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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산책) 복음선포의 첫걸음 : 진정한 이웃사랑
작성자박상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4-07-11 조회수1,063 추천수7 반대(0) 신고
 

◎ 2004년 7월 11일 (일) - 연중 제15주일 (다해)


▣ 성 베네딕토 (480-547) 아빠스 기념 (없음)


수도생활의 아버지요 서방교회의 수호성인으로 불리는 베네딕토 성인은 480년 이탈리아 움브리아의 누르시아(Nursia)에서 태어났다. 공부를 위해 로마에 갔으나 얼마 후 세속 도시의 무질서한 생활을 피하여 수비아코(Subiaco)의 동굴에 들어가 3년간 은수자 생활을 한다. 그 후 주변에 12개의 작은 수도회를 세웠다. 529년부터 후일 수도생활과 종교문화의 중심지가 될 몬테카시노(Monte Cassino)에 수도원을 세우고, 여기서 그 유명한 ≪수도규칙(regula benedicti)≫을 저술하였다. 이 규칙서는 당시 서방과 동방의 수도전승을 총 망라하고 있으며, 성서묵상을 통한 풍부한 영적 체험과 함께 성인의 정신과 지혜를 담고 있다. 성인은 547년 3월 21일 세상을 떠나 완덕(完德)의 길로 갔다. 교회는 8세기부터 7월 11일로 성인의 축일을 지낸다. 베네딕토 성인께 붙은 아빠스는 대수도원장(大修道院長, abbot/영, abbas/라, abba/히)을 뜻한다. 특히 아빠스는 베네딕토 수도회와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등 대수도원의 원장을 칭하며, 주교(主敎)와 대등한 서열을 가진다. 베네딕토 성인이 저술한 ≪수도규칙≫의 원문과 번역은 성 베네딕토회 왜관 수도원 홈페이지 <http://www.osb.or.kr>를 참조할 수 있겠다.


[오늘의 복음]  루가 10,25-37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2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서서 예수의 속을 떠보려고 “선생님, 제가 무슨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26) 예수께서는 “율법서에 무엇이라고 적혀 있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었느냐?” 하고 반문하셨다. 27)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생각을 다하여 주님이신 네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하였습니다.” 이 대답에 28) 예수께서는 “옳은 대답이다. 그대로 실천하여라. 그러면 살 수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29) 그러나 율법교사는 짐짓 제가 옳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30)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 사람이 가진 것을 모조리 빼앗고 마구 두들겨서 반쯤 죽여 놓고 갔다. 31) 마침 한 사제가 바로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는 피해서 지나가 버렸다. 32) 또 레위 사람도 거기까지 왔다가 그 사람을 보고 피해서 지나가 버렸다. 33) 그런데 길을 가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그의 옆을 지나다가 그를 보고는 가엾은 마음이 들어 34) 가까이 가서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매어 주고는 자기 나귀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가서 간호해 주었다. 35) 다음날 자기 주머니에서 돈 두 데나리온을 꺼내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잘 돌보아 주시오.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갚아드리겠소.’ 하며 부탁하고 떠났다. 36) 자, 그러면 이 세 사람 중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준 사람은 누구였다고 생각하느냐?” 37) 율법교사가 “그 사람에게 사랑을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복음산책]  복음선포의 첫걸음 : 진정한 이웃사랑


  지난 연중 제14주일의 ‘일흔 두 제자의 파견’(루가 10,1-12.17-20)에 관한 복음을 통하여 우리는 각자가 예수님으로부터 파견된 사도로서 선교의 결과보다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한다는 자체를 기쁨으로 여길 수 있음을 묵상하였다. 아울러 복음을 선포한다는 것은 우선 파견되어 간 곳에 ‘하느님의 평화’를 기원하는 것이며, 그 다음으로 병자를 치유하고 마귀들을 쫓아내며 하느님나라가 이 땅에 도래하였음을 전하는 일임을 알았다. 병자치유와 구마(驅魔)를 통하여 세상에 평화를 심는 일이 바로 도래한 하느님나라의 직접적인 표징인 셈이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갈수록 병자의 치유와 구마의 기적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좀처럼 우리들 안에 없음을 보게 된다. 그렇다고 물러서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복음선포는 모든 신자들의 가장 우선적인 사명이기 때문이다. 정말 우리에게 병자치유도 구마의 능력도 없는 것일까? 필자는 있다고 대답하고 싶다. 오늘날 고도로 발달된 과학문명의 시대에 사람들은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적이나 이변을 기적으로 생각한다. 그것은 일의 결과만 보려하기 때문이다. 어떤 일이든 원인과 과정 없이 결과만 있을 수는 없다. 따라서 기적적인 결과는 통상 그 원인이 아주 평범한 원칙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즉, 병자를 치유하고 세상에서 악의 세력을 몰아내어 하느님나라를 세우고 그분의 평화를 심는 것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가장 기본적인 단계에서 시작된다는 말이다. 병자의 치유는 병자를 돌보는 데서, 악의 세력을 몰아내는 일은 내가 악을 근절하는 데서 시작하기 않겠는가.


