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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47) 덜 익은 인간성
작성자이순의 쪽지 캡슐 작성일2004-07-24 조회수1,109 추천수5 반대(0) 신고

2004년7월24일 연중 제16주간 토요일 성 사르벨리오 마클루프 사제 기념 ㅡ예레미야7,1-11;마태오13,24-30ㅡ

 

         덜 익은 인간성

 

 

"아무개가 자네 이름을 물어봐서 가르쳐 줬네.

아무래도 일하러 가서 고향사람을 만난 것 같네.

처가집이 워낙 번화해서 이름만 대면 알지 않는가.

잡부일 나가서 이야기가 나왔는갑데.

그래서 가르쳐 줬네."

 

오후 시간에 한창 바쁠텐데 무엇이 기분이 좋았는지 틈을 내서 짝궁은 자랑이었다. 그러나 나는 공연히 화가 났다.

일단은 그러냐구 거들어주고 전화를 끈었다. 바쁜 시간에 신경을 건들고 싶지 않아서다.

시간이 지체 될 수록 화가 뽀작뽀작 깊어졌다.

 

저녁을 먹고 차분한 시간에 짝궁에게 전화를 했다.

"당신은 왜 당신 생각만해요?

왜 당신 친구한테 내 이름을 가르쳐주냐구?

왜 하나같이 굴러 다니는 인생들이 내 이름을 거론하고 친정을 들먹거리게 하냔말이야?

내 자신이 당신을 만나서 사는 죄로 친정을 끈고 사는데 당신 주변사람들이 왜 우리 친정을 아는체하고 들먹거리게 하냐구?

더구나 고향 사람이면 내가 누군지 내가 어떻게 자랐는지 다 알고 있을텐데 당신 친구들 꼴새를 보면 뭐라고 하겠어?

나도 자존심이 있다구.

지금 이 모습이 어려서 아버지 품에서 살때 알았던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은 모습인 줄 알아요?

왜 당신은 당신 생각만 하냐구?

당신 고향 친구들 처지를 좀 생각해 봐!

하나 같이 그렇고 그런데 무슨 자랑거리라고 내 이름을 가르쳐주냐구?"

 

연발탄을 다다다다 쏘아놓고 전화를 끈어버렸다.

그러고도 화가 가라않지를 않았다.

사람의 인생이 내 몫이 아니고 하늘의 뜻이라고 굳게 믿으며 살아왔으니 망정이지 자라 온 환경에 비하면 이게 어데 사람사는 인생인가?!

남자로서 여자를 데려다가 내새울 것이 무엇이 있었다고 자랑을 삼았는지 생각 할 수록 화가 나고 말았다.

다시 전화를 했다.

 

"앞으로는 내 고향사람이건 당신 고향사람이건 제발 나좀 팔아먹지말어.

내가 친정을 모른다고 사는데 왜 당신은 그러느냐구?"

짝궁의 음성이 낮과는 다르게 기운이 죽어있다.

 

"자네 말을 듣고 보니 내가 잘 못 했네.

나야 나 보다 잘난 각시에 넘보지 못헐 처가집 두었으니께 자랑거리지만 자네는 못난 나를 만나서 수준 안맞는 사람들 틈에서 사니라고 고생만 헌디 챙피허지 않것는가?!

미안허네.

앞으로는 자네를 챙피허게 허는 짓거리 안헐라네.

미안허네.

잘난 남자 만나서 좋은 집안으로 시집을 갔으면 자네가 그런 맘이 들것는가?

잘못했네. 다음부터는 안그럴라네"

 

쏟아지는 눈물을 감당하지 못 했다.

그리고 금방 후회했다.

무한히 선한 남자!

끝없이 겸손한 남자!

한없이 숙명적인 남자!

그런 남자가 내 짝궁이라서 등을 돌리고 싶을 때도 한 가닥 안스러움에 참을 수 있었다.

이런 내 짝궁의 가슴에 못을 박고 말았다.

 

이 세상 어디에서 나에게 이렇게 순정을 쏟아 줄 사람을 구하겠는가?!

아직도 여물려면 멀어버린 자아를 발견하는 것이다.

저 사람이 아니라면 지금 내 모습이 존재할 것인가?

저 사람이 있었기에 아픔도 알고!

저 사람이 있었기에 참음도 알고!

저 사람이 있었기에 서러움도 알고!

저 사람이 있었기에 궁핍함도 알고!

저 사람이 있었기에 실패도 알고!

저 사람이 있었기에 다시 일어날 용기도 알았던 것을.........

 

지금 내 모든 묵상의 뿌리는 저 사람과 동행하고 있지를 않는가!

권좌에 않아 절명한 글을 쓴들 누가 진심이라고 읽어주겠는가?

쥔게 많아서 배고픈 글을 쓴들 누가 체험이라고 인정하겠는가?

학식이 높아서 진솔한 글을 쓴들 누가 감동이라고 느끼겠는가?

 

저렇게 못났다고 자청하는 사람의 배필이 되어 살았으므로 지금 나는 세상을 향해 나로서 존재하고 있지 않는가?!

저 사람과 함께한 슬픔과 기쁨, 고통과 치유, 좌절과 희망, 원망과 사랑, 다툼과 행복, 갈등과 이해들이 나의 가슴이 되어 팔을 벌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감히 유년의 다복함으로 척박한 현실을 부끄러워 해버린 어리섞은 인간성을 드러내고 말은 것이다.

 

나의 내면에 아직도 뽑아야할 가라지가 남아있는 증거다.

뽑는다고 뽑았건만 아직도 덜자란 가라지가 눈에 뛰지도 않고 숨어 있다가 불쑥불쑥 한 포기씩 고개를 내밀고 만다.

내 자신 안의 인간성의 한계다.

죽는 날까지 뽑지 못 하고 경계를 하다가 주님께서 거두시는 날에 단을 묶어서 불에 태워주셔야 할 몫인가 보다.

 

내 심장에 고단한 푸념이 녹지 못하고 숨어 있었나보다.

아직도 더 여물어야 제 맛이 나려나 보다.

가슴이라는 열매가!

"여보야! 미안해. 덜 익은 각시를 용서해주라!"

 

'가만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밀까지 뽑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추수 때까지 둘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에게 일러서 가라지를 먼저 뽑아서 단으로 묶어 불에 태워 버리게 하고 밀은 내 곳간에 거두어들이게 하겠다.'마태오13,29-30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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