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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산책)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
작성자박상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4-07-30 조회수1,042 추천수6 반대(0) 신고
 

◎ 2004년 7월 31일 (토) -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 기념일


▣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1491-1556)

 

  오늘은 이냐시오(Ignatius) 데 로욜라 성인의 축일이다. 성인은 1491년 북(北)에스파냐의 바스크 지방 로욜라(Loyola) 성주(城主)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세례명은 이니고(Inigo)이며, 원명은 ‘이니고 로페즈 데 로욜라’이다. 어린 시절을 평범하게 지냈던 이냐시오는 나이 서른 즈음에 장교로 지원하여 프랑스와의 전쟁에 뛰어든다. 그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것은 전쟁 중에 날아든 포탄이었다. 이냐시오는 1521년 팜플로나(Pamplona)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포탄파편에 맞아 중상을 입었던 것이다. 1년이 넘는 병상생활에서 이냐시오가 한 것은 오직 예수의 삶과 성인들에 관한 독서였다. 이것이 그를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게 했던 것이다. 자유롭고 세속적으로 살아왔던 이냐시오는 오직 하느님을 위해서만 살기로 결심한다. 건강을 회복한 그는 다른 사람들도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길을 찾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인근 성지(聖地)를 순례한다. 성지 만레사의 동굴에서 기도와 고행에 몰두하면서 내적 싸움과 신비적 조명을 경험하고 ≪영신수련≫(Exercitia spiritualia)이라는 소책자를 썼다. 1523년 예루살렘 성지순례를 통해서 성인은 ‘하느님께 봉사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온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고, 온 혀를 다하여 주님을 찬양해야 할 것’을 다짐한다. 살라망카에서 신학공부를 한 후, 1528년 조국을 떠나 파리에서 라틴어, 철학, 신학공부를 계속한다. 파리대학교의 신학대학 기숙사(일명 소르본)에서 이냐시오는 예수회(Societas Jesu)를 함께 창설한 동료 6명을 만나게 되는데, 그들의 이름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베드로 파베르, 야고보 라이네쯔, 알폰스 살메론, 시몬 로드리게스, 니콜라스 보바딜라’이다.


  이들과 함께 1534년 예수회를 창설한 이냐시오는 1537년 사제서품을 받고, 1540년 교황 바오로 3세께서 예수회를 공식 수도회로 인가하자, 1541년 초대총장의 자리에 오른다. 이냐시오는 회원들이 전적으로 사도직에 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기존 수도회의 회칙과 시간경의 창(노래)을 따르지 않고, 수도복도 정하지 않았다. 그는 ‘모든 것을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Omnia ad majorem Dei gloriam) 라는 표어 아래 회원들의 모든 활동이 질서 지워져야 함을 강조하였다. 특히 이냐시오는 당시 마르틴 루터(1483-1546)와 그 추종자들의 종교개혁으로 동요하고 있던 가톨릭교회 전반에 걸쳐 내적 쇄신의 숨결을 불어넣었다. 이냐시오는 영신수련에 관한 저술과 제자교육에 힘쓰다가 1556년 7월 31일 로마에서 세상을 떠났다. 1622년 교황 그레고리오 15세에 의해 시성(諡聖)되었다. 예수회의 목적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회원 자신뿐만 아니라 이웃의 구원과 완덕을 전심전력으로 추구하는 데 있다. 예수회의 행동양식은 영신수련을 통해 가난하고 겸손하신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고 무조건적으로 따르는 전적인 자기 헌신에서 나오는 영적이며 인간적인 태도이다. 예수회의 기본정신은 창립자의 정신에 따라 회원 각자의 인격완성과 종교, 교육, 문화사업을 통하여 높은 도덕심과 인내, 소명(召命)에 따르는 생활을 하도록 이웃에게 봉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회원의 모든 활동은 엄한 기도와 영신수련을 통하여 ‘모든 것을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에 있다.◆


[오늘의 복음]  마태 14,1-12

<헤로데는 사람을 보내어 감옥에 있는 요한의 목을 베어 오게 하였다.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가서 알렸다.>


