 큰 성과를 보였다. 그는 1591년 페스트 전염병이 또 다시 로마를 휩쓸 때 헌신적으로 병자들을 돌보다 스스로 감염되어 23살의 나이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성인은 청소년교육에 지침이 될만한 많은 편지와 글들을 남겼다. 성인의 유해는 로마의 성 이냐시오 성당에 안치되었다. 알로이시오는 교황 베네딕토 13세에 의해 1726년 성인품에 올랐고, 1729년 학생들의 수호성인으로 지정되었다.◆

 

[오늘의 복음]  마태 7,1-5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1) "남을 판단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판단 받지 않을 것이다. 2) 남을 판단하는 대로 너희도 하느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고 남을 저울질하는 대로 너희도 저울질을 당할 것이다. 3) 어찌하여 너는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제 눈 속에 들어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 제 눈 속에 있는 들보도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네 눈의 티를 빼내어 주겠다' 하겠느냐? 5) 이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눈이 잘 보여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지 않겠느냐?"◆

 

[복음산책]  판단은 하느님의 몫이다.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 외로움에 지친 나머지 랍비를 찾아갔다. 소문을 익히 들어 알고 있던 터라 랍비는 그 사람을 창문가로 데려 갔다. 그리고는 창 밖을 손으로 가리키며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었다. 그 사람은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보인다고 대답했다. 랍비는 다시 그 사람을 거울 앞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는 거울을 가리키며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었다. 그 사람은 자기 모습만 보인다고 대답했다. 랍비가 다시 물었다. "같은 유리인데 어찌하여 창유리에는 다른 사람의 모습이 보이고 거울에는 그대의 모습만 보입니까?" 그렇다. 거울로는 거울의 유리 뒤에 칠한 수은 때문에 남을 보지 못하고 자기만 볼뿐이다. 우리 마음도 마찬가지다. 우리 마음 뒤에 칠해진 이기심과 욕심과 아집 때문에 다른 사람은 보지 못하고 자신만 보게 된다. 이런 방법으로 사람은 자기만의 기준으로 남을 판단하고, 험담하고, 비방하며, 단죄(斷罪)한다. 뿐만 아니라 남을 자신의 기준에 맞추도록 요구하고 종용하며, 때로는 강요한다.

 

  오늘 산상설교의 테마는 판단(判斷)과 교정(矯正)에 관한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가만히 있지 않고 행동하기 위해서는 옳고 옳지 못한 것에 대하여 판단하고, 남의 잘못을 타일러 고쳐주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남을 판단하려 들지 말고, 남의 눈에 들어 있는 티를 빼내려 하지 말라고 하신다. 굳이 남을 판단해야 한다면 자신도 판단 받을 각오를 해야 하고, 남의 눈에서 티를 빼내 주려면 자기 눈에 들어 있는 들보부터 먼저 빼내야 한다는 것이다. 남에 대하여 많은 말을 하다보면 비판과 판단의 말도 섞여 나오기 마련이다. 남을 비판하고 판단하는 사람은 그것이 필히 자기에게 되돌아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2절) 우리가 남을 비판하고 판단하지 못할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다른 사람의 전체적인 사람됨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행한 행동을 두고 보더라도, 그 원인과 경과를 알지 못하면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없다. 만약 원인과 경과를 안다 하더라도 판단의 기준이 보편적일 수 없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의 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며, 자신만의 다양한 판단 기준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행위는 불가능하며, 때로는 그 사람의 인생을 망칠 수도 있는 매우 위험한 일이다. 어쩌면 인간에게 그런 판단의 권한이 전혀 없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판단이나 심판은 하느님의 일이요, 그분만의 몫이다.

 

  남의 잘못을 교정하는 일은 어떤가? 이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남을 교정하자면 판단이 선행(先行)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자기 눈에 온 지붕을 떠받치는 들보가 들어 있는데, 무슨 재주로 남의 눈에 있는 티끌이라도 볼 수 있겠는가?(5절) 이는 모두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암시하는 말이다. 그것도 같은 잘못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남보다 자신을 더 큰 죄인으로 여겨야 하는 미덕을 말한다. 즉 남의 죄는 티끌이요, 자신의 죄는 들보로 자각하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의 잘못을 교정하려면 할 수는 있으나 엄청난 용기(勇氣)를 필요로 한다. 그 용기는 남의 눈에 있는 티를 지적하고 빼내주기 위해 자신의 눈에 박힌 들보를 먼저 제거하는 작업을 해야 하는 용기이다. 누구든지 자기 자신을 먼저 죄인으로 여기는 사람이 남을 판단하고 남의 허물을 탓하는 재미를 가질 리는 없을 것이다. "제가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을까요?" "네가 남을 단죄(斷罪)하는 일이 없다면 용서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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