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자리를 잘못 잡았다!
작성자이인옥 쪽지 캡슐 작성일2004-07-18 조회수1,204 추천수7 반대(0) 신고

독서: 창세 18,1-10ㄱ
복음: 루가 10,38-42

 

제1독서에는 아브라함이 지나가던 나그네 셋을 환대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나그네들이 바로 하느님의 천사들(또는 하느님)이었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나그네를 극진히 대접하여 뜻하지 않은 행운(자식을 갖는)을 얻었다.

 

복음에는 마르타가 예수님을 모셔들이고 환대하는 이야기다. 그런데 실컷 환대했던 마르타는 칭찬도 못듣고, 가만히 앉아 있었던 마리아가 칭찬을 듣는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오늘 복음은 '활동과 기도'라는 주제로 수없이 강론을 들었을 것이므로 제1독서와 연결해서 다른 각도로 묵상해보는 것도 흥미있을 것같다. 미리 이야기하자면, 주님을 모시는 자세가 어떤가를 한번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참 바쁠 때 마리아가 도와주질 않고 있으니 마르타의 심정이 어떻겠느냐 하는 각자의 입장들은 이 묵상에서는 접어두자. 지금 관심을 가지려고 하는 것은 마르타와 마리아가 주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어떤 위치(자리)를 잡고 있는가 하는 문제다.

 

마르타는 자신의 조급한 마음 때문에 마리아에게만 불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불만이 주님에게까지 올라가고 있다. "마르타는 예수께 와서 '주님, 제 동생이 저에게만 일을 떠맡기는데 이것을 보시고도 가만 두십니까? 마리아더러 저를 좀 거들어 주라고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한다. 주님이라고 하면서도 실은 자신이 주님의 부당함을 가르치며 주인 행세를 하고 있는 것이다. 마르타의 위치는 주님의 <머리 꼭대기>에 올라가 있다.

 

반면 마리아의 위치는 어디에 있는가? 마리아는 시종일관 <주님의 발치>에 앉아 있다. 물론 같은 루가 복음이 아니라 비교하기는 그렇지만 요한복음 11장에서도 마리아와 마르타 자매가 한번에 나오는데 그 곳에서도 마르타와 주님, 마리아와 주님의 위치가 오늘 복음과 상당히 유사하다는 점을 눈여겨볼 수 있다.

 

시대도 다르고 집필 장소도 다르고 작가도 다른 복음서에서 두 여자의 성격과 주님과의 관계를 비슷하게 쓰고 있다는 점은 실제의 그녀들의 모습이 많이 반영되어 있다는 말일 것이다.

 

요한복음 11장에서 라자로가 죽었다는 전갈을 받고 주님이 오셨을 때, 마르타는 동구 밖까지 마중을 갔으나(20절) 마리아는 집안에만 있었다. 마르타는 주님을 뵙자마자 원망 섞인 말을 한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주님께서 구하시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하느님께서 다 이루어 주실 줄 압니다."

 

한편 주님께서 부르신다는 언니의 전갈을 듣고서야 예수께 달려가는 마리아. 마리아는 주님을 뵙자마자 또 그 앞에 <엎드린다=발치>. 그리고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는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고 말한다. 마리아도 주님께 원망과 불만이 있다. 좀 더 빨리 오셨더라면 오빠는 죽지 않았을 거라는 마음이 가득하다.

 

이런 서운한 원망은 두자매에게 있어서 사실 당연한 감정이었다. 실제로 주님은 11장 첫머리에서 라자로의 위급한 소식을 듣고도 빨리 움직이시지 않고 시간을 끌고 있기 때문이다(3-7절).  마리아는 마르타와 달리 그 다음 주님의 할 일에 대해서는 말이 없다. 주님께 맡겨드리고 있는 것이다.

 

물론 마르타의 두 번째 말마디가 주님께 대한 확고한 믿음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저 습관적인 요구와 지시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은 그 다음 문맥 때문이다. 예수님은 마르타의 요구를 듣고,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하였지만 마르타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하고 말한다. '지금' 살아난다는 확신이 없었다는 이야기다.

 

어떻든 루가복음에서도 요한복음에서도 마르타는 주님께 더 적극적으로 대접을 했고 성의를 다해 모셨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항상 주님께 요구하고 지시하고 불만을 터뜨리기도 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요한복음의 또 다른 곳(12장)에서 마리아는 주님께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닦아 드리고 있다(11,2도 참조) 부수적인 이야기지만, 마리아가 창녀였는가 하는 것은 성서에 명확하게 드러나 있지 않다. 어떻든 그녀가 좋아하는 자리는 언제나 <주님의 발치>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녀는 늘 조용히 듣고 있는 모습을 보인다.

 

오늘 제1독서에서도 아브라함은 천막 앞을 지나가던 나그네들을 <엎드려=발치> 맞는다. 그는 마르타보다 더 분주하게 더 극진히 대접을 한다. 그렇게 하고도 그들이 음식을 먹는 동안 곁에서 시중을 들었다. 성서를 읽는 독자들이 어리둥절할 정도로 마치 나그네들이 주인이고 아브라함이 종인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자, 이제 명확해졌다. 주님을 극진히 대접하는 것은 그분을 주인으로 대접하는 것이다. 그분의 머리 꼭대기에서 '이렇게 해야 한다', '왜 그렇게 하지 않느냐?' '지금부터 요렇게 해달라'고 지시하고 요구하고 가르치려 드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어디까지나 그분의 발치에 앉아서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그리고 기다리는 것이다. 그분의 시중을 드는 것이다. 그것이 주님을 주님으로 모시는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가?
주님의 발치에 다소곳이 앉아서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는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주님의 일에 대해, 그분이 주관하시는 때(시간)에 대해, 그분께 전적으로 맡겨드리고 있는가?

 

주님을 주님으로 모시는 것!..... 다시 한번 생각해볼 일이다.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