  1) 그 무렵에 갈릴래아의 영주 헤로데 왕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2) 신하들에게 “그 사람이 바로 세례자 요한이다. 죽은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런 능력이 어디서 솟아나겠느냐?” 하고 말하였다. 3) 일찍이 헤로데는 자기 동생 필립보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요한을 잡아 결박하여 감옥에 가둔 일이 있었는데 4) 그것은 요한이 헤로데에게 그 여자를 데리고 사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라고 거듭거듭 간하였기 때문이었다. 5) 그래서 헤로데는 요한을 죽이려고 했으나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고 있는 민중이 두려워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6) 그 무렵에 마침 헤로데의 생일이 돌아와서 잔치가 벌어졌는데 헤로디아의 딸이 잔치 손님들 앞에서 춤을 추어 헤로데를 매우 기쁘게 해 주었다. 7) 그래서 헤로데는 소녀에게 무엇이든지 청하는 대로 주겠다고 맹세하며 약속하였다. 8) 그러자 소녀는 제 어미가 시키는 대로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서 이리 가져다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9) 왕은 마음이 몹시 괴로웠지만 이미 맹세한 바도 있고 또 손님들이 보는 앞이어서 소녀의 청대로 해 주라는 명령을 내리고 10) 사람을 보내어 감옥에 있는 요한의 목을 베어 오게 하였다. 11) 그리고 그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나 소녀에게 건네자 소녀는 그것을 제 어미에게 갖다 주었다. 12) 그 뒤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그 시체를 거두어다가 묻고 예수께 알렸다.◆


[복음산책]  헤로데 가문의 족보


오늘 복음은 갈릴래아의 영주 헤로데가 예수에 관한 소문을 듣고 예수를 자기가 목을 베어 죽인, 그러나 다시 살아난 세례자 요한으로 착각하는 가운데, 이미 과거사가 된 세례자 요한의 수난기를 들려준다. 마태오는 마르코의 원전(마르 6,14-29)을 그대로 베끼면서 총 16절을 12절의 분량으로 줄였다. 마르코복음에 따르면 예수께서 한창 복음선포에 열중하실 즈음에, 사람들은 예수를 소생한 세례자 요한, 또는 소생한 엘리야, 또는 구약의 예언자와 같은 한 예언자로 여겼다. 그러나 마태오는 구구한 설(說)을 일축하고 헤로데의 생각만 전해준다. 헤로데는 예수를 자기가 죽인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으로 단언(斷言)하고 있는 것이다. 신약성서를 읽다보면 자주 ‘헤로데’를 만나게 된다. 헤로데, 또는 헤로데 왕이라는 이름은 신약성서에 총 58번 등장한다. 그 빈도를 살펴보면 마태오복음에 17번, 마르코복음에 11번, 루가복음에 15번, 그리고 사도행전에 15번이다. 그런데 이렇게 등장하는 헤로데가 다 같은 헤로데가 아니기 때문에 성서를 이해하는데 다소 어려움이 따른다. 따라서 누가 누구인지를 알려면 헤로데 가문의 족보를 뒤져보아야 한다.


기원전 538년 바빌론 유배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여 이를 중심으로 유대교적 종교생활을 영위한다. 그러나 333년 희랍의 알렉산델 대왕군대의 침입으로 이스라엘은 헬레니즘의 정신적, 정치적 지배를 받게 되는데, 알렉산델(333-201), 프톨로메오 왕가(200-198), 셀레우쿠스 왕가(198-164), 하스모네오 왕가(163-64)가 차례로 팔레스티나 지역을 다스린다. 기원전 64년 로마제국의 폼페이우스 장군이 대군을 이끌고 와서 시리아와 팔레스티나를 점령하고 제국의 속주(屬州)로 삼았다. 이 때부터 이스라엘 역사에 로마제국의 역사가 펼쳐진다. 하스모네오 왕가는 아리스토불루스와 히르카누스 형제의 권력분쟁으로 세력이 약화되고, 이를 틈타 헤로데 가문의 안티파텔이 등장하여 권력을 거머쥔다. 헤로데 가문은 유다가 아닌 이두매아 출신이다. 이두매아 사람들은 원래 유다왕국 남쪽에 인접한 에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인데 하스모네오 왕가의 통치시절에 유다에 합병되면서(BC.130년경) 유다백성의 일부로 간주되었다. 안티파텔은 로마제국과 그의 황제들에 대한 적절한 충성심으로 신임을 받아 시민권을 얻었고, 이어 총독에 임명된다. 그는 모든 정치적 영향력을 동원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억압하면서 자신의 입지를 굳힌다. 안티파텔은 자신의 두 아들, 파사엘에게 유다와 베레아 지역의 통치권을, 헤로데에게 갈릴래아 지역의 통치권을 넘겨주고 암살된다. 아들 헤로데는 이를 기회로 삼아 독보적인 위치를 잡는다. 헤로데는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도움과 원로원의 결정으로 유다의 왕위에 오른다. 그가 바로 헤로데 대왕이다.(BC.40-AD.4 통치) 헤로데는 치세 20년경에 대대적으로 예루살렘 성전 증축을 도모하고, 제국에 충성하며, 헬레니즘과 유다이즘의 조화를 시도하면서 자신의 왕위를 굳건히 한다. 그는 제국의 원로원으로부터 ‘유다와 사마리아의 왕’이라는 존칭을 받기도 했다. 거기에는 막대한 비용이 필요했고, 비용조달을 위하여 무자비하게 세금을 징수함으로써 백성들은 생활고에 허덕이게 된다. 아기 예수께서 이집트 피난길에 오른 것도 헤로데 대왕 때문이었다.(마태 2,13-18) 헤로데 가문에서 그만이 유일하게 ‘왕’으로 불린다.