  그러므로 시작을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루가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일 중요한 가르침을 손꼽으라면 ‘많은 일 중에 가장 요긴한 하느님 말씀의 경청’(10,38-42), ‘주님의 기도와 옳은 기도에 대한 가르침’(11,1-13)과 함께 단연 오늘 복음이 보도하는 ‘참된 이웃사랑에 관한 가르침’이다. 예수님의 참된 사랑에 관한 가르침은 공관복음 전체에 나타나는 가장 핵심적인 말씀이다. 그런데 원전(原典)이 되는 마르코복음(12,28-34)이나 이를 참고한 마태오복음(22,34-40)에서는 첫째가는 계명으로 ‘하느님사랑’(신명 6,4-5)을, 둘째가는 계명으로 ‘이웃사랑’(레위 19,18)을 제시하면서 이 두 계명이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이며, 가장 큰 계명이라 요약하고 있다. 그러나 루가복음에서는 ‘계명’이라는 말을 찾아볼 수 없다. 루가가 원전을 각색하고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곁들여 고유자료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이 바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이다. 우리는 여기서 하느님나라의 모든 시작을 볼 수 있다.


  마르코와 마태오복음의 같은 대목을 살펴보면, 한 율법교사가 예수께 와서 “모든 계명 중에 어느 것이 첫째가는 계명입니까?” 하고 질문을 던진다. 이 질문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직접 사랑의 이중계명을 설파하신다. 그런데 루가복음에는 한 율법교사가 예수께 와서 “선생님, 제가 무슨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25절) 하고 묻는다. 그 질문에 예수께서는 직접 대답을 주시지 않고, 그 교사로 하여금 스스로 답을 찾도록 유도하신다. 율법교사는 자신이 모세의 율법서에서 읽은 대로 ‘하느님사랑과 이웃사랑’을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답으로 제시한다. 이에 예수께서는 율사의 대답을 옳은 답으로 인정하시고 ”그대로 실천하라. 그러면 살 수 있다“(28절) 하고 말씀하신다. 여기에 루가가 계획하는 편집의도가 들어 있다. 루가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조건으로 사랑의 실천, 즉 행동을 거듭 강조하고자 한 것이다. 고맙게도 루가는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29절) 라는 율법교사의 질문을 추가하여 참된 사랑의 실천방법을 가르쳐준다. 이번에는 예수께서 직접 수고를 하신다. 예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하여 ‘누가 나의 이웃인지?’, 그리고 ‘내가 누구의 이웃이 되어야 하는지?’를 한꺼번에 가르쳐 주신다. ‘이웃’이란 말 그대로 자신을 기준으로나, 타인을 기준으로 했을 때 ‘제일 가까이 있는 사람’, 즉 나의 도움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필요로 하는 사람인 것이다. 물리적으로나 장소적으로 가까이 있는 사람이 이웃이긴 하지만 그것으로 이웃사랑이 실천되지는 않는다. 물론 함께 있어주는 것도 사랑실천이 될 경우도 있다. 그러나 오늘 비유에서는 가장 가까운 곳에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실제로 사랑을 베푸는 것을 예수께서는 ‘이웃사랑’이라고 하신다.


  비유에 등장하는 첫째 인물인 사제는 길을 가다 강도를 만나서 가진 것을 다 빼앗기고 얻어맞기까지 하여 반쯤 죽어 있는 사람의 제일 가까운 이웃이 되었으나, 사랑을 베풀지 않았다. 사제의 머릿속에는 위급에 처한 사람보다는 ‘시체에 몸이 닿은 사람은 칠 일간 부정하다’(민수 19,11)는 규정이 먼저 떠올랐을 것이다. 둘째 인물인 레위 사람은 성전제사의식에서 제사장을 돕거나 종교적 업무에 종사하는 부류로서 육체적이 노동을 하지 않고도 십일조를 받아 걱정 없이 살 수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괜한 일에 관여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달랐다. 강도를 만난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가던 길이었으니, 그 사람은 유다인임이 틀림없다. 유다교의 정통성을 상실한 이유로 사마리아 사람들이 유대인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받았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이 유다의 진정한 이웃이 되는 순간이었다. 비유에서 보듯이 사마리아 사람은 심하게 다친 유대인에게 기대이상의 사랑을 베풀어준다. 강도를 만나서 반쯤 죽게 된 사람에게 이웃이 된 자는 사제, 레위, 사마리아 사람 셋이었다. 사제와 레위는 그 사람을 보고 동정심을 가지긴 했겠지만, 피해서 지나가 버림으로써, 즉 가까운데서 먼 곳으로 가버림으로써 이웃이 되기를 거부하였고, 이로 인해 이웃사랑의 실천에는 실패했다. 그러나 유다인과 원수지간이었던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를 만난 사람의 진정한 이웃이 되었고, 실제로 이웃사랑을 실천하였다. 사랑은 바로 이렇게 행하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다. 멀리 가지 않고 가장 가까이에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을 사랑하는 그것이 바로 기적의 시작이요, 하느님나라와 그분의 평화를 이 땅에 심는 것이다.◆[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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