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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산책) 그리스도의 얼굴이 없는 교회는?
작성자박상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4-07-08 조회수1,267 추천수11 반대(0) 신고
 

◎ 2004년 7월 8일 (목) - 연중 제14주간 목요일


[오늘의 복음]  마태 10,7-15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7) “가서 하늘나라가 다가왔다고 선포하여라. 8) 앓는 사람은 고쳐 주고 죽은 사람은 살려 주어라. 나병 환자는 깨끗이 낫게 해 주고 마귀는 쫓아 내여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9)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전을 넣어 가지고 다니지 말 것이며, 10) 식량 자루나 여벌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도 가지고 다니지 마라. 일하는 사람은 자기 먹을 것을 얻을 자격이 있다. 11) 어떤 도시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먼저 그 고장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거기에서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 있어라. 12) 그 집에 들어갈 때에는 ‘평화를 빕니다!’ 하고 인사하여라. 13) 그 집이 평화를 누릴 만하면 너희가 비는 평화가 그 집에 내릴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그 평화는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14) 어디서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도 않고 말도 듣지 않거든 그 집이나 그 도시를 떠날 때에 발에 묻은 먼지를 털어 버려라. 15) 나는 분명히 말한다. 심판 날이 오면 소돔과 고모라 땅이 오히려 그 도시보다 가벼운 벌을 받을 것이다.”◆


[복음산책]  그리스도의 얼굴이 없는 교회는?


  많은 제자들 중에서 12명이 특별히 선발되어 사도로 임명되었다. 베드로와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 토마와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타대오, 가나안 사람 시몬과 가리옷 사람 유다가 뽑혔다. 사도행전은 추가로 유다를 대체한 마티아(사도 1,16-26), 그리고 바울로와 바르나바(사도 13,2)를 사도로 소개한다. 그들은 학생의 신분과도 같은 제자(弟子)였다가 이제는 전권대사의 의미를 가진 사도(使徒)로 임명되어 파견되는 것이다. 어제 복음에서 보았듯이 사도들이 파견되는 장소는 이방인들이 사는 곳도 아니고, 사마리아 사람들의 도시도 아닌, 오직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길 잃은 양들에게로 국한되었다. 그들에게 가서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마태오복음의 독자(讀者)가 우선적으로 유다인, 또는 유다인 계통의 그리스도인임을 알 수 있다. 물론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열한 제자들에게 온 세상의 모든 사람과 세상 끝까지를 대상으로 한 복음선포를 지상 최대의 명령으로 주실 것이다.(마태 28,19)  


  사도들에게 대한 예수의 파견설교(10장)가 계속된다. 제자들이 나가서 해야 할 일은 스승인 예수께서 해오시던 일과 같다. 우선 하늘나라의 도래와 그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며, 그 표지로 구마기적과 치유기적을 행하는 것이다. 제자들이 행하게 될 기적의 능력은 예수께서 거저 주신 것이므로 그들도 거저 베풀어야 한다. 그들은 성과도 얻겠지만 실패도 맛보아야할 것이다. 아울러 예수께서는 아주 엄한 여장규칙(旅裝規則)을 제시하신다. 이 규칙에 의하면 어떠한 여벌의 것은 아무 것도 허용되지 않는다. 그저 있는 그대로 가야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의 철저한 청빈(淸貧)을 요구하신다. 그러나 동시에 복음을 받아들이는 공동체의 의무도 암시하신다. 일하는 사람은 자기 먹을 것을 얻을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그 자격은 철저히 복음선포에 메여있다. 복음은 하느님의 선물이다. 예수의 제자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하느님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복음을 수용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의 선물을 얻는 것이다. 따라서 제자들이 비는 평화의 인사는 단순한 예의의 표현이 아니라 복음의 수용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오늘 복음의 핵심적인 내용은 초창기 그리스도교의 성장시기에는 절대적인 의미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2,000년이 지난 오늘날 현대의 그리스도교에도 똑같은 의미를 가질까 하는 의문이 든다. 사실 그리스도교의 전성기를 맞이한 중세시기 이후 교회 안에서는 오늘 복음이 제시하는 선교규칙(宣敎規則)을 언급하기를 꺼려하고 있다. 그 원인은 전적으로 교회 안에 있다. 교회는 거저 받은 것을 거저 주기는커녕 거저 받은 것을 미끼로 부(富)를 축적하였다. 가난하고 길 잃은 양들을 찾기보다는 있는 자의 편을 들어 그들의 정치와 경제에 크게 관여하였다. 사도행전의 기록이 보여주듯이 신약성서 시대까지 있었던 병자를 고치고, 마귀를 몰아내며, 심지어 죽은 사람까지 살려내는 능력도 사라져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권력에 복종하지 않는 무리들에게는 단호한 입장을 취하였다. 발에 묻은 먼지를 터는 일만큼은 잘했다는 것이다. 단죄하고 파문하는 일이 교회의 일상(日常)이 된 셈이다.


  현대의 교회 모습도 중세기 이후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첫째, 오늘날 대부분의 복음선포자들에게 구마의 능력도 치유의 능력도 없어 보인다. 둘째, 선교상의 철저한 무소유(無所有)원칙이 자기 합리적인 이유로 거세(去勢)되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 가톨릭교회의 2,000년 역사를 통틀어 이 원칙을 신중하게 받아들였던 사람은 몇 안 된다. 셋째, 복음을 거부하는 자들에 대한 ‘발에 묻은 먼지를 털어 버릴 정도까지의 단죄(斷罪)’는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오늘날 선교방법은 선교대상의 문화적 수용과 더불어 타협적으로 이루어지며, 오히려 교회 안에 머물러 있는 신자(信者)들과 ‘냉담자(冷淡者)’들에 대한 내부지향적 사목에 더 관심을 보이고 있는 형편이다. 그래서 교회는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교회이며, 누구로부터 파견된 교회인지?” 교회는 오늘 복음의 선교규칙을 무용지물(無用之物)이 되지 않도록 다시금 깨우쳐야 한다. 교회는 오늘 복음에 자신의 방향을 다시 설정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복음을 입에서 입으로 전하기보다는 손에서 손으로 전해야 하며, 병자를 고치고 죽은 사람을 살리려는 기적보다는 인간을 존중하고 생명을 사랑하며, 우리가 사는 세상을 더 나은 세상으로 바꾸려는 노력으로 가진 바를 서로 나누면서 세상에 정의와 사랑의 기적을 일으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교회는 그리스도의 얼굴을 잃게 될 것이다.◆[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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