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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산책) 수난예고와 성전세의 관계
작성자박상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4-08-09 조회수1,808 추천수4 반대(0) 신고
 

◎ 2004년 8월 9일 (월) - 연중 제19주간 월요일


[오늘의 복음]  마태 17,22-27

<사람의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자녀들은 세금을 물지 않아도 되지 않겠느냐?>


  22) 제자들이 갈릴래아에 모여 있을 때에 예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사람의 아들은 머지않아 사람들에게 잡혀 23) 그들의 손에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이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매우 슬퍼하였다. 24) 그들이 가파르나움에 이르렀을 때에 성전세를 받으러 다니는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와서 “당신네 선생님을 성전세를 바칩니까?” 하고 물었다. 25) “예, 바치십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하고 집에 들어갔더니 예수께서 먼저 “시몬아,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세상 임금들이 관세나 인두세를 누구한테서 받아 내느냐? 자기 자녀들한테서 받느냐? 남한테서 받느냐?” 하고 물으셨다. 26) “남한테서 받아 냅니다.” 하고 베드로가 대답하자 예수께서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자녀들은 세금을 물지 않아도 되지 않겠느냐? 27) 그러나 우리가 그들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없으니 이렇게 하여라.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맨 먼저 낚인 고기를 잡아 입을 열어 보아라. 그 속에 한 스타테르짜리 은전이 들어 있을 터이니 그것을 꺼내어 내 몫과 네 몫으로 갖다 내어라.”◆


[복음산책]  수난예고와 성전세의 관계


  오늘 복음에는 두 가지 서로 다른 내용이 한데 연결되어 있다. 하나는 예수님의 두 번째 수난 예고에 관한 내용이며, 다른 하나는 성전세를 통하여 하느님의 아들들이 누리는 자유에 관한 말씀이다. 우선 예수님의 두 번째 수난예고 말씀은 공관복음 모두에 보도되지만 마태오는 약간의 수정을 가했다. 마르코와 루가는 그 말씀의 뜻을 제자들이 깨닫지 못하였다고 한다.(마르 9,30-32; 루가 9,44-45) 반면에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마태오는 예수의 말씀을 듣고 제자들이 매우 슬퍼하였다는 말로 고쳤다.(23절) 이로써 마태오는 예수님의 제자교육이 한 단계 진척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만족할만한 수준은 아니다. 제자들의 귀엔 수난과 죽음은 크게 들리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부활은 그냥 스쳐 지나가기 때문이다. 크게 들리는 것에 마음이 가기 마련이다. 그러니 슬퍼할 수밖에 없다. 제자들이 매우 슬퍼하였다는 것은 스승의 다가올 운명에 대한 애도이다. 예수께서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자신의 수난, 죽음, 부활을 예고하시므로 어쩔 수 없이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그런 운명에 대한 애도이다. 그러나 그 애도 뒤편에는 안타까움과 섭섭함이 숨어있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될 수 있는 길이 얼마든지 있을 것인데 하는 마음 말이다. 이 마음이 제거되지 않는 한 예수님께서 가야 하실 길과, 제자들이 가고 싶은 길 사이에 갈등은 언제든지 생길 수 있다.


  예수님의 두 번째 수난예고와 연결된 성전세 납부 문제는 마태오복음에만 수록된 고유 자료이다. 기원후 70년 로마군이 예루살렘 성전을 불태우기 전까지 제관들을 제외한 20세 이상의 모든 유대인 남자들은 일년에 한번 성전세를 바쳐야 했다. 따라서 예수님은 물론 베드로도 성전세를 내야 했다. 성전세는 이스라엘 은전 반 세겔이었다. 성전세를 징수하는 사람의 물음에 베드로가 예수님도 성전세를 낸다고 말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처음 낚아 올린 물고기 입 속에서 두 사람 몫의 성전세 한 스타테르(이스라엘 은전 한 세겔)를 발견한 것이다. 이 사건이 베드로에게는 기막힌 일이었겠지만 예수께는 대수가 아니다. 사람은 다 그렇지 않더라도 세상만물은 언제나 말씀이신 예수님을 위해 쓰일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베파게의 당나귀: 마태 21,2-3, 최후만찬을 위한 방: 마르 14,13-16 등)


  그렇다면 왜 마태오가 두 번째 수난예고의 말씀과 성전세 납부 문제를 서로 붙여놓았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언뜻 보기에 수난예고와 성전세 납부는 분명히 별개의 것이다. 그러나 마태오가 이 두 가지를 의도적으로 한데 묶어 놓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우선 마태오복음이 70년 8월 29일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이후에 기록되었다는 점이다. 즉 복음이 기록될 당시에 성전은 이미 불타고 없었으므로 성전세 또한 없었다. 세상의 임금들이 자기 자녀들에게는 관세나 인두세를 물리지 않는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잘 새겨들어야 한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의 핵심은 예수님과 성전과의 관계이다. 예루살렘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야훼신앙의 표징이자 정점이며, 모든 율법과 예언의 집합이다. 따라서 율법에 의해 제관들을 제외한 모든 유다인은 만 20세부터 반 세겔의 성전세를 바쳐야 하는 규정은 이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야훼의 아들로서 성전뿐만 아니라 모든 율법과 예언 위에 군림하신다. 하느님께서 아들에게 성전세를 징수하지 않으시는 것은 아들이 바로 새로운 성전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성전을 정화하시고,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 하신 말씀도 여기에 근거한다.(요한 2,14-21; 마태 21,12; 26,61; 27,40; 마르 14,58; 15,29) 하느님나라를 상속받을 사람들 또한 하느님의 자녀로서 성전세를 낼 필요가 없는 셈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권리만을 찾지 않으시고 때로는 실정법(實定法)에 권리를 양보하신다. 입법자와 집행자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그리 하셨다지만 아직 때가 이르지 않은 것이다. 때가 오면 새로운 성전이 지어져 하느님께 바쳐질 것이며, 모든 율법으로부터 해방된 무한한 자유가 선포될 것이다. 이는 인자(人子)가 자신의 죽음으로 취득한 자유이며, 아버지의 뜻을 죽기까지 지켜낸 아들에게 선사된 자유이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모든 이는 누구나 이 무한한 자유를 나누어 누리게 될 것이다.◆[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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