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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산책) 약해질 때와 강해질 때
작성자박상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4-07-09 조회수1,182 추천수7 반대(0) 신고
 

◎ 2004년 7월 9일 (금) -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 성 아우구스티노 자오롱 사제와 동료 순교자 기념


  오늘 교회는 성 아우구스티노 자오롱(Zhao Rong, +1815) 사제와 더불어 1648년에서 1930년 사이에 순교한 동료 119명의 중국(中國) 순교자들을 경축한다. 이들 120명의 순교자들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2000년 10월 1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시성(諡聖)되었다. 120명의 중국 성인들 가운데는 수많은 외국의 도미니코회, 살레시오회, 프란치스코 전교 수녀회 등의 선교사 주교와 신부, 수사와 수녀들이 포함되어 있다. 방대한 중국의 영토와 역사만큼 중국 선교의 역사도 복잡하다. 중국에 그리스도교가 처음 소개된 것은 600년경 네스토리우스파가 유럽으로부터 쫓겨나 비단길을 통하여 중국으로 들어와 ‘경교(景敎)’라는 이름으로 자리를 잡을 때였다. 그 후 박해로 인하여 자취를 감추었고, 1300년경에는 프란치스코회 선교사들이 활약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러나 어떤 선교활동도 중국인들의 생활 속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였다. 이냐시오 로욜라와 함께 예수회를 창설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성인이 1552년 일본을 거쳐 중국선교를 시도하였으나 질병으로 말미암아 상짜오 섬에서 꿈을 접어야 했다. 그 후 예수회 선교사들이 대만, 마카오, 홍콩 등지를 중심으로 선교를 시도하였고, 1582년 마태오 리치(Matteo Ricci, 1552-1610)에 의해 본격적인 중국본토에 대한 선교가 시작되었다. 선교방법상 예수회의 중국문화 수용정책이 유럽교회로부터 비난을 받으면서 도미니코회와 아우구스티노회 등이 진출하면서 의례문제로 중국황실과 갈등을 빚게 되었고, 열강대국의 침입과 전쟁 등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수많은 선교사와 중국신자들이 순교하였다. 오늘날 중국의 그리스도교는 “외부의 도움 없이 스스로 교회를 관리하고 자족하며 전교한다.”는 3자 정신에 의해 당국의 정책에 의해 육성되는 ‘애국교회’와 공공연히 박해받는 ‘지하교회’로 구분된다.◆


[오늘의 복음]  마태 10,16-23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성령이시다.>


  16) “이제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은 마치 양을 이리 떼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양순해야 한다. 17) 너희를 법정에 넘겨주고 회당에서 매질할 사람들이 있을 터인데 그들을 조심하여라. 18)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왕들에게 끌려가 재판을 받으며 그들과 이방인들 앞에서 나를 증언하게 될 것이다. 19) 그러나 잡혀갔을 때에 ‘무슨 말을 어떻게 할까?’ 하고 미리 걱정하지 마라. 때가 오면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일러주실 것이다. 20)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성령이시다. 21) 형제끼리 서로 잡아 넘겨 죽게 할 것이며, 아비도 또한 제 자식을 그렇게 하고 자식도 제 부모를 고발하여 죽게 할 것이다. 22) 그리고 너희는 나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참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23) 이 동네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여라.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이스라엘의 동네들을 다 돌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복음산책]  약해질 때와 강해질 때


  엄격한 선교수행지침(10,5-15)을 하달하신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파견을 마치 양들을 이리들 가운데로 보내는 것에 비유하신다. 이 비유는 장차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미리 암시하는 한 폭의 그림과도 같다. 그렇다고 예수께서 살아 계시는 동안 당장에 이와 같은 일이 나는 것은 아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죽음 이후에 복음선포자와 신자들이 당하게 될 박해를 미리 예고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예수님 자신이 얼마 있지 않아 받게 될 수난과 죽음에 대한 예고이다.


  오늘 복음은 두 가지 형태의 박해예고와 두 가지 모양의 위로약속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는 유대인들과 로마제국으로부터의 박해예고(17-18절)와 성령에 의한 변호보장 약속이며(20절), 둘째는 가족의 고발과 세상으로부터 받게 될 미움예고(21-22절)와 종말론적 구원보장 약속(23절)이 그것이다.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알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일에 빛나는 승리나 커다란 효과가 보장되기보다는 처절한 박해가 준비되어 있음은 예수님 스스로가 그런 박해를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스승께서 그 길을 걸어가셨고, 제자들도 스승의 길을 가게 될 것이다. 이 길은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자들이 비켜갈 수 없는 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길은 혼자 가야하는 외로운 길이 아니다. 하느님의 성령과 예수님의 성령께서 함께 가시며, 그 길 끝에는 아버지의 품과 천상의 월계관이 기다리고 있다.


  그 마지막 길을 가는 동안 예수님의 복음은 세상의 무관심과 적대심을 만나게 된다. 복음의 입장에서 볼 때 적대심이 무관심보다는 차라리 더 낫다. 적대심은 박해를 불러일으키고, 박해는 복음을 공공연히 드러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 때 복음이 취하는 태도는 박해자의 태도와는 정반대이다. 이것이 바로 양과 이리의 다른 점이다. 복음의 강점(强點)은 오히려 어린양과 같은 약함이다. 이것이 곧 오늘날 교회가 세상에 대하여 취해야 하는 자세이다. 이는 재물과 명예와 권력에는 약하지만 청빈과 사랑과 봉사에는 강하다는 말이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 교회는 그 동안 세상과의 법적 조약이나 협정을 통하여 확고한 지위와 특혜를 영위하고 누려왔으며, ‘신성모독’이나 ‘종교적 타부’ 등의 방패를 세상에 내걸고 온갖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왔으며, 지금도 많은 부분 그렇게 하고 있다. 신부(神父)인 나 자신도 그 맛에 젖어가고 있음을 보면서 복음선포자로서 복음 앞에 부끄러움을 금할 길이 없다. 교회는 자신이 인간적인 인정과 보호를 얻으면 얻을수록, 인간적 권력으로 자신을 보호하면 할수록 약해지고, 무력해지고, 별다른 의미 없는 그 무엇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는 더 나아가 복음이 지향하는 ‘너희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마태 25,40)에 대한 관심과 연대감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종국(終局)에 가서는 교회와 복음의 결별을 초래할지도 모를 일이다.◆[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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