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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누가 누굴 버렸다는가?
작성자이인옥 쪽지 캡슐 작성일2004-08-03 조회수1,041 추천수3 반대(0) 신고

연중 제 18주일 화요일 


독서 : 예레 30, 1-2. 12-15. 18-22

복음 : 마태 14, 22-36


노자는 天地不仁이라 했다. 하늘은 무릇 사사로이 인자함을 베풀지 않고 땅 또한 사사로이 변덕을 부리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하늘과 땅이 자기 스스로의 원칙과 법을 따라야 그 안에 사는 인간들은 안심하고 살 수 있는 것이다. 노자는 또한 聖人도 하늘과 땅을 닮아 사사로운 감정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다.


그런데 오늘 독서에서의 우리 하느님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언제는 매를 때리더니 언제는 싸매어 주시겠다한다. 징벌을 내리시면서도 곧이어 그것을 애처롭게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신다. 이같은 모순을 어떻게 이해하랴? 도대체 우리 같은 미물들이 이런 하느님의 변덕에 어찌 안심하고 살 수 있단 말인가?


예레미야에게 내린 오늘 독서의 신탁은 실은 722년에 아시리아에 의해 끌려간 북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었다는 것이 성서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러나 예레미야서의 최종 편집자는 이미 망한 북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바빌론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는 남유다에게도 해당되는 신탁으로 보완해 놓고 있다.


바빌론으로 끌려가는 가혹한 체벌의 원인을 "너희 죄가 너무 많고 잘못이 너무 커서 내가 그렇게 하여 주는 것이다"라고 밝혀주시니 그것으로 조금 수긍이 갈까? 오늘 독서에는 빠졌으나 30, 11절에서 "법대로 벌하였다."는 구절이 있어 그냥 사사로운 감정은 아니었음이 밝혀져 그나마 다행으로 여겨야할까? ‘법대로 벌하였다’는 말대로라면 주님과 그분의 백성들은 서로 사전에 협약을 맺은 법이 있었나보다.


그렇다. 독서의 마지막 구절(22절)을 보면서 생각나는 사건이 있다. 시나이 산에서의 계약이 그것이다. "이제 너희가 나의 말을 듣고 내가 세워 준 계약을 지킨다면, 너희야말로 뭇 민족 가운데서 내 것이 되리라....거룩한 내 백성이 되리라. " 백성들은 일제히 말씀하신 것을 모두 그대로 실천하겠노라고 자유의지로 약속을 하고 계약을 맺었던 것이다.(출애 19장) 그렇게 그들은 ‘그분의 백성이 되었고 그분은 그들의 하느님이 되신 것’이다.


또 다른 전승(출애 24장)에서도 이 사실을 그대로 증언한다. 그렇다. 그들은 법을 지키겠다고 세번씩이나 외쳤고 그렇게 하여 계약은 성립되었다. 그래서 하느님은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나라 없는 떠돌이들을 온갖 전투에서 승리하도록 도와주었고, 땅을 주었고, 나라의 꼴을 갖추어 주었다.


백성들은 틈만 있으면 하느님의 그 업적들을 고백하면서도, 여유만 생기면 혼자 해낸 양 반항하며 못된 짓들을 일삼았다. 그럴 때마다 하느님은 그 계약을 상기시키며 법을 지켜 거룩한 주님의 백성으로 돌아오라고 애원했으나 그들은 끝내 말을 듣지 않았다.


"생각해 보라. 아무도 돌보지 않던 너희였다. 그러나 나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석인 양 소중히 여겼노라.  나의 특별한 소유, 바로 나 자신의 것(segullah)으로 삼지 않았더냐?" [segullah: 그 자체가 꼭 가치있는 것은 아니지만, 소유한 이에겐 극히 귀중한 보물이란 의미가 있다]


자, 사실이 그렇다면 시나이 계약 때부터 바빌론 유배 직전까지의 칠백 여 년 동안, 하느님은 애절한 짝사랑을 하신 것이 되고, 하느님의 백성은 끝까지 그 사랑을 외면하고 배신한 것이 된다. 장장 칠백년의 세월의 외사랑. 결국 가혹한 쪽은 인간 쪽이다.


그렇다. 그래서 오늘의 독서는 하느님의 변덕스러움에 초점을 두어야하는 것이 아니라 짝사랑, 외사랑에 만신창이가 되었음에도 끝내 포기하지 않고 위로와 희망을 주시는 하느님의 눈먼 사랑에 관심을 두어야 하는 것이다.


"야곱이 살던 곳만 보면 애처로와서 그 천막을 다시 세워 줄 생각"이신 분, "집집에서 찬양 소리 울려 나오고, 흥겨운 웃음소리 번져" 나가기를 원하시는 것이 바로 그분의 본성이라는 말이다.


인간의 행복을 진정 바라시는 분이시기에, 지금 우리가 당하는 고통은 그분이 바라시는 것이 아니기에, 고통과 시련은 결코 길게 가지는 아니하리라. 문제는 시련 속에서 그 의미를 찾고 돌아오는 것이다. ‘시련의 의미’를 찾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돌아오는 것'이 목적이다.


독서에서 하느님의 백성들이 아시리아의 태풍과 바빌론의 풍랑에 시달리듯이 오늘 복음에서도 제자들은 역풍과 풍랑에 시달린다. 순조로운 진로를 방해하는 역풍과 풍랑은 우리의 삶 도처에서 불어온다. 제자들이 한밤중 내내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을 때 주님은 곁에 없었다. 우리도 삶의 역풍과 풍랑에 시달릴 때마다 늘 주님이 안 계신다.


‘도대체 그분은 어디 계신가? 우리가 순조롭게 항해하지 못하는 것은 모두 그분의 부재 때문이다! 그분이 나를 돕지 않기 때문이다.’ ‘왜 주님은 저 풍랑과 역풍을 허락하시는가?’


이제 그런 말은 집어치우자. 우리가 풍랑에 시달릴 때마다 늘 주님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그분이 없었을 때마다 늘 내 삶은 역풍을 맞았던 것이다. 내 삶에서 주님을 발견하지 못할 때마다 내 인생은 한치 앞도 안 보이는 한밤중이었다. 그분이 혼자 계셨던 것이 아니라, 그분을 혼자 버려두고 온 것이 바로 나다. 버리고 떠난 나를 향해 혼신을 다해 물위를 걸어오시는 분이 바로 그분이다.


이제라도 그분이 내 곁에 계심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면 때는 이미 새벽이다. 그분이 내 배에 함께 올라있음을 알고 있다면 이미 나의 인생은 순항을 하고 있는 중이다. 아직도 못 믿는가? 그분과 함께 있으면 어떤 풍랑도 어떤 역풍도 나를 피해간다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거센 풍랑도 역풍도 나를 가로막고 위태롭게 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왜 의심을 품느냐?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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