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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산책) 법의 멍에와 예수님의 멍에
작성자박상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4-07-15 조회수1,068 추천수10 반대(0) 신고
 

◎ 2004년 7월 15일 (목) -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


▣ 성 보나벤투라 (1218-1274) 주교 학자


  보나벤투라 성인은 1218년경 이탈리아 바뇨레죠(Bagnoreggio)에 태어나 요한으로 세례를 받았다. 어린 시절 중병에 걸렸으나 아씨시의 프란치스코(1181-1226) 성인에 의해 치유되었고, 그때부터 ‘좋은 미래’라는 뜻의 보나벤투라로 불리게 되었다. 당시 성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가 공부하던 파리에서 철학공부를 마치고 25세의 나이로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입회한다. 그는 할레스 출신의 알렉산더로부터 신학을 공부하였고 1257년에 수도회의 총원장에 선출되어 마지막 순간까지 지혜와 총명함으로 수도회를 이끌었다. 1273년에 교황 그레고리오 10세(1271-1276)는 성인을 로마근교 알바노(Albano)의 추기경에 임명하였다. 그 후 성인은 교황의 청원으로 제2차 리용공의회(1274)를 심혈을 기울여 준비하였고, 특히 갈라진 서방교회와 동방교회의 일치를 위한 가교적(架橋的)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성인은 공의회가 한창 진행 중이던 1274년 7월 15일 아침에 리용에서 세상을 떠났다. 성인의 죽음은 교황과 공의회에 참석한 모든 교부들에게 큰 슬픔이었다고 한다. 보나벤투라 성인은 아우구스티누스(354-430) 성인의 신학적 사고와 노선을 고수하면서 신학의 다양한 분야에서 큰 업적(45개)을 이룸으로써, 당대 토마스 아퀴나스와 함께 스콜라 철학과 신학의 전성기를 수놓았다. 1482년 교황 식스토 4세(1471-1484)에 의해 시성(諡聖)되었고, 1588년 교황 식스토 5세(1585-1590)께서 성인에게 “세라핌의 박사”(Doctor seraphicus)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오늘의 복음]  마태 11,28-30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


28)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 30)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복음산책]  법의 멍에와 예수님의 멍에


  우리가 삶을 영위하는 사회는 양심과 도덕, 풍습과 관습, 그리고 법률과 헌법의 조화로운 지배를 받는다. 올바른 양심과 도덕은 좋은 풍습과 관습을 만들어 주며, 이는 또다시 정감(情感)과 평화(平和)가 넘치는 사회를 만들어 준다. 사람들의 양심과 도덕이 개인적인 차등(差等)을 보이고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법률과 헌법이 등장한다. 법(法)이란 몇 사람의 생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많은, 또는 모든 사람들의 뜻을 모아 제정되는 것이기에 다같이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준법정신(遵法精神)은 법을 실제로 지키려는 의지(意志)이며, 그 나라 국민들의 문화수준을 나타내는 척도라고 한다. 선진(先進) 국민일수록 준법정신이 강하다는 것은 그만큼 문화수준이 높다는 말이다. 그러나 문화수준을 높이자고 법을 지키는 것은 아니다. 법 이전에 사람은 인간적이고 보편적인 양심과 도덕을 먼저 따라 행동해야 한다. 그러므로 법이 있다는 사실은 어떤 의미로는 우리 인간의 양심과 도덕이 인간적이고 보편적이지 못한 현실을 폭로하는 것과도 같다. 법을 제정해야만 하는 현실을 한편으로는 통탄해야 하겠지만, 이왕에 제정된 법은 다른 한편으로 모두가 준수해야할 의무를 요구하는 것이다.


  법(法)이란 무릇 한자어가 뜻하듯이 ‘물(水)이 가는(去) 것’이다. 절대 거꾸로 가지 않고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만 가며, 막히면 머물고, 넘치면 다시 가는 물의 흐름이 곧 법이요, 법은 극히 자연스런 이치(理致)라는 말이다. 이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양심과 도덕에 따라 자연스럽게 법의 이치를 꿰뚫을 수 있다는 말이다. 결국 법은 인간의 양심과 도덕에 따른 자연스러움을 제약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법은 어떠한가? 어느 변호사의 말을 들으니 우리나라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법은 다 모아 놓았다고 한다. 독일, 미국, 일본의 좋은 법은 다 갔다 놓았다는 것이다. 법이 좋다는 말은 사람이 할 일이 없다는 것이다. 법 이전에 사람은 자신의 양심과 도덕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고 했다. 양심과 도덕, 올바른 양심과 보편적인 도덕에 따라 행동한 사람이 법(法)을 잘 몰라서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유린(蹂躪)당하고, 경제적 손해를 보며, 사회적 불이익을 당해야 하는 국민이 있다면 대한민국의 법은 이 국민 앞에 잘못을 빌어야 한다. 시대에 뒤떨어지는 비현실적인 법조문 하나 때문에 손해를 보고 이로 인해 심적 고통을 당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강한 자에게는 법을 피할 길을 가르쳐주고 약한 자에게는 이 법, 저 법으로 올가미를 씌워 길바닥에 내동댕이치는 그런 조국의 현실을 보면서 오늘 복음이 들려주는 예수님의 말씀이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다.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은 613 가지의 율법을 짊어지고 살았다.(금령 365개, 명령 248개) 이런 율법 때문에 고생하고 허덕이는 사람들을 예수님은 당신께로 초대하신다. 예수님께서 편히 쉬게 해 주시겠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당신께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법의 멍에를 벗겨주시고, 당신의 멍에를 지워주시고자 하신다. 예수님의 멍에는 법이 아니라 가르침이며, 최종적으로는 사랑으로 요약된다. 그것은 올바르고 보편적인 양심과 도덕이며, 훈훈하고 정이 넘치는 관습과 풍습이다. 이는 자기가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해주는 것(황금률: 마태 7,12)이며, 하느님과 이웃을 동시에 자기 몸같이 사랑하는 것(사랑의 이중계명: 마태 22,34-40)이다. 물론 이 사랑은 나중에 십자가의 신비로 그 알맹이를 채우게 된다. 누구든지 사람은 법의 멍에든 십자가의 멍에든 하나를 지고 가며 살아야 한다. 법의 멍에는 사람을 노예로 만들지만, 예수님의 멍에는 사람을 겸손하고 온유하게 만든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예수님의 멍에를 지고 예수님께 배우며 살아갔으면 좋겠다.◆[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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