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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산책) 선교하는 그 자체가 우리와 하늘의 기쁨이다.
작성자박상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4-07-04 조회수1,246 추천수5 반대(0) 신고
 

◎ 2004년 7월 4일 (일) - 연중 제14주일 (다해)


[오늘의 복음]  루가 10,1-12.17-20

<너희가 비는 평화가 그 사람에게 머무를 것이다.>


  1) 그 뒤 예수께서 달리 일흔두 제자를 뽑아 앞으로 찾아가실 여러 마을과 고장으로 미리 둘씩 짝지어 보내시며 2) 이렇게 분부하셨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으니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달라고 청하여라. 3) 떠나라. 이제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이 마치 어린 양을 이리떼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구나. 4) 다닐 때 돈주머니도 식량 자루도 신도 지니지 말 것이며 누구와 인사하느라고 가던 길을 멈추지도 마라. 5)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이 댁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인사하여라. 6) 그 집에 평화를 바라는 사람이 살고 있으면 너희가 비는 평화가 그 사람에게 머무를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7) 주인이 주는 음식을 먹고 마시면서 그 집에 머물러 있어라. 일꾼이 품삯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 8) 어떤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환영하거든 주는 음식을 먹고 9) 그 동네 병자들을 고쳐주며 하느님 나라가 그들에게 다가왔다고 전하여라. 10) 그러나 어떤 동네에 들어갔을 때 사람들이 너희를 환영하지 않거든 길거리에 나가서 11) ‘당신네 동네에서 묻은 발의 먼지를 당신들한테 털어놓고 갑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는 것만은 알아두시오.’ 하고 일러주어라. 12) 내 말을 잘 들어라. 그 날이 오면 소돔 땅이 그 동네보다 오히려 가벼운 벌을 받을 것이다.”

  17) 일흔두 제자가 기쁨에 넘쳐 돌아와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들까지도 복종시켰습니다.” 하고 아뢰었다. 18) 예수께서 “나는 사탄이 하늘에서 번갯불처럼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19) 내가 너희에게 뱀이나 전갈을 짓밟는 능력과 원수의 모든 힘을 꺾는 권세를 주었으니 이 세상에서 너희를 해칠 자는 하나도 없다. 20) 그러나 악령들이 복종한다고 기뻐하기보다는 너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복음산책]  선교하는 그 자체가 우리와 하늘의 기쁨이다.


