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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산책) 예수님의 새로운 가족공동체
작성자박상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4-07-19 조회수1,270 추천수12 반대(0) 신고
 

◎ 2004년 7월 20일 (화) - 연중 제16주간 화요일


[오늘의 복음]  마태 12,46-50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이냐?>


  46) 예수께서 아직 군중에게 말씀하고 계실 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밖에 와 서서 예수와 말씀을 나눌 기회를 찾고 있었다. 47) 그래서 어떤 사람이 예수께 “선생님, 선생님의 어머님과 형제분들이 선생님과 이야기를 하시겠다고 밖에 서서 찾고 계십니다.” 하고 알려 드렸다. 48) 예수께서는 말을 전해 준 사람에게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 하고 물으셨다. 49) 그리고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바로 이 사람들이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다. 50)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복음산책]  예수님의 새로운 가족공동체


  여러분이나 저나 할 것 없이 사람이면 누구나 부모에 의해 세상에 태어난다. 그래서 가정이 만들어지고 그 가정에 속하게 된다. 물론 극소수의 예외가 있기는 하다. 가정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다. 가정은 사회와 국가의 가장 기본적인 터전이며, 가정 없이는 국가도 인류도 없다. 가정이 중요하고 소중한 이유는 그 가정을 이루는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자녀들, 즉 바로 나 자신을 포함한 가정의 구성원 하나하나가 소중하고 중요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 자신이 소중하면 너도 소중한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기에 나의 가정이 소중한 만큼 타인의 가정도 소중한 것이다. 이렇게 소중한 가정이 오늘날 소홀히 여겨지고, 사소한 이유로 쪼개지며, 서로 반목하고 불목하며, 경제적 파탄이나 병고나 사고로 말미암아 심적 물적 고통을 겪고 있는 현실은 참으로 우리 모두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뿐만 아니라, 마치 모든 가정이 오직 나의 가정만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식의 이기주의가 날로 팽배하고 있으며, 거치적거리고 빤하다거나 미래가 없다는 이유로 “가정 만들기”를 기피하는 개인주의나 독신주의가 증가일로에 있다는 현실 또한 안타까움을 더하게 한다. 이 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 거룩하고 모범적인 가정들을 필요로 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와 성 요셉의 성가정이 더욱 그리워지는가 보다.


