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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초라한 나라, 낮아지신 하느님 (연중 17주간 월요일)
작성자이동욱 쪽지 캡슐 작성일2004-07-26 조회수1,014 추천수5 반대(0) 신고
 1세기 역사가 플리니우스에 따르면, 겨자 나무는 다 자라도 1m 남짓의 ‘작은’ 카일 뿐이라고 그의 백과사전에 적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씨는 뿌려지기가 무섭게 ‘어느 곳에나’ 금새 넝쿨처럼 덮어 버린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인지, 이 겨자 나무는 잘 가꿔진 정원을 망친다고 까지 표현합니다...


그래서, 개신교 신약성서 학자들은 이 겨자 나무를 겨자 나물이라고 표현합니다.. 나무이기 보다는 우리네 나물과 같이 초라하고 볼품없어서 일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이 초라하고 작은 겨자 나물에, 그 겨자씨에 “하늘 나라”를 비유하는 것일까요? 구약성서에서 나오듯이, 예수님은 멋들어지고 목재이용 가치가 있는 “레바논의 체두르스”나 백향목에 하늘나라를 비유하지 않을까요?


어쩌면 거기에 아이러니가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아, 다 자라도 그렇게 초라하고 볼품없는 나물이 될 것입니다. 또한 그 나물은 더 이상 세상 속에서 뛰어나거나 웅장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거대 로마가 아니라, 일개 식민지일 뿐인 이스라엘 땅, 어디서라도 하찮게 존재하는 것일 뿐입니다.


만일, 하느님의 나라가 거대하고 웅장하고 뛰어나다면, 우리 같은 서민이 그렇게 높은 문턱을 넘어 그곳에 머무를 수 있을까? 아니, 하느님의 나라는 어쩌면 그렇게 작아야 하고 그렇게 흔하디 흔한 곳이여서 나같이 볼품없는 자가 그 안에 발을 들여 놓을 수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느님의 나라가 어디든 아무렇게나 널려 있어야 나처럼 형편 없는 자들이 그 안에 몸붙여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예수님의 겨자씨 비유는 우리에게 희망입니다. 예수님의 음성은 희망의 언약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 비유를 통해, 우리는 그 ‘초라한 나라’에 초대 받습니다. 그 나라는 형편업는 우리를 위한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께서 다시 한번 우리의 눈높이를 맞추시고, 우리보다 더 낮아지셔서 이 세상에 세우신, 우리를 위한 나라인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눈높이를 맞추려는 낮아지신 하느님을 뵙게 됩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왕국을 나의 초라한 일터, 궁색한 나의 가정, 변변찮은 내 안에 뿌리내리려 합니다. 그분의 나라가 초라해졌는데 우리는 하루 모두가 초라하지가 않습니다. 아니 초라해지려 하지 않습니다. 우쭐 대고 뽐내며 잘난척만 합니다. 당신은 문턱을 낮추셨는데, 우리는 문턱뿐 아니라 콧대까지 높습니다.


오늘날, 언제나 ‘중심’에 서고자 하며 ‘높아지려고만’ 애쓰는 우리네 군상들에게, 그래서 예수님을 믿어도 도무지 변하지 않는 우리네 속물들에게, 아니, 예수님에 대해 말해도 도무지 상류사회만을 꿈꾸는 우리네 교회들에게 예수님의 비유는 그렇게 도전으로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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