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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산책) 활동의 평일과 관상의 주일
작성자박상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4-07-18 조회수913 추천수7 반대(0) 신고
 

◎ 2004년 7월 18일 (일) - 연중 제16주일 (다해)

* 오늘 농민주일을 맞이하여 농민들의 땀과 노동에 정당한 보상을 있기를 빕니다.


 

[오늘의 복음]  루가 10,38-42

<마르타는 자기 집에 예수를 모셔 들였다. 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택했다.>


  38) 예수의 일행이 여행하다가 어떤 마을에 들렀는데 마르타라는 여자가 자기 집에 예수를 모셔 들였다. 39) 그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다. 40) 시중드는 일에 경황이 없던 마르타는 예수께 와서 “주님, 제 동생이 저에게만 일을 떠맡기는데 이것을 보시고도 가만두십니까? 마리아더러 저를 좀 거들어주라고 일러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41) 그러나 주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마르타, 마르타, 너는 많은 일에 다 마음을 쓰며 걱정하지만 42)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택했다. 그것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


[복음산책]  활동의 평일과 관상의 주일


  오늘복음을 묵상하기 전에 지난 주일복음을 다시 한번 상기할 필요가 있다. 지난 주일복음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방법이 하느님사랑과 이웃사랑에 있음을 가르쳐 주었다. 하느님사랑은 이웃사랑으로 실현되며, 이웃사랑으로 하느님사랑은 증명된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그 가치를 잃어버릴 뿐 아니라 아예 빈말이 될 수도 있고 어쩌면 하느님사랑 자체가 불가능할 수도 있다. 이웃사랑의 구체적인 예로는 강도를 만나 가진 것을 다 빼앗기고 두들겨 맞아 반쯤 죽어 있는 사람을 보고 지체 없이 사랑을 실천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가 언급되었다.(10,29-37) 이 비유에서 사제와 사제들을 보조하는 레위사람은 반쯤 죽어 있는 그 사람을 보고도 외면하여 자기들의 갈 길을 갔다. 사제는 제사를 드리기 위해, 레위 사람은 그 제사를 보조하기 위해 바삐 갔을 것이다. 가장 가까이에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강도당한 사람보다는 하느님께 제사를 올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하느님사랑과 이웃사랑은 철저하게 구별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제와 레위 사람이 제사를 드리고 난 후 집으로 가는 길에 강도당한 그 사람을 보았다고 가정하더라도 그들은 외면하고 자기들 갈 길을 갔을 것이다.   


  오늘복음은 하느님사랑과 이웃사랑을 다시 한번 조명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오늘복음은 마리아와 마르타가 전교 여행 중이던 예수님과 그 일행을 자기 집에 손님으로 모셔 들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요한복음에는 이들 자매가 오빠인 라자로와 함께 예루살렘에서 동편 요르단강 쪽으로 3Km 정도 떨어진 베다니아에 살았다고 한다.(요한 11,1) 그런데 루가복음이 말하는 ‘어떤 마을’(38절)이 베다니아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오히려 베다니아가 아닐 가능성이 훨씬 높다. 왜냐하면 예수님과 그 일행이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가는 중(9,57)이긴 하지만, 복음의 전후문맥을 살펴보면 예수님은 아직 예리고 근처(18,35)에도 이르지 못하셨기 때문이다. 루가에게 있어서 지리적 위치는 그리 중요한 요소는 아니다. 루가는 하느님사랑과 이웃사랑이라는 ‘사랑의 이중계명’을 좀더 전개하여 마리아와 마르타의 서로 다른 행동양식에 적용시키려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루가는 예수를 손님으로 맞이한 마리아와 마르타에게 ‘사람이 살아가는데 가장 필요한 것’을 이 무엇인지를 부각시키고 있다.


  마르타의 집에 예수님만이 아니라 적어도 12제자들이 함께 손님으로 들어갔을 것이기에 뜻밖에 많은 손님을 맞은 마르타의 불평은 지극히 당연하다. 일손이 모자라도 한참 모자랐을 것인데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으니 마르타는 속으로 마리아를 원망하고 있었을 것이다. 통상 집에 손님이 오면 음식으로 손님을 접대하는데 바쁜 가족도 있을 것이고, 와중에 손님 곁에서 대화를 꾸려나가는 가족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흔히 있는 일로서 같은 자매끼리 마르타처럼 누구는 일하고 마리아처럼 누구는 일하지 않고 손님 곁에서 노닥거린다면 자매지간에 꼴사나운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마르타도 자신의 불평을 예수께 말씀드린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마르타의 불평을 걱정거리로 치부하시고 ‘말씀을 듣는’ 마리아의 태도를 오히려 칭찬하시면서 마리아가 택한 그 몫을 빼앗지 말라고 하신다. 


  교회는 성서가 전해주는 마리아의 태도에서 ‘관상(觀想)적 모범’을, 마르타의 태도에서 ‘활동(活動)적 모범’을 예수님을 따르는 방법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살아가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뿐이며, 그것이 바로 마리아가 택한 것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말씀을 묵상하는 관상’을 ‘손님 시중을 드는 활동’보다 더 중요하다는 말씀으로 들리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12세기 이후 프란치스코 성인과 도미니코 성인을 중심으로 활동수도회들이 형성되었을 때 교회 안에는 통상 관상수도회를 활동수도회보다 더 상위의 것으로 취급하는 풍습이 실제로 생겼다. 이 풍습은 관상과 활동을 동시에 행할 수 없는 덕목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이는 곧 하느님사랑과 이웃사랑의 등급을 매기는 일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성서학자들은 이 대목을 다르게 해석한다. 하느님사랑과 이웃사랑은 서로 떼어 생각할 수 없는 것이므로 관상과 활동은 서로 보완적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이론과 실천의 관계와도 같은 것이다. 실천이 없는 이론은 공론(空論)이나 빈말이 될 것이고, 이론이 없는 행동은 동물적이거나 본능적 행위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꼭 그렇다기보다는 그럴 수 있다는 말이다.


  세상에는 하느님사랑을 모르는 이웃사랑도 많다. 어떤 이웃사랑이 하느님사랑을 모른다고 해서 목적 없는 빈 사랑이 될 수만은 없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다르다. 우리의 이웃사랑은 그 바탕에 하느님사랑을 깔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즉 우리의 모든 활동은 그 저변에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충실한 관상이 자리하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바쁘게 움직이는 6일간의 일상적 활동 다음에 하느님께 감사하고 그분의 말씀을 묵상하여 힘을 얻는 일요일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마리아처럼 늘 예수님의 발치에만 앉아 있을 수 없으며, 마르타처럼 늘 손님들의 시중만 들 수는 없다. 그래서 일요일도 있고 평일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일요일은 관상의 날이며, 6일간 활동의 결산이며, 또 다른 6일간 활동의 시작이다. 그래서 관상은 활동할 수 있는 에너지를 하느님의 말씀으로부터 얻어 자기 안에 축적하는 방법이며, 활동은 축적된 에너지를 이웃에 쏟아 하느님을 위한 창조를 이룩하는 거룩한 행위가 되는 것이다.◆[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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