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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46) 착각은 금물
작성자이순의 쪽지 캡슐 작성일2004-07-22 조회수1,092 추천수3 반대(0) 신고

2004년7월22일 목요일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기념일 ㅡ아가3,1-4;요한20.1-2.11-18ㅡ

 

              착각은 금물

 

 

오늘의 복음을 대하면서 그렇게 편한 마음이 들지 않는다.

복음이 기쁜소식이 되어 일상 안에서 주님을 살고 성찰하는 양식으로 삼아 살아가지만 유일하게 오늘 읽혀지는 복음에서는 반감이 형성 된지가 오래되었다.

 

주님을 사랑하는 여인에 대하여 너그러운 자비를 쏟으시는 분이 야속해서 그런 마음이 드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마리아의 순종과 믿음과 사랑을 기록한 복음에 감히 반역을 하려드는 것을 결코 아니다.

 

신앙을 살아가면서 사람들 속에서 격고 느끼고 아프면서 체득한 반감 때문이다.

신자 생활을 하다 보면 마리아 같은 교우들을 종종 보게된다.

열정적이고, 헌신적이며, 물불을 가리지 않고, 몸도 사리지 않으며, 아까움도 없이 펑펑펑 쏟아내는 에너지는 봉사만이 아니다.

돈도 잘 쓰고, 시간도 잘 쓰고, 마음도 참으로 잘 쓴다.

심지어 아내나 남편뿐만 아니라 자식까지도 자신의 종교생활에 절대복종을 시켜버리는 저력을 동원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사랑의 세레나데를 장식하는 묵상란에 찬물을 끼얹고 싶은 심통은 어찌된 심보일까?

 

예수님 시대의 막달라 여자 마리아도 지금의 열정적인 교우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범을 보였으리라고 생각한다.

정말 주님의 제자로서 주님을 사랑하는 여종으로서 아까울 것도 두려울 것도 없는 그림자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나그네 삶을 살으시는 주님께 섬세한 필요조건은 전부가 이 여인의 손에서 해결 되지 않았을까 하는 짐작을 할 뿐이다.

 

그러나 복음서는 구체적 사실을 언급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막달라 여자 마리아의 교우들간의 포용력은 어떠하였는지는 사실적으로 가늠하기 어렵다.

오직 주님을 향한 최상의 낮춤이었고 모범이었을 마리아의 겸손이 존재하였을 것이라고 추측 할 뿐이다. 왜냐하면 주님의 완전성을 믿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모두에게 공정하시고, 모두에게 사랑이시며, 모두에게 가서 전해야 할 몫을 정해 주셨다.

 

그런데 교회살이에서 필요이상으로 열정적인 교우들을 지켜보면 마리아의 그리스도를 향한 충성과 다른 무엇이 있다.

본당 신부님이나 특수 사목에 종사하는 담당 사제에 대한 열정이다.

그 열정이 나쁜 것은 아니다.

그 헌신이 모순인 것도 아니다.

그 사랑이 추한 것은 더욱 아니다.

문제는 우리 주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살아야 할 성직자의 몫이다.

그런 교우를 만난 신부님은 분명히 사도직 살이가 수월하다. 수녀님도 마찬가지다. 그림자 보다 더 쓸모있는 역활을 담당해 주는 측근이 있다는 것은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의 진미이다.

 

주님과 사제가 다른점이 있다면 주님은 신의 눈이 있는데 사제에게는 인간의 눈만 있다는 것이다. 사제에게는 끈임없이 신의 혜안을 따라서 추구해야 하는 소명이 주어졌다.

 

마리아 같은 교우를 둔 사제의 주변은 정리가 잘 된다. 그러나 신자들 속은 시끄럽다 못해 처절하다. 그걸 아시는 신부님을 본 적이 아직은 없다.

행여라도 신부님이 자기 아닌 다른 사람을 통해서 무슨 일을 처리하기 전에 미리 알아서 발바닥에 연기가 나게 뛰기 때문이다.

간섭 안하는 단체가 없고, 모르는 사람이 없으며, 참석 안하는 자리가 없다. 그러니 듣고 보고 느껴서 알려드려야 할 것이 좀 많겠는가?  

 

더 큰 문제는 그 만큼 신부님께서 참석하시는 장소에 모조리 끼어들어 신부님의 일거수 일투족을, 머리에 새기고 눈에 담고 귀에 모아서 가슴에서 이상한 색깔로 염색을 해다가 입 안으로 쏟아낸다는 점이다.

완전히 착각은 자유다.

일반적인 신자들은 신부님과 동석인 자리에 일년에 한 번 커녕은 평생에 한 번도 함께 할 기회가 없는데, 맨날맨날 신부님과 자리를 한다는 교우의 중차대한(?) 발언은 꼭 들어야 하는 것 처럼 분위기가 조성 된다는 점이다.

거기에다 신부님들도 자주 보는 신자에게는 부드럽듯이, 일반적인 교우들에게는 자유스럽지 않다는 점이 부추길 수 밖에 없는 한계이다.

 

그래서 지나치게 되면 같은 활동을 하는 사람도 제거의 대상이 되어

"신부님이 그러시는데......." 로 시작하여서 왕따를 시켜버린다.

그렇다고 평신도의 입장에서는 감히 하느님의 대리자인 신부님께 시시콜콜하고 째째한 말 같지도 않은 내용을 확인하러 가는 걸 포기해버린다. 아니 아예 생각해 보지도 않고 상처로 묻고 끝난다.

그러면 또 신부님께 가서는

"누가 그러는데요........" 라고 자기가 염색한 촌시런 색깔의 보고를 하고!

