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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산책) 그릇에 비례하는 하느님의 은혜
작성자박상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4-07-30 조회수1,339 추천수8 반대(0) 신고
 

◎ 2004년 7월 30일 (금) - 연중 제17주간 금요일


[오늘의 복음]  마태 13,53-58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런데 저런 모든 지혜와 능력이 어디서 생겼을까?>


  53) 예수께서는 이 비유들을 다 말씀하시고 나서 그 곳을 떠나 54) 고향으로 가셔서 회당에서 가르치셨다. 사람들은 놀라며 “저 사람이 저런 지혜와 능력을 어디서 받았을까? 55)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어머니는 마리아요,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56) 그리고 그의 누이들은 모두 우리 동네 사람들이 아닌가? 그런데 저런 모든 지혜와 능력이 어디서 생겼을까?” 하면서 57) 예수를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어디서나 존경을 받는 예언자도 제 고향과 제 집에서만은 존경을 받지 못한다.” 하고 말씀하셨다. 58)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 곳에서는 별로 기적을 베풀지 않으셨다.◆


[복음산책]  인간이 준비한 그릇에 비례하는 하느님의 은혜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고향방문기를 들려준다. 마태오는 마르코의 원전(마르 6,1-6)을 옮겨 쓰면서 약간의 수정을 가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장황한 비유설교를 마치신 예수께서는 호수에서 서쪽으로 30Km 떨어진 고향 나자렛을 방문하신 것이다. 이는 예수께서 고향을 떠나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고 갈릴래아 전 지역을 두루 다니시며 복음을 선포한 지 3년 만에 이루어진 첫 방문이다. 물론 나자렛 사람들도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을 전해 들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고향사람들은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도 들었고, 그래서 예수의 가족들과 친척들이 예수를 붙들러 나서기도 했다.(마르 3,21) 한번은 예수께서 한참 설교를 하고 계셨는데,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찾아와 예수를 불러달라고 청했지만, 그들은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형제들인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다.”(마태 12,46-50; 마르 3,31-35)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씁쓸한 마음을 달래며 물러가야 했었다.


  오늘 고향을 방문한 예수님께 나자렛 사람들이 준비한 것은 축하의 꽃다발이 아니라 푸대접과 불신(不信)이었다. 회당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은 고향사람들이 처음에는 놀라움을 표하지만 그 놀라움은 예수께 대한 불신과 거부로 변한다. 그들은 꼬리에 꼬리를 문 의문을 제기한다. 사람들은 예수가 가진 지혜의 정체에 대하여, 그 지혜의 출처에 대하여 묻고, 그들이 예수에 대하여 알고 있는 직업, 부모, 친척, 인척들에 대하여 논하면서 포괄적으로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어디서나 존경을 받는 예언자도 제 고향과 제 집에서만은 존경을 받지 못한다.”(57절)라는 속담으로 대응하셨다. 예수의 고향사람들이 예수를 믿지 못하고 거부하는 태도는 그들이 예수라는 인물과 그분의 인격을 서로 떼어놓고 보려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즉, 과거 속에서 현실을 보려하기 때문이다. 이는 곧 예수께서 지니신 지혜와 능력 자체는 인정되지만 그것을 예수라는 인물과 결부시킬 수는 없다는 그들의 고집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가 평범한 목수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그들과 같은 범인(凡人)의 범주 안에만 머물러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는 예수가 똑똑하기는 하지만 근본이 목수의 아들을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이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우리나라 속담이 있다. 이 속담은 사실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없다’는 고정관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람들은 곧잘 상대방의 있는 그대로를 보지 못하고 그 사람의 껍데기에 불과한 고향, 학연, 지식, 권력, 재물 등 그 사람이 관련되거나 소유한 것에 의하여 판단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른다. 내적인 중심을 보지 못하고 겉으로 드러나는 외형으로만 판단하는 어리석음은 그 자체로도 불행한 것이지만 실제로 사회 전체의 불행을 초래한다. 물론 좋은 지식과 지혜와 능력은 객관적으로도 존재한다. 오늘날 첨단 과학이 가져다 준 컴퓨터의 기술이 바로 그렇다. 사람들은 컴퓨터 안에 모든 지식과 지혜와 능력이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원초적으로는 사람 안에 들어 있었던, 사람의 주관적인 인격이 일구어낸 것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인물을 배제한 그분의 객관적인 가르침과 업적만을 믿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인물과 인격, 예수님 전체를 믿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하기 위하여 사람들 앞에서 설교를 해야 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분의 가르침을 설교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설교한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설교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입으로만 전한다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처럼 사는 것을 말한다. 삶이 곧 무언(無言)의 설교인 셈이다.


  고향사람들의 불신적 태도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도 단호하다. 마르코복음은 이와 같은 대목에서 ‘예수께서는 단지 몇 명의 병자들만 고쳐주시고 다른 기적은 행하실 수 없었다.’(마르 6,5)고 말한다. 마태오는 자칫 믿음이 없는 곳에는 예수님의 능력도 한계가 있다는 오해를 없애고자 ‘별로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다.’(58절)고 수정한 것 같다. 예수께서 처음부터 크고 대단한 믿음을 요구하시지 않는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믿음이 없는 곳에는 구원도 기적도 없다는 것이다. 구원도 기적도 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지만 이 선물을 접수하는 인간 측의 믿음이 중요하다는 것은 복음서의 곳곳에서 강조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믿음이 있는 곳에는 그것이 아무리 작다 하더라도 치유와 기적이 있고 용서와 구원이 베풀어진다. 이는 곧 사랑이신 하느님의 인간 믿음에 대한 응답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혜는 인간이 준비한 그릇에 늘 비례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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