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어떤 말씀을 고를까?
작성자이인옥 쪽지 캡슐 작성일2004-07-13 조회수1,214 추천수4 반대(0) 신고

독서: 이사 7,1-9

복음: 마태 11,20-24


오늘 독서는 희망을 가지라고 위로하는 하느님의 메시지가 담겨있다.

오늘 복음은 저주를 퍼붓는 예수님의 메시지가 담겨있다.

언제는 희망을 가지라 하고, 언제는 저주를 퍼붓고 왜 이렇게 ‘이랬다 저랬다’ 인가?


아침에 일어나 오늘 하느님께서 어떤 말씀을 주실지 듣고자 성서를 폈다.

“그러니 잘 들어라.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오히려 더 가벼운 벌을 받을 것이다."

‘앗! 설마 이건 내게 하는 말이 아니겠지.’ 다시 펼쳤다.

“이제 팔을 벌리고 남이 와서 허리를 묶어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끌고 갈 것이다”

‘앗, 이건 또 뭐야?’ 다시 덮었다. ‘삼 세 번은 해봐야 정확하다지?’

이런 식으로 성서를 읽는다면 이거야말로 ‘오늘의 운세’를 보는 편이 나을 것이다.


이번 주일 복음,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예수께서는 율법교사에게 물으신다.

“율법서에 무엇이라고 적혀 있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었느냐?”

즉 성서에 적혀있는 것은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알아들었느냐는 물음이다.

문자로 쓰여진 그대로 읽고 듣는 것이 첫 번째의 물음이고, 그 안에 담긴 의미가 뭐냐는 것이 두 번째의 물음이다.


성서는 그 시대에 살고 있던 사람들에게 주신 주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그 시대가 어떤 시대인가를 알아야 주님의 말씀의 진의를 알 수 있음은 당연하다.

그리고 내가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는지도 잘 알아야 그 말씀을 내게 맞게 적용할 수 있다.

이것을 파악하는 눈이 잘못되었을 때, 그분의 말씀은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 같고,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 자주 헷갈리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오늘 독서에서 예언자 이사야를 보내 희망의 메시지를 들려주는 상황은 어떤 상황일까?


유다왕 아하즈 시대의 일이다. 당시, 아람 왕국(다마스커스가 수도)과 북 이스라엘 왕국(사마리아가 수도)은 자신들을 위협하는 아시리아의 세력에 대항하려 동맹을 맺었다. 이들은 유다왕국까지 동맹군으로 끌어들이려고 했지만, 유다 왕 요담과 그의 아들, 아하즈는 이를 거절하였다. 이로 인하여 시리아(=아람)와 북 이스라엘의 동맹군과 유다 왕국은 대적하게 되었다.


드디어 오늘 독서 첫 줄에서 말하는 '시리아와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왔으나 점령하지 못한' 일까지 생기게 되었다(2열왕 16,5). 계속되는 이 동맹국들의 위협에 당황한 아하즈는 막대한 조공을 바치고라도 강대국 아시리아에 도움을 청하리라 결심한다(2열왕 16). 이사야가 아하즈에게 파견된 시점은, 아하즈가 이 결심을 굳히기 직전이었다.


이사야는 주님의 분부대로 아들 '스알야숩'을 데리고 간다. '스알야숩'은 '남은 자가 돌아오리라'는 뜻이다. 이름의 의미대로 '희망' 또는 '약속'을 상징한다. 그는 '표백물 건조장에 이르는 길가 윗저수지의 수로 끝으로 가서' 아하즈를 만난다. 이 곳을 선택한 것도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있다. 즉 이곳은 예루살렘 성이 포위 될 경우, ‘윗 저수지’에서 ‘아랫 저수지’로 물길을 변경할 수 있도록 조절할 수 있는 곳이다. 그러니까 아들의 이름과 장소가 말해주는 의미로 볼 때, 당시의 임박한 위기 상황을 설명해주는 대목이다.


그 위기 앞에서 아하즈는 '바람에 흔들리는 수풀'같았다. 이사야는 그런 아하즈에게 '희망'과 '용기'를 가지라는 주님의 말씀을 전달한다. "진정하여라. 안심하여라. 겁내지 마라". '르신이 이끄는 시리아, 그리고 르말리야의 아들(므나헴왕을 비하시킨 호칭)이 격분한다고 해서 정신을 잃지 마라'. '그들은 연기 나는 두 횃불 끄트머리(거의 다 타서 연기만 피우는 장작 끝)에 불과하다.' '그들이 유다로 밀고 쳐들어가, 다른 왕을 세우자고들 하지만' 주 하느님께서 허락하지 않는다면 어림도 없는 일이라고 한다.


이사야는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덧붙인다.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결코 굳건히 서지 못하리라." 아무리 막다른 골목, 풍전등화의 위기에 몰려있다 하여도 주님이 지켜주심을 믿는다면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니 아하즈는 강대국 아시리아를 믿을 것이 아니라 주님을 믿으라는 말이다.


복음에서 저주를 받고 있는 대상은 예수님의 공생활 대부분을 바쳐 가르쳤고 기적을 행하셨던 갈릴래아 지방의 중심지, ‘코라진’, ‘베싸이다’, ‘가파르나움’이다. 이 지역 사람들은 갈릴래아 호수의 풍부한 물을 자원으로 비교적 풍요롭고 윤택한 삶을 이룩하고 있었다. 그들의 상황은 물질적인 여유 속에서 비교적 안락한 상황이었다.


오늘은 어떤 상황인가? 우리 서민들은 내일을 보장받을 수 없이 항상 위기의식 속에서 살고 있는 요즘이다. 이런 때에는 독서의 상황 속에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전언을 들어야 한다. 희망이 없는 곳에는 희망을 불러일으켜줄 어떤 가시적인 것을 보여주어야 희망이 생길 것 같지만 그것이 아니다. 그 때에도 여전히 ‘주님께 대한 믿음’을 불러일으켜야한다. 아하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을 믿지 않고 눈에 보이는 강대국을 믿었다가 망했다. 


오늘 형편이 좋고 여유가 있고 살만한 사람들은 오늘 복음의 상황 속에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전언을 들어야 한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베푼 기적들을 띠로와 시돈, 소돔에서 보였더라면...’ 이라며 꾸짖으신다. 예수님이 베푼 기적은 어떤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그분이 베푼 기적은 당신이 하느님임을 증명하려던 것이 아니다. 그 기적의 의미는 하느님 나라가 이 땅에서 실현되고 있음을 알려주시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 하느님 나라를 같이 이룩해야 한다는 것을 깨우쳐주시려는 것이었다. 그분은 행동하시며 또한 그 의미를 가르쳐주셨다. 그렇다면, 그렇게 많은 기적과 가르침을 받은 도시들이라면 당연히 그 의미를 깨닫고 그 일에 동참했어야했다. 그러나 아직도 자신의 안녕과 안전에만 머물러 있는(회개하지 않은) 그들은 이제 주님의 꾸지람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제 자신이 어떤 상황에 속하는지는 자신이 분별할 차례다.

그리고 그에 맞는 하느님의 전언을 들어야한다. 그리고 그대로 살아야 할 것이다.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