그렇다고 신부님께서 수 많은 신자를 일일이 찾아 다니면서 확인하는 것 같은 품위없는 짓거리를 하실 수도 없는 일이고, 어쩔 수 없이 맨날 얼굴 보는 사람의 말을 주워들어서 대충 정리하고 말으신다.

그리고 그 본당 떠나면 잊혀질 것이고, 그 사목 안하면 종치는 것이다.

 

문제는 그런신자를 둔 신부님 일수록 편협하다는 것을 알고도 신자살이를 해 본 모든 교우들은 침묵한다는 사실이 비극이다. 

한마디로 기분 나쁘게 말을 한다면 신부님 혼자서 좋고 신부님 혼자서 등신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부님을 향하여 침묵은 금이다라고 가르친 흐름의 결과다. 

그래서 착각은 금물이다.

 

더 이상한 것은 그런 측근을 둔 신부님께서는 본당살이에서건 특수사목에서건 그 신자의 눈 밖에 난 교우를 신부님도 싫어한다는 미묘한 성립이다.

이런 사제나 수도자의 의식을 뚫는다는 것은 바위에 계란치기 보다 더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공동체라는 것은 다중의 매체다. 어떤식으로든 최대한으로 열려 있어야한다. 

그러나 그 다중성을 차단하는 근원은 열정적인 사랑의 결과다.

그렇다. 사랑한 죄 밖에 없다.

그러나 그 사랑을 받은 죄는 분명히 주님께로부터 심판받게 된다는 것을 성직자나 수도자는 알아야한다.

 

성직을 산다는 것! 수도직을 산다는 것!

주님의 이름을 걸고 군중안에서 나그네의 삶을 사는 사람은 모든 이의 모든 것이라는 절명한 사실을 망각해서는 절대로 안된다.

너무나 많은 신부님들이, 그 보다 더 많은 수녀님들이 그걸 망각하며 순간순간을 꾸려나가고 있다. 심지어 사랑한 죄가 많은 그 교우를 자신의 집사처럼 부리는 경우도 있는........

때로는 그런 신부님과 그런 수녀님을 모시고도 존중하고 인내하며 신앙의 모순들을 덮어 다독이는 평신도의 모범이 더 성스럽게 묵상 될 때가 있다. 여기에서 아버지의 무한한 능력과 양떼를 향해 포기하지 않는 신비와 멸하지 않을 교회의 존재를 발견하는 것이다.     

 

나는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사랑을 해 본적이 없다.

자식에게 할 수 있는 모성을 제외한 어떤 사랑도 마리아 처럼 해 본적이 없다. 어쩌면 그렇게 무모하고 돌발적이며 과감한 용기의 행동이 실행될 수 있는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행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사랑이 주님의 목적이 아니라 사심을 신앙으로 승격시킨 목적이라면 경계를 해야한다.

누구를 위한 사랑인가?

타인의 댓가를 요구한 사랑이 진정으로 사제를 위한 사랑인가?

 

간혹 신부님들의 성스런 사제직에 그리 좋지 못한 명패가 붙어다닐 때면 참으로 안타까울 때가 있다.

그 사랑을 받았을 때 훗날에 큰 오점이 되리란 생각을 왜 못 하셨을까?

그러나 베드로의 배반을 용서한 주님의 신비는 수 만의 교우들을 사랑으로 인도하시는 저력이 있다. 그래서 성직은, 더불어 더 많은 본당수녀님은 모든이의 모든 사랑을 먹고 이해받으며 살아지는 은총이다. 그것이 주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만 부여하신 특별한 관용이며 넘치는 사랑이다.(=일반적인 세속살이라면 몰매를 맞을 상황이지 않겠는가!) 

주님의 백성들은 모두가 신부님을 사랑한다. 그리고 모두가 똑 같이 사랑을 받고 싶어한다.

그러므로 사제는 모든이의 모든 것 으로서 거듭나야한다.

 

분명히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모든이의 모든 것으로서 흠없는 여제자 였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지 않았다면 남성우위의 시대를 장식하는 성서의 시대적 배경으로 보아 감히 모든 복음서의 전반적인 내용에 등장시켜줄 턱이 없지를 않겠는가?

신앙을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함께 사도직에 충실해야 한다.

나의 사랑이 인간인 신부님을 향한 사랑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모든 형제자매와 더불어 함께 나누는 사랑의 길을 가야할 것이다.

그것이 복음서에서 꽃을 피우는 여주인공 막달라 여자 마리아로 뽑히지 않겠는가?!

 

나는 가끔 신앙의 중책을 맡고 걱정이 되어 찾아오는 교우들에게 꼭 해주는 말이있다.

"신부님의 차를 타게 되었을 때 불의의 사고로 교통사고가 나서 동시에 죽게 되더라도 내 모습이 사제를 살다가 가신 분의 직분에 흠이 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고 동승하십시요. 신앙의 활동은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이 말도 알아들을 귀가 있는 사람만 알아들었다.

 

난세에 의인이 난다고 했고, 교회의 암흑기인 중세에 위대한 성인이 가장 많이 났다고 한다. 어쩌면 이 시대는 성인을 요구하는 시대가 아닌가 싶으다. 지극히 평범한 신앙을 사는 모습의 하찮음만으로도 성인의 반열에 오를 만큼 난감한 풍토가 조성되고 있지 않은가 걱정해 본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시자 마리아는 예수께 돌아서서 히브리 말로 "라뽀니!" 하고 불렀다. (이 말은 '선생님'이라는 뜻이다.) 요한20,16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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