  사람은 누구나 어느 한 가정에 소속되어 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은 모두 함께 살아간다. 일찍 부모를 잃거나 피를 나눈 형제가 없는 혈혈단신이라 할지라도, 자식이 없어 봉양을 받지 못하는 독고의 노인이라 할지라도, 이 땅위에 홀로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모두가 더불어 살아가며, 또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 누구나 한 가정의 아이로 태어나지만 시간이 지나면 학생이 되고, 어른이 되어 또 다른 가정을 이루어야 하며, 그 속에서 노인이 되어 간다. 우리는 주어진 공간에서 함께 일하고, 매일 같은 사람을 만나고, 낯선 사람과 친분을 쌓으며, 이럴 줄 알았던 사람의 또 다른 저런 면을 체험하기도 한다. 서로 사랑하고 서로를 위해주며, 속이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사람 때문에 기뻐하고, 사람 때문에 아파한다. 그러다가 삶의 실존과 진면목을 깨달을 때면 원하든 않든 하나씩 순서 없이 세상을 떠나야 한다. 뜻하지 않는 불의의 사고로 선뜻 가야하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 남아 있는 사람들의 아픔은 실로 크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세상의 모든 사람은 다 거기서 거기며, 다 똑같다. 그런데 살아있는 동안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재물이 좀 있고, 권력이 좀 있다하여, 없는 사람들을 업신여기고, 종교와 이념이 다르다하여 자신의 것을 강요하며, 타인의 생명과 삶을 가볍게 여겨 무참히 짓밟고 앗아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말이다. 그런 사람들이 자기 피붙이인 가족에게도 그럴 수 있을지 묻고 싶다. 사람의 기원을 따진다면 모든 사람은 다 같은 형제요 자매이며, 한 가족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요즘은 ‘지구가족공동체’, 또는 ‘글로벌가족공동체’라는 말을 하곤 한다. 이 때문에 건전한 재벌들이 평생 모은 재산을 사회에 환원시키고, 뜻있는 곳에 기부금을 내며, 재력이 없는 사람은 자원봉사를 하는 것이다. 모두가 한 가족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 복음은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예수께서도 성모 마리아와 성 요셉이 이루는 가정에서 태어나 30년 동안 가족공동체의 삶을 살았다. 그러나 때가 되자 예수께서는 사람이면 누구나 그렇듯이 자기를 키워준 가족을 떠나 새로운 가족공동체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그렇다고 예수께서 어떤 여인과 결혼을 하여 단란한 가정을 꾸린 것은 아니다. 그분은 더 큰 인류가족공동체를 원하셨으며, 나아가 하느님나라의 가족공동체를 계획하셨다. 예수님은 하늘나라가 우리들이 사는 이 땅위에 도래했다는 기쁜 소식을 사방에 전하면서 그 나라의 가족이 될 사람들을 하나씩 불러 모으기 시작하신 것이다. 그분은 특히 가난하고 아파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그들을 가르치고, 돌보셨다. 어느 날 예수께서 가파르나움의 집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실 때 예수의 어머니와 그 형제들이 문 밖에 서서 예수를 불러달라고 청한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형제’라는 단어가 히브리 문화권에서 아주 폭넓게 사용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방계혈족의 2촌만을 형제라 하지 않고 조부, 증조부, 고조부 등 아버지와 1촌의 관계를 갖는 모든 혈족을 관계상 ‘형제’간이라 하는 경우와 같다. 그렇다면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왜 예수를 찾아와 보자고 하는 것일까? 오늘 복음은 마태오, 마르코, 루가, 즉 공관복음 모두가 미소한 차이로 보도하고 있는 대목이다.(마태 12,46-50; 마르 3,31-35; 루가 8,19-21) 마르코는 예수가 악령에 들려 미쳤다는 소문이 나돌아 예수를 붙잡기 위해서 왔다(마르 3,20-30)고 이유를 대고 있지만, 마태오와 루가는 그 이유를 의도적으로 삭제하였다. 찾아온 이유야 어찌 되었든 마태오와 루가는 이 대목을 두고 다른 목적을 가진 게 분명하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새로운 가족공동체를 선포하는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둘러 있던 사람들을 보시며 말씀하셨다.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냐?”(33절) “바로 이 사람들이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이다.”(34절) 무슨 날벼락 같은 말씀인가? 이 말씀이 허공을 가르며 외쳐지던 순간, 어머니와 형제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은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나마 문밖에 서 있었다는 점이다. ‘피는 물보다도 진하다’고 했는데, 낳아준 어머니와, 같은 조상을 두고 함께 자란 형제들을 무시하고,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들을 두고 어머니며 형제들이라니. 정말 예수는 정신이 나간 사람인가? 그럴 리가 있겠는가. 예수님의 본의(本意)는 그 다음 말씀에 있다. 즉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곧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35절)는 것이다. 이로써 예수님은 새로운 가족관계를 선포하셨다.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예수의 형제자매요, 어머니인 것이다. 예수께서는 혈연적이고 세속적인 가족보다는 정신적이고 영적인 가족공동체를 택하신 것이다. 이 가족공동체는 ‘예수님의 말씀’을 그저 듣고 따르는 사람들을 모아놓은 집합이 아니라, 예수님을 포함한 ‘하느님의 뜻’을 진실로 행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예수께서는 자기 스스로도 하느님을 뜻을 행하는 사람 중의 하나라는 점을 자주 강조하셨다. 그래서 어머니 마리아의 등장이 더 큰 의미를 가진다.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 자신마저도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 중의 하나라면 우리자신은 물론,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도 예외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마리아는 누구보다도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여 이 뜻을 좇아 행하신 분이시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하느님을 뜻을 행한다고 믿고 있었지만 예수께서 그들이 행하고 있는 것이 당신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고 지적하셨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것이 곧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피로 맺어지는 혈연은 한번으로 영원하지만 예수께서는 이 가족관계를 허물어버리시고,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새로운 가족공동체가 설정하셨다. 그 소속기준은 바로 하느님의 뜻을 언제나 행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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