기원전 4년 헤로데 대왕이 죽은 후(마태 2,19: 그러니까 예수님의 탄생시기는 대략 기원전 7-4년 사이로 추정된다), 팔레스티나는 그의 세 아들이 다스리게 된다. 이들 셋은 모두 이복형제들로서 아르켈라오는 헤로데 대왕이 주로 다스리던 유다와 사마리아 지역을 물려받아 AD.6년까지 다스린다.(마태 2,22) 필립보는 북동부 요르단 지역을 AD.34년까지, 그리고 헤로데 안티파스는 요르단강 동서쪽인 베레아와 갈릴래아 지역을 AD. 39년까지 다스린다.(루가 3,1) 갈릴래아 영주였던 헤로데 안티파스가 신약성서의 복음서에 주로 등장하는 인물이다. 그가 세례자 요한을 잡아들였고(마태 4,8), 오늘 복음이 전하는 바와 같이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의 춤판에서 어처구니없는 약속을 하여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베어 죽인다. 루가복음에 의하면 백성의 지도자들이 예수를 체포하여 빌라도 총독에게 끌고 가서 고발했지만 빌라도는 예수께서 갈릴래아 출신임을 알고는 헤로데에게 보내어 심문을 받게 한다.(루가 23,1-12) 이는 헤로데 안티파스가 당시 갈릴래아 영주였고, 그 시각에 과월절을 지내러 예루살렘에 와 있었기 때문이다.


신약성서에서 만나게 되는 또 한 사람의 헤로데는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그는 아르켈라오의 아들로서 ‘헤로데 아그리파 1세’인데, ‘헤로데’라는 이름으로 사도행전 12장부터 23장까지 15번 등장한다. 사도행전 25장과 26장에 ‘아그리파’라는 이름을 12번 발견할 수 있는데, 이는 ‘헤로데 아그리파 1세’의 아들인 ‘마르코스 율리우스 아그리파 2세’를 말한다. 아르켈라오는 이름난 폭군으로 10년간 유다와 사마리아를 다스리다 죽는다. 그 후 이 지역은 로마제국의 직접적 통치관할에 편입되지만, AD.41년-44년까지는 아그리파 1세가, 그 후는 아그리파 2세가 영향력을 행사한다. 다시 한번 정리하면, 마태오복음 2장에 보도된 예수의 유년시절에 등장하는 헤로데는 ‘헤로데 대왕’을 지칭하고, 그 나머지 부분과 마르코와 루가복음에 등장하는 헤로데는 갈릴래아의 영주 ‘헤로데 안티파스’를 말하며, 사도행전의 헤로데는 ‘헤로데 아그리파 1세’를 가리키는 것이다.


예언자를 죽인 사람은 다리 펴고 잠을 잘 수 없다. 헤로데 안티파스는 더 이상 편안히 살아갈 수 없었던 것이다.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베어 쟁반에 담아 오게 했으니, 그가 죽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왜 헤로데는 예수가 죽은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라고 단언했을까? 그것은 아무 겁 없이, 아무 욕심 없이 광야를 보금자리로 삼고는 사람들에게 회개의 세례와 메시아의 도래를 설파하고, 자기에게 ‘동생의 아내를 데리고 사는 것은 옳지 않다.’(4절)고 간언하다 죽은 예언자 요한의 외침이 끊임없이 들려왔기 때문이며, 결국은 헤로데가 예수를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헛된 결심이나 맹세를 남발하지 않으며 정의의 외침을 외면하지 않고 수용하는 것이다.◆[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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