  예수께서 아버지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되어 이 세상에 오셨듯이 제자들도 스승이신 예수로부터 세상의 선교를 위해 파견된다. 열두 제자의 파견은 공관복음의 공통된 보도이지만(마태 10,1-39; 마르 6,8-11; 루가 9,1-6), 오늘 일흔두 제자의 파견은 루가복음만의 특종기사에 속한다. 물론 열둘과 일흔둘이라는 파견의 규모에 차이를 보이고는 있지만 루가복음이 제자들의 파견기사를 두 번이나 보도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루가복음이 나름대로 설정한 예수님 공생활의 시기적인 구분에 있다. 좀더 자세히 말하면, 열두 제자의 파견은 예수님의 갈릴래아 활동기(루가 4,14-9,50) 안에서 이루어졌고, 일흔두 제자의 파견은 갈릴래아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상경기(루가 9,51-19,28)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지난주일 복음에서 보았듯이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상경을 결정하시고 사마리아 지방을 통하여 가려하셨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들의 냉대와 거부로 인하여 우회로를, 즉 데카폴리스와 베레아 지방을 택하시게 된 것이다.(9,51-56) 따라서 이제 완전히 새로운 데카폴리스와 베레아 지방을 두루 거쳐 예루살렘으로 상경해야 하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앞으로 거쳐 가셔야 할 곳으로 또 한번의 제자파견은 지극히 필요한 사안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루가는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10,2)는 말씀을 삽입하여 일흔두 제자라는 대규모 파견의 시급함과 타당성을 동시에 제시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2차 파견에서도 1차 파견 때와 똑같은 선교상의 여장규칙과 임무를 훈시하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신다. 파견되는 제자들이 어린양에 비유되고, 파견되는 곳의 환경과 사람들이 이리떼에 비유되는 것을 보면, 선교상의 어떠한 안전장치나 무장도 허용되지 않는 파견자의 강한 의지가 돋보인다. 파견되는 제자들의 임무는 이리떼를 복음으로 교화하여 어린양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리가 복음을 거부하고 계속해서 이리로 머물기를 고집한다면 도래한 하느님나라의 심판을 면할 길을 없다. 사실 예수님의 갈릴래아 활동 기간 중에도 복음선포활동은 실패를 가져다주기도 했다. 오늘 복음에서 생략된 부분(13-16절)을 살펴보면 실패의 원인은 선교사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선교지역의 사람들에게 있음이 나타난다. 예수께서는 선교실패의 지역으로 코라진, 베싸이다, 가파르나움을 실명(實名)으로 거명(擧名)하신다. 이 지역들은 모두 갈릴래아 호수 북방 인근어촌들로서 예수께서 가장 빈번히 활동하셨던 곳이다. 이곳의 사람들은 복음말씀을 듣고도, 기적을 보고도 이를 받아들여 회개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은 냉정하고 확실한 법칙(法則)을 따른다. 이들 도시들이 심판 날에 이미 구약에서도 죄상으로 말미암아 멸망된 소돔(창세 19,24-28)과 멸망의 도시로 예언된 띠로와 시돈(이사 23장; 에제 26-28장; 즈가 9,2-4)보다 훨씬 더 무거운 벌을 받게 될 것이다. 이렇게 주어지는 구원의 은총을 거부한 만큼의 정당한 심판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주어지는 구원의 은총을 거부한 만큼의 정당한 심판이 주어진다는 법칙은 앞으로도 모든 선교지역에 적용될 법칙이다. 비록 예수께서 직접 그곳에 가시지 않는다 하더라도 제자들과 그들의 선교사를 거부하는 곳은 모두 같은 법칙의 적용을 받게 된다. 제자들의 말을 듣는 것은 곧 예수님의 말을 듣는 것이고, 제자들을 배척하는 것은 곧 예수님을 배척하는 것이며, 나아가 예수를 파견한 하느님 아버지를 배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16절) 물론 주어지는 은총의 기회를 잘 수용한다면, 수용한 그만큼의 보상도 정당하게 주어질 것이다.


  선교의 성공은 곧 선교사의 기쁨이다. 오늘 복음의 둘째 부분(17-20절)은 선교에서 돌아온 일흔 두 제자들이 그 결과를 보도하는 내용이다. 선교활동을 마치고 돌아온 일흔 두 제자들은 예수께서 명하신 하느님나라의 복음선포와 병자치유 외에도 마귀들까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복종시킨 것에 대하여 상당히 기뻐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사탄이 하늘에서 번갯불처럼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고 하시면서 제자들의 활동을 내다보고 있었음을 암시하신다. 그러나 제자들이 자신의 활동들에 대하여 대단히 기뻐하고 자랑스러워한다고 해서 선교활동의 결과가 전적으로 성공적이라고 생각한다면 섣부른 판단이다. 제자들의 기쁨과 선교결과가 꼭 비례하지 않기 때문이다. 선교의 결과는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몫이라는 말이다. 코라진, 베싸이다, 가파르나움과 같은 마을들을 보라! 그들에게 주어진 가르침과 기적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러나 그들은 듣고 보고도 회개하지 않고 믿지 않았다. 따라서 선교사들이 기뻐해야 할 것은 선교의 결과보다는 선교를 했다고 하는 그 사실이다. 하늘에 선교사들의 이름이 기록될 것이기 때문이다.(20절) 이 사실에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인은 고무(鼓舞)되어야 한다. “모이면 기도하고 나가면 선교하자.”는 표어가 성당 곳곳에 걸려있는 것을 본다. 얼마나 기도하지 않고 선교하지 않으면 이런 표어가 나왔겠는가. 오늘날 우리는 선교하러 가지도 않으면서 지나치게 선교되기를 바란다. 성공하지 못할 선교결과를 미리 예측이라도 하듯, 앉아서 기다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오늘 세상에 파견된 일흔두 제자 가운데는 나 또한 포함되어 있음을 명심하자. 결과는 접어두고 선교한다는 그 자체가 우리 자신과 하늘의 기쁨이 될 것이다.◆[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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